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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세벽 May 29. 2024

마음의 변주

향연

박순영 작가님의 글을 읽다 보니 제가 그린 위 그림과 너무 똑같은 삽화(일부)가 있더군요.


누구나 생각할 수 있는 발상이긴 하지만....


위 그림은 우연히 그린 순수창작물입니다. ㅋ


제 장편소설 향연이 쪼개진 심장을 꿔메는과정을 그린 거라 자연스럽게 나온 발상인 듯합니다. ㅠㅠ




아래 숏츠는 저와 함께 음반 준비를 하고 있는 그녀와 저입니다.  


쑥스럽지만...... 작가님들 잠깐 웃으시라고.....


https://youtube.com/shorts/awCZ92o0-CI?si=scvzHT9uPbSUBDGA


여기서부터 소설입니다.



정신병원에 입원한 지 삼 년 만이었다. 벨레는 약을 한 봉지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완치 판정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꾸준히 약을 복용하지 않으면 악화되기 때문에 매달 한 번씩 정기적으로 통원 치료를 받아야 했다.




집으로 돌아온 벨레는 취업하려고 여러 곳에 지원했다. 퇴원하기만 하면 어디든 들어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러나 정신 병력이 문제가 되어 자리를 구하지 못했다. 


시장에서 좌판 노점상을 하고 있는 어머니를 볼 면목이 없었다. 그는 포기하지 않고 허리를 낮추어 여러 기업체의 문을 두드렸다. 지만 지방의 작은 기업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언제나 곤란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정신병력이 있는 그가 취직하려고 애를 태우고 있다는 소문이 동창들 사이로 퍼져나갔다.

그가 공중전화에 매달려 일하게 해달라고 사정하는 것을 봤다는 목격담도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작은 철강회사에 취업이 되었던 적이 있었다. 동창의 추천 덕분이었다. 하지만 그는 출근을 하루 앞두고 회사 사정으로 당분간 채용이 어렵다는 전화를 받았다.


그가 누구에게 말한 적이 없었지만 바닥이 좁은 지역 사회여서 그 일도 동창들 입에 오르내렸다.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던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준 건 고등학교 친구였다.


대기업에서 일하던 친구는 그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던 기간만큼 경험을 쌓고 일찌감치 퇴직을 했다. 그리고 새로운 광고대행사를 차렸다.


  구는 능력이 뛰어나고 사업수완이 좋았다.  덕분에 사는 불과 일 년 만에 자리를 잡았고 도약하고 있었다. 


친구가 벨레와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 3년 동안 내내 같은 반이었기 때문에 서로를 잘 알았다.


그리고 한 공간에서 머리를 맞대고 밤낮없이 일에 매달리다 보니 두 사람은 더없이 친한 친구가 되었다.


게다가 벨레어찌나 성실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일을 처리하는지  정한과 주변 사람들그에게 정신병력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그도  마찬가지였다. 정신병력  따위는 잊고 예전의 자신감을 되찾았다.




그가 회사와 친구에게 인정을 받고 안정을 되찾았을 무렵이었다. 아라에게서 연락이 왔다.


프시의 유일한 동생인 아라는 그가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에도 또 퇴원 후에 정신가족협회의 시스템에 따라 요양원을 들락거릴 때도 잊지 않고 찾아왔었다.


그것도 태평양을 멀다 않고 건너오곤 했기 때문에 그를 만나러 한국에 나온다고 해서 새삼 놀랄 일이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오랜만이었고 늦은 감이 있었다. 그래서 벨레도 아라의 소식이 궁금하던 차였다.


아라는 그 사이 한국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으려고 혼자 애써왔지만 벨레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라가 프시가 다니던 대학 근처에 의류점까지 냈으리라고는 짐작조차 하지 못한 일이었다.




벨레는 세종문화회관 근처에서 아라를 만나곤 했. 그리고 프시와 함께 다녔던 그 길을 따라 나란히 걸었다.


처음 한동안은 프시와 함께 했던 추억을 더듬으며 순례한다는 건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라를 만나기 위해 서울을 찾는 횟수가 늘어나자 자연스럽게 발길이 추억의 장소를 따라갔다.




그날도 그랬다. 아라를 만나서 프시와의 추억을 밟으며 걸었다. 그리고 해질무렵 인사동 카페로 들어가 맥주를 마시며 휴식을 취했다.


취기와 함께 저녁어스름 같은 쓸쓸함이 몰려왔다. 혼란에 빠진 얼굴로 아라를 마주바라 보기 싫었던 그는 불쑥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인사동 골목은 언제나 붐볐다. 벨레는 별이 뜨지 않는 인사동 하늘을 올려다봤다. 아라를 향한 마음의 변주가 부끄러웠다.


어둠을 힘겹게 밀어 올리고 있는 네온사인과 상가에서 새 나온 불빛만이 거리를 비췄다. 사람들이 혼잡스럽게 뒤섞여 오가거나 서성대고 있는 틈새에 그는 서 있었다.


뒤따라 카페에서 나온 아라는 불안한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 왜? 


아라가 다가와 그의 팔을 잡았다. 그러자 그는 아라를 와락 껴안았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흘깃거렸다.


아라는 엉덩이를 뒤로 빼고 허리를 굽힌 채 빠져나오려고 했다. 그는 아라의 가슴이 팔딱이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인지 설렘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그는 슬며시 아라를 놓아주었다.


한걸음 물러서서 고개를 떨어트리고 있던 아라는 돌연 휙 돌아서더니 건물로 뛰어 들어갔다.   


벨레도 곧이어 뒤따라갔다.


아라는 층계참에 쭈그려 앉아 콧물이 흐르는 줄도 모르고 작은 소리까지 잉잉 내며 울고 있었다.


- 미안해.


그는 손수건으로 아라의 눈물과 콧물닦아주었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아라를 껴안고 토닥였다. 그제야 아라는 가만히 그에게로 몸을 기대 왔다.


- 오빠. 내가 누구야!


- 아라야. 그런 거 아냐. 착각한 거 아니라고.




아라와 헤어진 지 며칠지난 뒤였다. 벨레는 아라에게 전화를 했다. 아라는 오후 두 시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만나자고 했다.


그는 약속시간보다 서너 시간이나 일찍 서울에 도착해서 프시의 추억이 새겨진 그 길을 따라 혼자 걷기 시작했다. 어쩌면 프시와 작별인사를 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하지만 그는 부끄럼도 잊은 채 마냥 걸었다. 


그는 지하철역 입구에서 결국 추억의 순례를 멈추었다. 그리고 지하로 뛰어내려 갔다. 화장실 세면대에서 세수를 하고 나자 마음이 맑아졌다.


지하상가를 따라 걷던 그는 꽃집에 들어가 해바라기꽃을 한 다발 샀다. 그리고 그는 해맑은 얼굴을 하고 광화문 지하역 계단을 통해서 비로소 지상으로 올라왔다. 햇볕을 따라 걸어도 서늘하기만 하던 아까와는 달리 화사한 기운이 감싸고돌았다. 


세종문화회관 앞 돌계단을 서너 발짝 오르는데 층계참에 서 있던 아라가 그를 보고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선글라스를 벗어 들고 그를 향해 다가왔다.




벨레는 해바라기를 아라에게 건네주었다.  이렇다 말도 하지 않고 마치 들고 있으라는 듯.


아라해바라기의 꽃말을 더듬다가 무춤한 표정을 지었다. 그리움이라니, 누구를 그리워한단 말인가. 아라는 뒤늦게 해바라기의 꽃말을 기억해 냈다.   


아라는 언니인 프시에게 바치는 꽃인지 아니면 자신에게 건네는 꽃인지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 꽃다발 마음에 들어?


벨레는 계단을 내려오다 말고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벨레 자신조차 누구에게 꽃을 주려고 산 것인지 알지 못했다. 아라에게인지, 아니면 프시에게인지.


- 저 주는 거예요?


- 그럼 너 말고 누굴 주겠니.


그제야 그의 대답은 망설임 없이 분명해졌다. 분명히 아라에게 주겠다는 생각으로 샀지만 산 뒤에는 모든 것이 모호해졌던 것이다.


꽃말의 의미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전에 와는 사뭇 다르게 아라를 다시 만난다는 기대와 두려움으로 해바라기를 샀던 것은 분명했다.


- 예쁘네. 꽃잎이 너무 샛노란 게, 뭐랄까 약간 병적으로 화려해 보이긴 하지만.


아라는 꽃을 들여다보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아라의 얼굴을 비라보던 그의 입가에도 웃음이 번졌다.




앞장서 가던 벨레는 시청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아라는 가는 길이 바뀐 것을 알았다. 하지만 잠자코 그의 옆으로 나란히 걸었다.


아라가 먼저 레스토랑 입구 등나무 아래에서 걸음을 멈췄다. 벨레도 그녀 곁에 서서 등꽃을 올려다봤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사람은 정원을 지나 안으로 들어갔다. 바깥과 다르게 실내 공기는 서늘했다. 지붕과 벽면을 겹겹이 뒤덮고 있는 넝쿨 식물 덕분인 것 같았다.




벨레는 창 밖의 나무들 사이로 수많은 요정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랑을 고백하세요. 지금은 사랑한다고 말할 때예요. 용기를 내보시라고요. 안 그러면 사랑을 붙잡지 못해요.


요정들은 합창하듯 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 오빠. 창밖에 뭐가 있어?


아라의 목소리에 그는 퍼뜩 환상에서 깨어났다.


- 요정들이 부르는 합창소릴 듣고 있었어.


- 응. 요정?


- 농담이야.


- 그런 장난하지 마. 놀란단 말이야.


- 큰 나무들이 서 있으니까 마치 숲에 앉아 있는 거 같네.




아라는 웨이터가 접시를 들고 다가오는 것을 보고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툭툭 두드리며 마음속 깊은 긴장을 드러냈다.


아라 앞에는 해물스파게티를, 벨레 앞에는 굴 소스 해물 덮밥을 내려놓았다. 오이피클과 김치 그밖에 것들이 식탁 중앙에 차려지는 동안 침묵이 흘렀다.


아라가 스파게티를 포크에 돌돌 말아 입에 넣었다. 벨레는 아라의 얼굴을 바라봤다.


아라의 얼굴 위로 프시의 모습이 겹쳤다. 프시는 언제나 후루룩 국수 먹듯이 스파게티를 먹었다.


나 이렇게 먹는다고 흉보지 마, 아무리 오래 캐나다에 살아도 난 이 방식이 좋아. 아니 어쩌면 이 방식을 고집하는지 모르지. 오빠가 살고 있는 이 땅이 그리웠으니까. 프시의 목소리가 바람처럼 스쳐갔다.


 - 지금 돌아보면 바닷가를 헤집고 다니던 유년시절이 가장 행복했던 것 같아요. 이젠 그 시절이 꿈처럼 아득하고 아쉽지만....... 가끔 그날들이 생각나요.


아라의 포크는 스파게티접시 위에서 헛돌았다.  


- 아니 사실은 꿈을 꾸기도 해요........ 대학생이던 오빠를 따라서 바닷가 갯벌에서 소꿉장난을 하던 그 시절이 꿈에 보여요. 오빠는 우리가 졸라서 어쩔 수 없이 놀아주었겠지만. 그땐 오빠가 어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언니가 오빠에게 뽀뽀해 달라고 입술을 내밀면 저도 덩달아 입술을 내밀곤 했잖아요. 오빠는 언제나 언니의 남편이 되었고 저는 그냥 처제였고요. 그때 저는 처제가 두 번째 부인쯤 되는 줄 알았어요.


아라는 맥주로 목을 축였다. 아라의 눈빛 속으로 아득한 그리움이 출렁였다.   


 - 언니가 입술을 내밀고 눈을 감으면 오빠는 언제나 언니의 이마나 볼에 입을 맞추곤 했지만 제게는 끝내 아무것도 해주지 않아서 늘 서운해했죠. 하지만 언니가 화를 냈기 때문에 참는 수밖에 없었구요. 언니의 질투 때문에 난처해하는 오빠의 얼굴이 오히려 위안이 됐어요. 오빠가 나를 싫어해서, 아니면 언니만 특별히 좋아해서 그러는 것은 아닐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저는 그 어린 나이에도 자기에게 유리하게 해석할 줄 알았던 거죠.




버터와 마늘을 발라 구운 바게트는 손도 대지 않은 채 식탁이 치워졌다. 아라는 연신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가곤 하는데 시늉만 하는지 거의 줄지 않았다. 벨레의 잔은 어느새 반이 너머 비워져 있었다.


- 소꿉놀이를 하는데 비가 와서 옷이 흠뻑 젖은 적이 있었잖아요.


아라는 입가에 묻은 맥주거품을 혀로 걷어 들였다.


- 하늘이 어두워지고 바람이 세차게 불자 오빠가 돌아가야 한다고 언니를 달랬지만 언니는 못 들은 척 모래로 밥을 짓고 조개껍질을 부수어 국을 끓이고 조그만 돌들로 반찬을 만들어서 밥상을 차렸고, 그때 이미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는데 언니의 태연한 고집 때문에 꼼짝없이 그 밥을 다 먹고 비를 흠뻑 맞은 채 집으로 돌아가야 했어요. 아마 그날이 맞을 거예요. 언니의 고집 때문에 엘리베이터를 두고 5층까지 걸어 올라갔는데 우리 집 앞에서 처음으로 제 이마에 입을 맞춰줬어요. 언니가 쌜쭉거리기는 했지만 오빠는 비에 젖은 저를 안타까워하며 바라보았어요. 하지만 그때 저는 언니처럼 오빠를 좋아한 것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언니가 좋아하는 사람이고 그리고 무엇보다 다른 모든 아이들이 좋아하는 주일학교 선생님인 데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잘하고 친구처럼 여겨져서 막연히 좋아했던 것 같아요........ 그땐 몰랐지만....... 철없는 언니가 오빠를 위해 한 일을 생각해 보면 그 나이에도 오빠를 사랑한 거라고 믿어져요. 언니가 어떤 남자를 위해서 밤을 지새워 편지를 쓰고 선물을 사서 정성스럽게 포장하고 며칠 보지 못하면 앓아눕고....... 좋아 보이는 게 있으면 숨겼다가 오빠를 만나면 주고 그랬어요. 오빠가 서울에서 돌아오는 토요일이면 머리를 단정하게 빗어 넘기고 속옷까지 새것으로 갈아입고 정류장에 나가서 오빠가 나타나길 기다리는 거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보통 일은 아니었던 것 같아요. 오빠가 오지 않아서 막차가 끊어질 때까지 집에 들어오지 않아 엄마가 언니를 달래서 겨우 데리고 온 적도 있어요. 그런데 저는 오빠가 저를 언니보다 더 좋아한다고 생각하고 언니를 바보라고 속으로 비난했어요. 우습지요.


- 그때 아라는 몹시 작아서 초등학교 일이 학년이라고 해야 믿을 정도였어. 실제로는 삼 학년이었지만. 그렇게 작은애가 비를 맞고 입술이 파래져서 부들부들 떨던 모습이 얼마나 안쓰럽던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  


- 정말 작았어요. 학교에서는 선생님이 숫제 아기 취급 했는걸요. 하지만 지금은 이렇게 크잖아요. 언니보다 제가 2센티쯤 더 컸는데 몰랐죠. 그땐 언니가 나보다 어른처럼 크게 느껴졌지만 커서 보니까 우러러보던 키도 별거 아니더라구요.


벨레와 아라가 이렇게 마주 앉아 스스럼없이 프시를 추억하기는 처음이었다. 프시의 이야기를 꺼내기만 하면 아픔이 폭풍처럼 몰아칠 것 같았는데 그렇지만은 않았다. 저 밑바닥에 가라앉은 채 위험스럽게 일렁이고 있는 검고 무거운 고통 위로 몇 곱절 더 두텁게 투명하고 맑은 추억이 뒤덮여 있었다.




그들은 레스토랑을 나왔다. 정동교회 앞에서 문득 걸음을 멈춘 아라는 교회 뜰을 가만히 바라봤다. 담쟁이 잎사귀들이 성전의 앞면을 뒤덮고 지붕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 언제부턴가 가끔 이 교회도 와요.


그가 걸음을 옮기려고 하자 아라가 소매 끝을 살짝 잡았다.


- 잠시 들어가 보지 않을래요.


벨레는 못 들은 척 교회 앞을 지나쳐 갔다. 아라가 뒤에서 팔을 잡아당겼다. 그는 어쩔 수 없이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봤다. 햇볕을 받아 더욱 희어진 아라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보일락 말락 하다가 사라졌다.


빨간 립스틱을 바른 아라의 입술이 벨레의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 문득 손가락을 대보고 싶었다. 외롭고 고통스런 충동이었다.     


- 그냥 가. 갑자기 교회는 무슨 교회.

벨레는 사나운 목소리로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그는 프시의 실종 이후로 기도하지 않았다. 그 바닷가에서 결박된 채 재갈을 물고 목청이 찢어지도록 부르짖은 것이 마지막 기도였다. 그의 새로운 신앙은 은빛세계 하나뿐이었다.


그는 신을 의지하거나 신의 구원을 기다릴 수 없는 외로운 영혼으로 버텨야만 했다.  


- 지금은 아무도 없을 거예요. 잠시 들어가 쉬어도 되잖아요.


- 다른 데 가서 쉬어.  


그는 아라를 외면하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 오빠가 다시 기도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오빠를 위해서라도 기도를 해야 해요. 언니도 그걸 바라고 있을 거예요.


벨레는 은빛세계와 신들의 질투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어쩌면 아라는 그에게 수차례 들었을지 몰랐다.  


- 오빠, 오빠가 아직도 온전치 못하다는 거 전 알아요. 제 눈은 속일 수 없어요.


지친 표정으로 묵묵히 걷던 아라가 덕수궁 정문 앞에서 그를 막아섰다. 사물놀이패가 덕수궁 문 앞을 맴돌며 놀았다. 아라는 목소리를 높였다.


- 전 오빠가 언니를 잊기를 바랐어요. 나를 의지해서, 아니 나를 밟고서 언니를 잊고 새 삶을 살았으면 했어요. 저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요. 전 어떻게 해서든 언니가 그토록 사랑한 사람을 살리고 싶었던 거예요. 그게 언니를 위하고, 언니 때문에 절망에 빠져 있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위한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아라의 목소리는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단호하고 결연했다. 하지만 아라의 몸은 가늘게 떨고 있었다.  


- 언제까지 돌아오지 않을 언니만 기다리며 살아요. 우리도 이젠 살아야 하잖아요. 언니가 우릴 보면 더 마음 아플 거예요.


아라의 눈은 간절하게 빛났다. 절실함이 담겨 있었다.


- 어떻게 잊을 수 있어.


벨레는 단호하게 소리쳤다.  아라를 향한 마음의 변주가 끝난 것처럼.


- 맞아요. 오빤 절대 못 잊을 거예요.


아라는 덕수궁 앞에서 발길을 돌렸다. 벨레는 뒤따라 가지 않았다. 금방 아라는 인파 속에 묻혀서 보이지 않았다.


벨레는 선뜻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붙박인 듯 움직이지 않았다. 쓰러질 것처럼 아뜩할 뿐 아무런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작가님들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늘 건강조심하시고요. 언제나 행복하시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또 뵐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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