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詩作)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고 <심장>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몸>으로 하는 것이다. <온몸>으로 밀고 나가는 것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온몸으로 동시에 밀고 나가는 것이다.
- 「시여, 침을 뱉어라」중에서
그의 말처럼 시인 김수영(1921~1968)은 한국 현대문학사의 뜨거운 상징이다. 누구보다도 치열한 정직성과 현실참여 의지로 시를 썼던 시인.
거짓을 배격하고 구속과 억압을 거부한 시인, 자유시인 김수영. 자유와 사랑을 노래한 우리나라의 대표적 시인 김수영.
그릇된 것들에 대한 철저한 부정 정신으로 자유와 혁명을 향한 역동적 언어로 기억되는 그의 곁에는 한결같이 그를 지지해 주던 김현경 여사님이 계셨다.
김현경 여사님은 진명여고 2학년이던 1942년 5월 김수영을 만났다고 했다. 여섯 살 위 김수영을 ‘아저씨’라고 부르면서 줄곧 따랐다녔다며, 그때의 이야기를 하실 때면 환한 미소를 짓고는 하셨다.
1950년 초 서울 돈암동에 신접살림을 차렸지만 곧이어 터진 전쟁이 그들을 갈라놓았다고 한다.
여사님께서 쓰셨던 책 '김수영의 연인'을 선물로 받아
읽은 적이 있다.
“내 곁을 떠난 지 어언 45년… 나는 아직 당신과 동거 중입니다”라는 진주황색 띠지에 쓰인 글과 “김 시인은 내게 운명이었다. 다시 태어나도 김 시인과 결혼할 것이다”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시인에 대한 사랑이 느껴지는 책, 김수영의 연인을 읽는 내내여사님께서 지금까지 해주셨던 이야기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마치 그림처럼 생생하게 담아낸 소설보다 강렬한 에세이를 읽고 있으니
시인의 아내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를 되새겨 보았다.
김현경 여사님의 댁에서 나는 김수영 시인의 유품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한 여인의 사랑도.....
많은 문인들은 자신의 삶과 정신을 글과 말로 풀어내며 시대를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에서 우리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그려본다.
김수영 시인의 시를 누구보다 아끼고 사랑한 한 여인의 고단한 삶의 여정.
시인의 시간을 그대로 안은 채, 여전히 시인의 아내이기에 행복하고 고맙다고 말하는 그녀는
시인이 돌아가시고 난 후의 난경과 고독 또한 시인의 아내라는 강인한 자의식으로 넘어설 수 있었다고 한다.
김현경 여사님께서는 사인을 해주실 때면,
꿈 몽자가 너무 좋아 적어주시고는 한다.
여사님은 그 시대의 신(新) 여성이었다. 문단이란 말도 생소했던 1940년대. 이화여대 문과생이었던 그는 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폴 발레리의 시를 읽었으며 이화여대 교수였던 정지용의 아끼는 제자였다고 한다. 또한, 김소월의 ‘산유화’에 곡을 붙인 작곡가 김순남이 오촌 당숙이다. 김순남의 집에 놀러 가서 자연스럽게 임화 오장환을 비롯한 문인들과 어울렸다고 했다. 그래서 그런지 여사님은 영어와 일본어를 잘 구사하셨다.
김수영 시인께서 직접 번역하셨던 메멘토 모리에는 직접 영어로 사인까지 해 주셨다.
여사님께서 사시는 용인까지는 차로 1시간 30분이 넘는 거리이다.
10년을 넘게 그 길을 오고 가며,
스쳐 지나가는 많은 것들의 기억을 떠올려냈다.
요즘 들어 부쩍, 쇠약해지신 여사님의 모습을
볼 때면 한 시대를 살아낸 강인한 아내이자, 어머니의 위대한 삶의 가치를 전해주는 것 같다.
김수영 시인은 책을 읽을 때면, 낙서나 책장을 접어 자신의 것으로 읽어내는 독서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이러한 손때와 흔적 하나까지도 아직도 소중하게 간직하고 계셨다.
여사님은 남편 사후에 의상실 경영에 미술 컬렉터 및 디렉터로 줄곧 활동하면서 사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여사님의 패션 감각은 매우 뛰어났으며, 용인 집에는 많은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김현경 여사님께서는 “지금 읽어도 진부하지 않고 새롭게 느껴지는 시를 쓰신 비결은 공부였다”며 “철학책을 탐독했는데,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 얘기를 많이 해서 충무로에 갔다가 전집을 사다 드리니 좋아하셨다”라고 회상했다. 그리고 그 전집을 직접 보여주시기도 했다.
그녀는 김수영 시인에게 있어서 생애 내내 가장 멋진 여인이자 아내였음이 분명했다.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이야기는 시의 초고를 가지런히 정서하는 일도 그녀의 몫이었다고 했다.
여사님은 어린 시절부터 그림과 글씨에 남다른 재주가 있으셨다고 한다. 그래서 김수영 시인의 시를 가지런히 옮겨 적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도왔을 뿐만 아니라, 시를 쓸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 위해 갖은 노력을 하셨다고 한다.
“김 시인(김수영)은 초고를 원고지에다 안 쓰고 백지에 썼어. 이 양반은 원고지도 뒤집어서 백지에 썼지. 초고가 완료되면 무조건 나를 부르는 거지. 제일 왕성할 때는 마포 구수동에 살림을 차렸을 때였어. 구공탄에 밥을 짓는데, 그 밥이 부글부글 끓을 때 서재로 나를 부르는 거야. 그러면 나는 밥이 탈까 아예 솥을 내려놓고 들어갔지.”
시인을 떠올리는 그녀의 눈망울이 어느 때보다 밝았다.
“얼마나 까다로운지 원고지를 앞에 딱 내놓고 정좌 상태로 앉아 있어. 그러면 (내가) 시 제목, 그리고 김수영이라고 쓰고 한 자 한 자 정서를 했어. 행여 한 자라도 잘못 쓰면 ‘다시!’라고 했지. ‘땜질’이 안 됐어. 그러면 처음부터 다시 썼지. 그렇게 써서 한 통은 잡지사에 보냈고, 하나는 간직했고….”
김수영 시인은 언젠가 “시를 쓰는 나의 친구들 중에는 나의 시에 ‘여편네’만이 많이 나오고 진짜 여자가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을 하는 친구”도 있었다고 고백한 바 있다. 바로 “나는 닭띠이고 나의 아내가 바로 토끼띠”(‘토끼’)인 김수영과 김현경 사이의 사랑과 이별, 재회와 사랑으로 이어지는 여정은 김수영 시인에 있어서 사랑의 역사였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시편에 ‘여편네’가 많이 나오는 것은 또 다른 의미가 있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