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컴퓨터 모니터에는 언제나 포스트잇 네댓 장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기억력이 변변찮은 자의 궁여지책이라 하겠다. 꼭 해야 할 일이나 챙겨야 하는 일을 깜빡하는 실수를 줄일 수 있으니 유용하다. 그렇다고 포스트잇이 내 부족한 기억력의 문제를 모두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나는 선천적으로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유전자를 갖고 태어났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뇌에서 이름을 저장하는 기간이 매우 짧다. 만나는 사람이 누구든, 만난 기간이 어떻게 되든 관계없이 헤어지고 나서 약 6개월가량 지나면 나의 뇌는 그 이름을 십중팔구 자동삭제하고 만다. 다들 알겠지만 이것은 포스트잇으로 해결할 수 있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나의 타고난 결함을 인지할 수밖에 없는 경험을 할 때마다 깊은 자괴감이 들곤 한다. 학생의 이름을 불러주는 정겨운 선생이 되고 싶은데 그게 안 된다. 그나마 가르치고 있는 학생들은 덜한 편이지만 진급하거나 졸업한 학생들의 이름은 참으로 아득하다. 담임했던 학생들마저도 기억이 나지 않으니 어쩌면 좋은가? 오랜만에 찾아온 제자를 끌어안으며 이름을 불러주는 선생님은 참으로 다정해 보인다. 마치 한시도 제자를 잊지 않고 그리워한 것 같다. 이름을 불러주지 못하는 선생은 어떤가? 헤어지면 관계를 칼같이 끊어버리는, 인정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비정한 인간이라 여기지 않겠는가? 문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나는 예전에 함께 근무했었던 동료와 우연이라도 마주치게 될까 봐 전전긍긍한다. 몇 번 그런 상황에 맞닥뜨리게 됐는데 그때마다 상대는 뒤춤에 감춰둔 꽃을 꺼내 건네듯 내 이름을 부르며 반갑게 악수를 청하는 반면, 나는 도무지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어정쩡한 인사로 얼버무리며 꽁무니를 빼기 일쑤였다. 이런 경우, 나는 민망함과 창피함을 넘어 참담함을 느낄 수밖에 없는데, 이러한 심리적인 충격이 한 번 두 번 쌓이다 보니 일종의 트라우마가 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안면이 있는 사람이 먼발치에서 다가온다 싶으면 부러 곁길로 빠져 몸을 숨기곤 한다. 넉살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 숫기 없는 것이 천성이다 보니 달리 방도가 없는 것이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니 이래저래 참 딱하게 살 수밖에 없다.
그런데 나 같은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름을 부르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아내는 연애 시절에 부르던 대로 여전히 나를 ‘오빠’라 한다. 이따금 딸의 이름 뒤에 아빠를 붙여 'OO이 아빠'라고 칭하기도 한다. 딸들이 내 이름을 불러줄 리 없고.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 엄마는 일관성 있게 ‘아들’이라 한다, 나와 인연을 맺은 사람들은 ‘자네’, ‘선배(님)’, ‘선생(님)’, ‘아버님’, ‘형’ 등으로 기막히게 이름만 쏙 빼고 나를 불러 댄다. 좀 친하다 싶으면 ‘어이’, ‘야’, ‘짜식아’ 등이 막 나온다. 나처럼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도 아닐 텐데 쉬운 이름 두고 다들 왜 그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름에는 붙여준 이의 깊은 뜻이 들어 있기 마련이다. 내 이름자에도 세상을 밝게 살아가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아버지는 내 이름을 짓느라 작명소에 쌀 두 가마니 반 값을 치렀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곤 했다. 그리고 그 말끝에는 이름 값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을 언제나 꼬리표처럼 매달았다. 아버지는 비싼 값을 내어 주고얻은 이름이니 본전이라도 뽑아야겠다는 심사였는지 내게 딸이 둘이나 생겼음에도 'OO 아비야'라고 하지 않고 'OO아'라고 내 이름을 호명했다. 중풍으로 쓰러져 10년 넘게 병마에 시달리는 중에도 아버지는 어눌한 발음일망정 이름을 불러주었다. 그러니 충분히 본전은 뽑고도 남았을 것이다. 나는 간혹 아버지의 유언 같은 말을 떠올리며 나 스스로에게 이름 값하며 살고 있는가를 물어보곤 했는데그때마다 두 가마니 반은 고사하고 한 가마니도 못 되는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낯이 붉어졌었다.
우리는 이름을 감춰야 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무서운 범죄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면 이름을 드러내서는 안 된다. 또한 온라인에서 자유롭게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남이 이름을 모르도록 해야 한다. 사생활을 보호하기 위해서도 이름은 꼭꼭 숨겨야 하는 것이 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이름을 감춰주는 것이 예의고 배려가 되었다.요즘 라디오 방송을 들어보면 이름을 불러주는 경우는 거의 없다. 진행자가 사연과 함께 음악을 신청한 사람의 이름을 소개하기보다는 휴대폰 번호 네 자리를 불러준다. 까까머리 학창 시절, '별이 빛나는 밤에'라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정성스레 사연을 적어 보내곤 했다. 그러고는 신청한 날짜에 사연과 신청곡, 그리고 내 이름을 DJ가 낭랑한 목소리로 들려주길 바라며 귀를 쫑긋 세웠더랬다. 하지만 그 시절의 설렘과 낭만은 영화 '써니'에서나 어렵사리 만나볼 수 있는 구경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름 은폐의 선봉장 노릇을 하는 관공서는 물론이고 병원이나 은행을 가도 숫자가 이름을 가려주고 있다. 그러다 보니 귀한 뜻이 담긴 이름을 듣는 일이 정말 귀한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런데 얼마 전에 성까지 붙여 내 이름을 정확히 불러준 이가 있었다. 두어 달 전에 조그만 빌라를 처분한 후, 양도소득세를 신고하고 납부했다. 그로부터 2주 정도 지났을까? 우편함에 등기 우편물 하나가 도착했다. 내가 성실하게 신고했는가를 확인하기 위해 이런저런 서류가 필요하니 보내달라는 내용이었다. 날짜까지 친절하게 알려주며 기한을 넘기면 경찰에 신고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법이 정한 대로 나름 성실하게 신고했기에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지만 요구한 서류를 준비해 다음 날 등기로 보냈다. 며칠 후, 담당자에게 전화가 왔는데 ‘OOO 씨’ 맞죠? 라며 정말이지 기억나지 않을 만큼 오랜만에 내 이름을 불러주는 것이었다. ‘예’라고 확인해 주었더니 몇 가지를 더 묻고는 전화를 툭 끊었다.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 다오. / 그에게로 가서 나도 / 그의 꽃이 되고 싶다.’라고 김춘수 시인은 「꽃」이라는 시에서 노래했지만,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준다고 해서 그의 꽃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란 생각에 꽤 씁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