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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상은 Jul 24. 2023

일을 즐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나이 든 여자의 사업 이야기 /재창업 한 달의 마음가짐

재창업을 한 지 한 달에 돼 간다. 사업자 등록을 내자마자 시작한 첫 번째 일이 아직 안 끝났다. 한 공공기관의 브로슈어를 만드는 일인데, 이제 겨우 전체 디자인이 마무리되어 수정 작업을 기다리고 있다. 그래서 새로운 영업은 시작하지도 못했다. 내가 만든 인쇄물을 들고 영업을 다녀야 신뢰가 갈 것이기 때문이다. 늙은 여자가 명함만 들고 나타나 디자인 일감을 달라고 하면 누가 쳐다나 보겠나.


우리 회사 첫 번째 일이고 내가 텍스트와 진행을 담당해야 해서 20여 일간 꽤 바빴다. 지금은 전체 디자인의 수정 과정과 제작만 남았기 때문에 1주일간 내가 할 일은 없다. 20여 일을 돌이켜볼 시간이 났다. 이 틈에 개인적인 마음가짐을 정리해 봤다.


첫째, 수입의 많고 적음에 너무 전전긍긍하지 말자.


우리 회사의 인력 구성을 보면 내가 영업과 기획, 텍스트, 총괄 진행, 회계를 담당한다. 기자 출신인 또 한 명이 텍스트를 함께 나눠 맡고 이 사람이 사진도 담당한다. 디자인은 인쇄와 웹진으로 나눠 네 명이 대기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인쇄 공정을 잘 아는 제작 담당이 두 명이다. 이들 7명이 전부 1인 사업자들이거나 프리랜서다. 하나의 일거리가 있으면 협동조합처럼 일을 프로세스별로 나눠하는 방식으로 운영한다. 견적도 각 프로세스 담당이 제시한다. 일단은 이렇게 시작했다. 정규직을 쓰기에는 인건비를 누구도 감당할 수 없기 때문에 탄생한 조직 형태다.


프로젝트별로 프리랜서들이 '헤쳐 모여' 일하는 방식이어서 만약 내가 나의 수익에만 노심초사하다 보면 자칫 팀워크에 반목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상대가 제시한 가격을 되도록이면 그대로 인정해 주자. 깎아야 한다면 조금만 깎자. 한 달에 내가 반드시 벌어야 할 돈은 80만 원이다. 그것만 넘기자. 그래야 서로 최선을 다할 것이고 결속도 오래 유지될 것이라고 믿자.


둘째, 내 나이의 생산성은 젊은이에 비해 반뿐이 안 된다는 것을 인정하자.


최저 시급으로 계산할 때 월 80만 원을 벌려면 하루 3시간 일하면 되지만 나는 하루 6시간 일해야 젊은이들만큼 해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 툴툴대지 말고 열심히 일하자.


셋째, 세대 차이를 깨닫고 흔쾌히 시대 문화를 따라가자.


이번 일을 담당한 디자이너가 나에게 불만을 얘기한 적이 있다. 디자인 단가도 싼데 일하기가 힘들다고 했다. (그럴 리가...) 의아해서 물었다.

"무슨... 문제가 있나요?"

"시간을 너무 많이 잡아먹어요."

"그래요? 어떻게 하지? 일정을 조정해야 할까요?"

"그런 게 아니라, 대표님이 너무 전화를 자주 하시잖아요."

"예? 제가... 하루 한 번 정도 전화한 것 같은데... 그리고 일 얘기 말고는 안 한 것 같은데요...?"

"다른 데서는 하루에 한 번도 전화 안 해요."

"어... 우리 세대가 문자 보내기보다 전화 통화를 좋아하긴 하죠."

나는 메일을 보내고도 전화로 꼭 확인을 하는 버릇이 있었는데 다음부터는 일체 전화를 안 했다. 메일과 문자로만 의사를 전달했다. 물론 이후 아무 문제가 없었다.


넷째, 나의 늙음에 대해 너무 긴장하지 말자. 젊게 보이려고 너무 애쓸 건 없다.


이번 브로슈어 일을 시작할 즈음, 발주처의 홍보 담당이 새로 왔었다. 전화 통화를 해보니 무척 젊은 사람 같았다. 정신없이 바쁜 것 같았고 말도 엄청 빨리 했다. 그래서 한번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누기로 했을 때 나는 은근히 걱정이 됐다. 나에게 일을 맡긴 사람은 기관장이었으므로 일이 날아갈 걱정은 없었지만 새로 온 홍보 담당이 혹시 나이 든 여자가 디자인 회사를 한다고 들어온 걸 기막혀하면 어쩌나 염려스러웠다. 조금이라도 세련돼 보일까 하여 재킷을 새로 장만하기까지 했다.


만나기로 한 날, 카페에서 기다리고 있는데 한 남자가 바삐 들어왔다. 아, 저 사람이군. 그 사람이 맞았다. 우린 서로 한눈에 알아보고 환히 웃으며 서로 인사를 나눴다. 그는 눈가에 굵은 주름을 만들며 웃는 모습이 나이는 좀 들어 보이지만 인상이 좋았다. 한 50은 됐으려나. 그의 좋은 인상과 활달한 말솜씨 덕분에 나는 나의 늙음에 대한 걱정은 내려놓고 열심히 일 얘기를 했다. 개인사도 얘기했다. 그 사람은 이년 전에 첫딸을 낳았다고 했다. 아니, 그러면... 

"실례지만 연세가 지금 어떻게 되세요? 결혼을 늦게 하셨나 봐요."

"예. 지금 제가 마흔둘이에요."

그러면서 그는 한 손을 얼굴로 가져가 익살스럽게 엄지와 중지로 눈가 주름을 펴면서 말했다.

"제가 나이가 좀 많습니다. 하하하."

문득 알게 됐다. 그도 자신의 늙은 모습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 때문에 나의 늙음에 대해서는 거슬릴 새가 없었던 것 같다. 나는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도 조금은 염려가 남아서 한 마디 했다.

"어머, 우리 디자이너들이 전부 40 안팎인데 팀장님 하고는 잘 통하겠네요."


다섯째, 공부 열심히 하자.


회사는 일인 회사이므로 혼자 다 해야 한다. 수입이 적으니 회계 처리를 세무사 사무실에 맡길 수 없다. 이 기회에 엑셀의 함수 활용법을 완전히 떼자. USB에 담아 판매하는 공부 파일을 하나 샀다. 제안서도 내가 직접 만들어야 하니 PPT도 새로운 앱들을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연습하자. 흠, 연습 삼아 96세 엄마의 일생을 피피티로 만들어보자.


여섯째, 영업은... 그냥 흐름에 맡기자. 


얼마 전 정장을 하고 밖에 나가려니 구두가 너무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백화점에 들렀다. 내가 좋아하는 브랜드로 가서 구두 몇 개를 골라 점원에게 세일가를 물었다. 세일인데도 한 켤레에 20만 원에 육박했다. 나는 고민을 하다가 어차피 사야 할 것 같아서 정가가 제일 싼 구두를 들고 다시 세일가를 물었다. 그녀는 지치고 안타깝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여긴 다 마찬가지예요. 그 제품도 15만 원이 넘어요."

나는 기분이 상했다. 점원의 속마음이 읽혔다.

'여기서 당신이 살 수 있는 물건은 없네요. 시장에 가 보세요.'

나는 그 집을 떠나 옆집으로 갔다. 그 집 점원은 60대로 보이는 남자였다. 나는 구두를 한 켤레씩 골라 신어 보면서 하나하나 가격을 물었다. 그리고 그중 제일 마음에 드는 구두를 17만 원 세일가에 구입했다.


영업에 있어 지레짐작은 금물이다. 편안한 마음으로 끝까지 노력하는 게 최선이다. 또한 매출 목표에 너무 연연하지도 말자. 


마지막으로 일곱째, 일하는 걸 즐거워 하자.


한 친구는 나보고 일 중독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지만 사실은 나도 진정 한가롭고 싶다. 한가롭게 산책할 시간과 한가롭게 책을 읽을 시간, 한가롭게 차를 몰고 여행 다닐 시간이 참 그립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수시로 일하기가 싫어지곤 한다. 지난달에는 일하기 싫어서 일주일간 넷플릭스를 끼고 살았다. 그중 중국드라마인 '장야' 1부가 재미있었는데, 주인공이 건들건들 걷는 모습을 요즘도 문득문득 떠올리며 나도 건들건들 걸어보곤 한다. 그때마다 또 다른 드라마에 빠져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탕진하고 싶은 욕구에 시달린다.


냉정하게 현실로 돌아오자. 어차피 일을 해야 일상생활을 꾸려갈 수 있다. 그렇다면 즐기자. 나이로 볼 때, 체력으로나 정신력으로 볼 때, 지금이 내가 일을 즐길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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