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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침이 Oct 09. 2023

군인이 되고 싶던 날

블랙이글스의 에어쇼를 보면서

2023.10.09(월) 세종중앙공원 블랙이글스 에어쇼


*이 이야기는 블랙이글스와는 상관없는 과거 회상글 혹은 넋두리에 가깝습니다.




오전 11시 반, 예정된 시각에 정확하게 맞춰 굉음이 들려왔다. 하늘 저 멀리에서 8 대의 비행 편대가 빠른 속도로 날아왔다. 공군 특수 비행팀 블랙이글스에어쇼가 시작된 것이다. 전날 연습 비행을 할 때부터 아이들이 거실 창문에 달라붙어 눈을 떼지 못했기에 오늘은 과연 어떨지 고대하던 참이었다.


기대한 만큼 에어쇼는 환상적이었다. 블랙 이글스는 정말 이름처럼 늠름한 독수리들 같았다. 그들은 넓은 하늘을 캔버스 삼아 다양한 모습으로 편대 비행을 다. 두 대의 비행기가 마주 보고 날다가 아슬아슬하게 교차해서 지나가기도 하고, 저 멀리 점처럼 사라졌다가 어느 순간 뒤쪽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타나 관중을 깜짝 놀래키기도 했다. 우리나라 공군 전투 조종사들 중에서도 최고의 인재들로 이루어진 팀이라더니 과연 그럴 했다.


비행은 마지막 순간까지 훌륭했다. 두 대의 비행기가 하늘에 수를 놓자 사람들은 어어 저거 저거, 하다가 곧 환호하기 시작했다. 하늘에 그려진 것은 커다란 태극 문양이었다. 아이들은 "태극기다, 태극기!"하며 깡충깡충 뛰었다. 나 역시 힘차게 박수를 쳤다. 그 순간만큼은 나도 대단한 애국자였다.






행사가 끝나고 들뜬 아들과 집으로 걸어오면서 대화를 나눴다. 과학관에 다녀오면 과학자가, 유튜버를 보고나면 유튜버가 되고 싶다는 아홉 살 아들은 오늘도 어김없이 엄마 나도 조종사가 될래- 하고 말해왔다. 아들이 내내 하늘에서 눈을 떼지 못하였기에 나도 당연히 그가 그런 말을 할 거라고 예상했다.


- 그거 알아? 블랙이글스 조종사가 되려면 공부랑 운동 둘 다 열심히 해야 돼.


나는 그 와중에도 치사하게 아이의 순진한 꿈에 욕심을 부렸다. 이러저러하므로 그러니까 노오력을 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이 순간 질린 표정을 지었으나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순순한 대답에 나는 이미 멀리 날아가버린 그들에게 고마워요 블랙이글스, 하고 (속으로만) 감사인사를 전했다. 예전에 잠시 군인을 꿈꾸던 여자는 2023년에는 그 직업을 이하여 아이를 조련하는 치졸한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 ㅇㅇ아, 이건 비밀인데 엄마도 예전에 잠깐이지만 공군 조종사가 되고 싶었어.

- 진짜! 근데 왜 안됐어?

- 음, 엄마는 공부랑 운동을 열심히 안했거든.


여전히 치졸한 대답을 하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이십여 년 전의 어느 가을날을 떠올렸다. 사실은 오늘 에어쇼를 보는 내내 떠올렸던 장면이었다. 그동안은 머릿속 서랍에 깊숙이 넣어두고 한번도 꺼내지 않았던 장면이기도 했다.


그날 나는 모 사관학교의 운동장 계단에 앉아 있었다. 운동장에서 구보하는 병사들을 빨갛게 부은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피가 흐르는 왼쪽 팔을 주무르며. 평생 지루하고 평범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돌이켜보면 내 성격이 좀 엉뚱해서 그런지 꽤 여러 분야에 호기심을 가지고 이것저것 도전했던 것 같다. 대부분은 실패했지만-지나면 다 잊지 못할 추억으로 남았다. 그때 그날도 그랬다.






유치해서 아이에게 차마 하지 못한 말 - 첫 번째.

출처: 픽사베이

 

[ 엄마가 왜 군인이 되고 싶었냐면, 그건 '멋있어서'야. 멋지니까 블랙이글스 조종사가 되겠다는 너랑 똑같은 이유.  


어릴 때에 TV에서 <탑건>이란 영화를 봤어. 청춘, 우정, 사랑, 성장, 애국심, 강한 미국... 사람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모든 요소가 그 영화 한 편에 다 들어 있었단다. 특히 해군 소속 전투기 조종사 매버릭으로 분한 탐 크루즈가 아주 멋졌지. 잘생긴 남자가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하늘을 날아다니며 적군을 격파하는데 어떻게 심장이 안 뛰고 배기냐구. 군인은 멋진 거구나 그렇게 생각했지.


또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어떤 선배 때문이기도 해. 매년 봄이 되면 각 사관학교에서 고등학교로 입학 설명을 하러 왔거든. 점심 시간에 책상에 엎드려 자는데 갑자기 친구들이 날 깨우는 거야. 그날 학교에 온 사관생도 중 한 명이 나를 찾는다면서. 야아~ 그 오빠 누구야, 엄청 멋있어, 하면서 아이들은 거의 절규를 했지. 정작 나는 그럴 사람이 전혀 없어서 어리둥절했지만. 나중에 보니 그는 그냥 동향 선배였어. 그래도 정복을 입은 선배의 모습은 꽤 멋졌어. 훗날 미니홈피 에서 선글라스를 끼고 전투기에 올라탄 그의 사진을 보는데 가슴이 두근거렸지. 이성적인 호감은 아니었어. 그건 동경에 가까웠다. 그때부터였나봐. 그처럼 멋지게 군복을 입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 든 나를 꿈꾸게 된 것이...


아주 시시한 이유지? 그때의 엄마는 고작 멋있다는 이유만으로 군인의 꿈을 꾸는 풋내기였거든. ]






유치해서 아이에게 차마 하지 못한 말 - 두 번째.


출처: 픽사베이

[ 어느 해 가을, 2차 시험을 보기 위해 모 학교에 갔던 날이 유난히도 기억에 남는구나. 긴장은 됐지만 처음에는 설레는 마음이 더 컸지. 다가올 일들을 전혀 몰랐으니까.


그날 오전에 신체 검사를 했다. 처음에 채혈을 했는데 피를 뽑아주는 병사 오빠(?)가 좀 서툴렀어. 주사 바늘이 내 팔뚝을 주욱 그어서 일자로 상처가 나고 피가 몇 방울 튀겼지. 너도 알다시피 엄마는 약간의 주사 공포증이 있잖니. 처음부터 당황했지. 씩씩하게 보이려고 꾹 참았지만 그 병사가 내 팔에 주사바늘을 서너 차례 쑤시다 말다 하면서 피를 많이도 뽑아갈 에 엄마는 점차 어지럼증과 함께 팔에 힘이 쑥 빠지는 것을 느꼈어.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며 호흡을 진정하려 노력했지. 그건 조금 있을 난장판의 불길한 서막이었다.


잠시 후 엄마는 또 다른 검사를 위해 아래 속옷을 제외한 맨몸에 가운만 걸치고 서 있었단다. 방에 들어가니 여군이 내게 왼쪽 한 번, 오른쪽 한 번 해서 절반씩 가운을 벗어보라 하더라. 몸에 흉터나 문신, 상처가 있는지 확인하는 듯했다. 이때도 좀 부끄러웠지만 군인이 되기 위해서라 생각하니 참을 만했어.


그런데 그분이 뒤돌아 팬티를 조금 내리고 상체를 숙여보라 했을 때는 다시금 당황했지. 얼굴이 화끈거렸어. 내가 속옷을 내리자 그분은 내가 치질이 있는지 꼼꼼히 확인하더구나. 치질 검사라고 그녀가 직접 말해주지는 않았지만 엉덩이에서 느껴지는 힘이 들어간 손가락들과 조금 숙인 그의 고개에서 '지금 이것은 치질 검사입니다.'라는 것을 아주 확실히 이해할 수 있었어. 엄마는 그 짧은 순간에도 생각했지. 지금 이 순간, 내가 더 괴로울까 그녀가 더 괴로울까와 같은 생각들 말이야. 그녀는 표정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 있나 할 정도의 무표정이었기에 실제 마음이 어떠했는지는 잘 모르겠구나. 그저 군인 정신이 대단하다는 것만큼은 잘 알겠더라구.

아무튼 엄마가 그런 검사를  분명히 사실이었어. 나중에는 꿈이었나 싶어서 아빠에게 슬쩍 물어보기도 했지만. 당신 군대 갔을 때 치질검사 받았어? 라고 말이야. 아빠는 안받았다고 했지. 그 말을 들으니 정말 꿈이었나 싶기도 하더구나. 


엄마는 방에 들어가 짐을 풀고 약간의 쉬는 시간을 가졌단다. 그런데 손을 씻는데 온수가 나오지 않더구나. 그래서 우리에게 안내를 해주던 장교에게 다가가 물이 너무 차가운데 온수는 안나오는 여쭤보았지. 대답도 하지 않고 그저 날 힐끗 쳐다보는 그 분의 눈에서 뭐 이런 애가 군인하겠다고 왔나 하는 생각이 단번에 읽혔고 엄마는 그만 무안해져서 찍 소리도 못하고 방으로 돌아왔어.

그때부터 엄마는 확실히 깨달았지. 아, 나는 군인이 되면 안되는 사람이구나. 내가 군인이 되면 여럿 괴롭겠구나. 강한 확신이 들었지. 

우리 아들은 엄마와는 좀 다르니까 커서 당당히 나라 지키는 멋진 군인이 될 수 있을까?





출처: 픽사베이



속으로는 수다쟁이처럼 끊임없이 아이에게 그날의 장면들을 말해주면서도 실제로는 아이의 손을 잡고 말없이 걷고만 있었다.


'그날 오후에 체력 검정이 시작되었지. 오래 달리기나 윗몸 일으키기 같은 건 여자 중 1등을 노려보겠다는 자신감도 있었어. 그런데 팔굽혀펴기는 영 자신이 없었거든. 원래도 10개를 넘기지 못했어. 그래도 5개만 넘기면 합격은 하니까 다른 분야에서 부족한 점수를 만회하겠다는 작전을 짰다. 그런데 아까의 채혈에서 빠진 왼팔의 힘이 영 돌아오질 않는거야. 불길했어. 그래도 설마 하는 마음으로 팔굽혀펴기를 시작했단다.


그런데 옆에서 하나, 둘, 하고 카운트를 세주던 병사가 내가 아무리 팔을 굽혀봐도 다시, 다시, 만 연발하는 거 있지. 엄마 자세가 영 안좋았나 봐. 결국 5개를 못 넘겼어. 엄마는 한번만 더 해보겠다고 애원했고 잠시 후 한 번의 기회가 더 주어졌지만 역시 넘기질 못했어. 이렇게 형편 없을수가 있나. 눈물이 흘렀다. 장교가 말했어. 여기까지 온 것만으로도 잘한 거다. 안타깝지만 다른 좋은 학교에 진학할 수 있을거다. 그리고 그는 나한테 짐을 싸서 그만 가라고 했어. 순식간에 나와 다른 낙오자들을 남겨두고 모두들 다른 곳으로 이동하더라.

 

멍하니 서있는데 다른 분이 다가와 나의 어깨를 두드렸어. 내가 쭉 지켜봤는데 넌 정말 최선을 다했다고. 그런 집념이라면 다른 경로로도 얼마든지 훌륭한 군인이 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말했어. 엄마는 다시 눈물이 흘렀단다. 그러면서도 깨달았지. 아니요. 저는 훌륭한 군인과는 거리가 한참 먼 걸요. 겉멋으로 지원하더니 꼴 좋구나. 툭하면 울기나 하고 팔굽혀펴기를 5개도 못하면서 무슨 여군은 여군인가. 그때서야 정신이 들더라구.'


내가 봐도 그때의 나는 너무 푼수 같았다. 길고 긴 넋두리 중에서 아이가 들어서 좋을 얘기가 단 하나도 없었다. 속으로는 아이가 질리도록 기나긴 실패기를 얘기하는 수다쟁이였지만 실제로 아이에게 건넨 말은 그저 "엄마는 너의 꿈을 응원해."뿐이었다.


꿈이 하루에 열두 번도 더 바뀌는 아이, 나를 닮아 내향적이며 여린 감성을 지닌 아이. 조용하고 순진하며 무언가를 만들기를 좋아하는 아이. 한때 겉멋으로 군인을 지원했던 엄마를 둔 아이. 겉멋으로 군인이 되고 싶다 말하는 아이. 그러나 엄마와 달리 아침 6시면 스스로 일어나 알아서 숙제를 하고 가방을 챙기는 대견한 아이. 그래서 어쩌면 엄마의 마음 속에 군인이 되어도 괜찮지 않을까 기대감을 갖게 하는 아이.

  

내 아이 오늘 꾼 꿈은 최고의 공군 전투기 조종사, 블랙이글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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