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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이 Jan 29. 2024

3월에 복직을 한다.

휴직의 바통터치(1)



3월 복직 예정.


예전에는 그 생각만 하면 불안하고 초조다.


-그만, 놀고 다시, 일, 해라, 휴먼.


달력을 볼 때마다 자꾸만 누가 나를 재촉하고 등을 떠미는 듯한 기분이 들었달까. 그동안 삼 년 반을 육아휴직이란 명목 하에 평온하게 지내다가 다시 바쁜 현대 사회의 직장인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니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한 것이다. 


내가 복직이 두렵다고 말하니 친정 엄마는 남들은 교사를 못해서 안달인데 복에 겨웠다며 나름의 위로(?)를 해주었지만, 그것도 다 옛날 말이 아니던가. 아무튼 내 불안감은 쉽게 가시질 않아서 상당히 괴로웠다.

그러고 보니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불안감에 휩싸여 아래와 같은 메모를 끄적였더랬다. 지금 다시 보니 유난도 이런 유난이 없다. 

초심을 잃었나. 너무 오래 쉬어서 그런가. 남들은 잘만 일하던데 나는 왜 이렇게 겁을 내는 걸까. 월경전 증후군처럼 복직전 증후군이란 게 있는 걸까. 아직은 바쁘고 싶지 않다. 조금만 더 게으르게 지내면 안될까. 거북이, 나무늘보, 침대, 돌멩이, 외딴 섬의 등대지기가 부럽다.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좀 더 격렬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프리덤...



그런데, 얼마 전부터 마음이 조금씩 변하는 걸 느꼈다. 장기휴면 상태였던 나이스 계정을 복구하고 복직 연수를 받는데 의외로 즐겁고 좋았. 온라인 쌍방연수였는데 매일 줌 카메라로 수많은 다른 복직 예정 선생님들의 얼굴이 보였다. 그 중에는 아기를 안고 달래며 연수를 듣는 선생님도 계시고 흰 머리가 지긋한 중년의 선생님도 계셨다. 연수를 받으며 보니 다들 비슷한 고민과 생각을 가진 듯 했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큰 위안이 되던지. 연수를 받는 내내 어쩐지 조금 눈물이 나고 코가 시큰했던 것 같다.


그날 이후로는 조금 더 의욕을 갖고 복직을 준비하게 되었다. 교재연구도 하고 적응에 도움이 될 만한 관련 도서들을 찾아 정독을 다. 일찍 일어나서 공부를 하고 하루를 좀 더 꽉차게 보내려고 다. 조금씩 변하는 중이랄까.





그러다가 최근,

짧은 강릉 여행을 통해서 드디어 복직에 대한 두려움이 거의 해소되었다.


요즘 강릉에서는 [2024 청소년 동계 올림픽]이 열리는 중이다. 우연히 남자 싱글 쇼트 프로그램을 직관할 수 있었는데, 피겨는 김연아 말고는 아는 게 없지만 모르고 봐도 충분히 즐거웠다. 경기장에는 앳되고 덜 여문 아름다운 소년들이 얼음 위에서 움직였는데 마치 씩씩한 얼음 요정들 같았다.  


나는 모두에게 고루 응원을 해주고 싶었다. 자랑스런 우리나라의 김현겸 선수는 물론이고(2위 축하!) 꼴찌를 했지만 최선을 다한 에스토니아 선수부터 국적 때문에 자꾸 눈길이 가던 우크라이나 선수, 우승 후보였지만 잦은 실수로 13위가 된 일본의 선수에게도 손이 아프도록 열심히 박수를 쳤다. 실수가 많았던 일본 소년은 고작 열다섯이라는데 고개도 못들고 코치에 기대어 우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그러면서 내가 점수보다는 최선을 다하는 소년들의 모습 자체에 매료되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나도 늙은 거다. 예전에 중학생 시절, 한 선생님이 "너희를 보고만 있어도 눈이 부시다. 젊음은 참 좋은 거다. 지금은 무슨 말인지 잘 모를거야."라고 말했었다. 그땐 정말 무슨 말인지 몰랐지만 이제는 아주 정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 풋풋한 선수들의 모습에서 젊음, 가능성, 미완성의 매력을 느꼈고 그들의 밝은 앞날을 상상했다.


그 뿐이 아니라 한 단계 더 나아가 나도 우리 학생들을 빨리 만나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열정적으로 선수들을 독려하는 코치들처럼, 아이들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잠재력을 발휘할 수 있게 돕고 싶다는 새삼스러운 생각을 했다. 피겨 경기 관람을 통해 상관도 없어 보이는 복직에 대한 두려움을 설렘으로 바꾼 것이다.






약간 남은 두려움들은

강릉의 바닷가를 거닐면서 마저 탈탈 털어버렸다.


현재 경포 해변에는 '걱정 교환소'라는 체험 장치가 설치되어 있다. 해변을 걷다가 우연히 발견했는데 남편이 내게 당신 요즘 걱정 많지 않냐며 체험해 볼 것을 권유했다. 내 걱정을 적은 공과 다른 이의 걱정을 담은 공을 교환하는 거였는데 쉽고 재미있어 보였다. 안내판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여러분은 이 걱정 교환소를 통해 누군가의 걱정을 들여다볼 수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여러분을 괴롭히는 걱정을 누군가는 알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당신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는지(어쩌면 또 다른 걱정이 더해질 것인지)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나의 걱정은 타인에게 재활용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남이 버린 걱정이, 친구의 토닥임처럼 당신을 위로할지도 모릅니다.
이제 조심스럽게 걱정이 들어있는 걱정 용기를 열어보세요.


나는 '4년 만의 복직인데 잘 할 수 있을까요?'라는 마음 속 걱정을 꺼내어 종이에 적었다. 그리고는 종이를 말아 공 안에 끼워넣고 통에 넣었다.


곧 이어 다른 공이 굴러나왔다. 거기에 '여자친구가 없다'는 걱정이 있었다. 종이에는 '키 175, 남, 010-0000-0000'라며 핸드폰 번호까지 적혀 있었는데 당사자에게는 정말 진지한 고민이였겠지만 그걸 본 이들은 다들 참지 못하고 푸하하, 웃어버렸다.


나는 누군지 모를 그에게 좋은 여자 친구가 생기길 기원하며 종이를 줄에 매달았다. 어쩌면 한 호기심 많은 여자가 종이에 적힌 번호를 보고 연락을 해서 인연이 시작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면서.  


앞서 매달아 둔 다른 종이들도 구경했다. 살이 쪄서 걱정, 공부가 잘 안 돼서 걱정, 누군가의 걱정들이 줄에 매달린 채 바람에 팔랑거리며 나부낀다. 쿡쿡대며 웃고 돌아서는데 신기하게도 정말 그 순간, 마음이 가벼워진 것 같다. 언젠가는 내 걱정 종이도 꺼내져서 허공 위에 가볍게 나부끼겠지. 나중에 우리반 아이들에게도 해보자고 하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가벼운 마음으로 마저 해변을 걸었다.

.

.

.




그래서 지금의 나는 긍정적인 상상으로 복직을 준비중이다. 

아직은 그래도 교사라는 직업이 꽤 멋지고 보람있는 일이라 믿는다. 그렇게 믿고 싶다. 아이들이 행복한 학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는 열망으로 가득한 상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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