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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39, 2부 0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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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다흔넷 Oct 30. 2022

300 파운드

9 said

    아홉수. 대체 그게 무엇이길래 Y를, 나를, 우리를 이 곳으로 데려온 것일까. 여행을 시작한지도 벌써 21일이란 시간이 지났다. 체코를 시작으로 오스트리아, 이탈리아를 거쳐 오늘 아침 네번째 나라인 스페인에 당도할 때까지 나의 이 탐탁치 않은 질문 - 더 솔직히 말하자면 ‘아홉수’에 관한 맹목에 가까운 Y의 불안과 이를 여행으로 이겨내 보겠다는 그의 순진무구한 믿음을 향한 나의 의심과 타박 - 은 여행 내내 계속 되었다. 하기사 이제와 이런 질문을 하면 무엇하며, 그 답을 안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여행 3주차인 지금 나는 한때 전 세계적 패권을 장악했던 위대한 Imperio Español. 스페인에 와 있다.



스페인은 Y와 내가 여행 계획을 짤때부터 꼭 가야 할 나라였다. 나의 버킷 리스트 중 하나인 ‘순례자의 길’을 품은 나라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영어가 아닌 자국의 언어를 가진 나라, 따로 시간을 내어 배우지 않으면 도저히 알아 들을 수도, 말을 할 수도 없는 언어를 가진 나라를 여행한다는 것, 그것은 때로 여행자들의 귀를 멀게 하기도 입을 다물게 하기도 한다. 그런 낯선 경험은 가뜩이나 의존적이 될 수 밖에 없는 여행자들에게 굴욕적이고 서럽기까지한 고립 상태를 맛보게 해준다. 하지만 이런 얄미운 고립의 시간은 때론 진짜 여행의 순간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나는 그걸 느껴 보고 싶었다. 질척거리는 모든 것에서 벗어나 온전히 혼자 있고 싶지만 완전히 혼자가 되고  싶진 않은 그런 마음. 왠지 스페인은 그걸 느끼게 해 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선택한 스페인에서 뜻밖에도 그 순간은 어이 없게 찾아왔다. 바르셀로나 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영어처럼 보이지만 도저히 읽을 수 없는 간판들과 도저히 알아 들을 수 없는 사람들의 말 소리가 Y와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고, 이런 긴장감은 본능적으로 생존의 위협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그보다 난 4kg이 넘는 오래된 노트북이 들어간 배낭 때문에 어깨가 빠지기 일보 직전이었고, 생존의 위협이고 나발이고 일단 내 어깨부터 살려야겠다 싶은 마음에 캐리어를 받자 마자 그 자리에서 캐리어를 활짝 열어 노트북이 들어갈 자리를 살폈다. 대충 넣어도 되지 않나 싶겠지만 나에겐 소매치기의 위협보다 불안정한 자세로 캐리어 안에 들어가 있을 노트북이 더 불안하고 안쓰럽게 느껴진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캐리어 속 노트북을 위한 최상의 자리를 찾아야 했다. 이리 저리 옷가지들과 신발들을 꺼내고 넣기를 반복한 끝에 마침내 각이 딱 떨어지는 자리가 나왔고, 이 안정적으로 빛이 나는 빈 공간 사이로 살포시 노트북을 내려 놓았다. - 지금 생각해도 통쾌하고 거룩한 순간이다. 하하하 - 기분 좋게 캐리어를 닫고, 조금 부산스럽긴 했어도 숙소까지 안정적인 자세로 들어가 있을 노트북을 생각하니 어깨와 마음 모두 한결 편안해진 나는 그제서야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Y의 무거운 침묵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만족하냐는 듯한 그 눈빛도 함께...



안 그래도 미리 예약된 숙소를 찾아 가야 하는 미션 앞에 Y의 말투는 점점 예민해졌고, 그 뽀족한 Y의 말 끝에서 나의 입은 점점 닫혀져갔다. 그렇게 우린 숙소에 도착할 때까지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이 묵언의 시간은 함께 있는 우리를 스스로 고립된 상태로 만들었고, 하필 비까지 내렸던 탓에 처음 도착한 이 낯선 나라, 이 낯선 언어, 이 낯선 방이 싫었다. 무슨 말이든 말이 하고 싶었고 무슨 말이든 한국 말이 듣고 싶었다. 서럽고도 고독했던 그날 밤 Y는 주섬 주섬 혼자만의 의식을 치르듯 무언가를 했고, 그런 Y의 행동이 궁금하긴 했지만 우린 암묵적으로 싸운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 것도 묻지 않았다.




    다음날 아침,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Y는 평소처럼 아침 식사를 차렸다. 흥얼거리기 까지 하며 차린 아침 식사는 - 어색했지만 - 그만의 화해 방식임을 잘 알기에 Y의 밥 한끼로 우리의 선택적 고립 기간은 고작 하루만에 끝이 났다. 이리 쉽게 풀려 버릴 침묵이 어제의 우리에겐 왜 그리 어렵게 꼬여있었던걸까. 날씨는 또 어쩐지 어제와 너무도 달랐다. 하루 종일 으슬으슬 유쾌하지 않게 내리던 비는 강렬한 스페인의 햇살로 변해 제법 덥기까지 했고, 낯설고 불편해 보이던 어제의 숙소도 오늘은 어딘가 친숙하게 느껴졌다. 어제와 달라진건 분명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 때문에 이리도 완벽히 달리 보이는 것일까. 똑같아 보이는 일상도 하루하루 달라져 보이게 만드는 것, 그것이 여행일지도 모르겠다.



    첫 날 이후 스페인에서 보낸 일주일은 매일의 좋았던 날씨만큼 모든 것이 완전했다. 첫 날 이후 Y와 나는 단 한번도 싸우지 않았고 - 오히려 내내 무척이나 다정했고 - 낯선 스페인어에 더 이상 긴장하지 않게 되었으며, 매일 아침 바르셀로나 구석 구석을 돌아다니기 위해 신나게 집을 나섰다. Y와 난 조금씩 여유를 찾아갔다. 도시 곳곳 Gaudi의 신비한 건축물들을 보러 다니고, 현지인에게 직접 소개 받은 맛집을 찾아가 제대로 된 진짜 스페인 음식도 먹어 보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스페인 국민 브랜드 ZARA 매장을 돌며 흥과 쾌락의 나라에서 과소비의 쾌락을 즐겼다. 지난 3주간 캐리어 속 한정된 옷만 돌려 입다가 오랜만에 새 옷을 사입으니 다시금 새로 여행을 시작하는 기분이었다. 어느 날은 운 좋게 발견한 작은 마을에서 신기한 페스티벌을 구경하기도 하고, 또 어느 날은 우연히 발견한 소소한 카페에 마음이 빼앗겨 하루 종일 앉아 있기도 했다. 열정적인 스페인의 태양이 좋았고, 활기찬 스페인 사람들의 기운이 좋았다. 스페인의 매일 매일이 우리에겐 긴 여행 중 맞이한 시에스타였고, 스페인의 하루 하루는 여름 날 마시는 달콤 시원한 상그리아 한 모금이었다. 그래서 였을까. 마지막 날은 이 전의 나라들보다 많이 아쉽고 섭섭했다. Y와 나는 언제 또 볼지 모를 바르셀로나의 찬란한 야경을 바라 보며 다음 여정을 위한 또 다시 짐을 챙겼다. Adiós 스페인.




    지금도 여전히 궁금하다. 도대체 스페인에서의 첫날 우린 왜 그랬던걸까. 도대체 내내 좋기만 하던 날씨는 왜 하필 떠나는 날 아침, 마치 우리의 발길을 잡기라도 하듯 안타까운 비가 내렸던 걸까. 사실 여행 중 마주하는 비는 크던 작던 예쁘던 여행자들에게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피로 충분 요소다. 빗 속을 뚫고 한 손에는 우산을 혹은 우비를 입었다 한들 25kg이 넘는 캐리어를 끌고 다니다 보면 괜히 마음까지 무거워져 평소보다 9배는 더 피곤해 진다. 그 무거운 고됨은 다섯번째 나라인 프랑스에 도착해서까지도 이어졌다. 바르셀로나에서 조용히 내리던 아침 비는 파리에선 더욱 세차게 내리는 저녁 비가 되었고, 게다가 2시간이나 일찍 도착한 파리는 하필 퇴근 시간이었다. 젠장.. 지치고 피곤한 하루의 일상을 끝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파리지앵들에게 우리는 맘껏 짜증을 부려도, 대놓고 욕을 해도 괜찮을 좋은 먹거리였다. 스페인의 태양만큼이나 강렬하게 쏘아대는 눈총들을 받아가며 축축히 젖은 옷에 몸의 반만한 캐리어를 들고 꽉 찬 퇴근길 트램에 낑겨 올라 타던 순간 Y가 말했다.


     나 스페인에 뭐 두고 온 거 같아.


    여행을 하면 할수록 이번 여행의 이유이자 나의 질문의 시작이던 ‘아홉수의 존재감’을 그다지 유쾌하진 않지만 점점 더 의식하게 되는 나를 알아차린다. 이 참을 수 없는 존재감을 어찌 해야 할까. 스페인에 도착한 첫 날 Y는 자신의 날카로웠던 말투로 본의 아니게 상처를 입힌 나에게 미안했을 것이고, 의도와 상관없이 자꾸만 예민해지는 자신에게서 자괴감이 들었을 것이며, 기대했던 숙소는 생각보다 비좁아 불편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날 밤 20 여 일 동안 캐리어 깊숙이 숨겨 놓은, 70일 뒤에나 도착할 영국에서 쓰려고 미리 바꿔 둔 300파운드가 담긴 돈 봉투를 그 집 침대 매트리스 밑에 넣어 두었겠지. 자그마치 우리 돈 50만원, 총 여행 경비의 5%에 해당하는 그 돈을 일주일이나 지낼 곳이니 그 편이 훨씬 안전할 것이라는 사회적 믿음으로, 그날 하루 자신에게 일어난 모든 액운을 물리쳐 줄 액땜의 부적이라는 개인적 믿음으로... 그렇게 믿었었겠지.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넘어온 이 곳 파리에서, 꼼짝 달싹 못하게 끼어 탄 퇴근길 트램 안에서 Y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따가운 눈총을 피해 지난 일주일을 복기 하는 것이었고, 그 순간 Y는 불과 3시간 전까지 우리가 있었던 바르셀로나에 두고 온 300파운드가 그제서야 생각이 났던 것이다.



정말이지 갑자기 찾아온 스페인에서의 행복했던 일주일이 설마 Y가 침대 밑에 넣어둔 300파운드 때문이었을까. 마냥 미신이라 무시하기엔 믿겨지지 않을 만큼 모든 것이 좋았던 그 날들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Y는 생각보다 쿨하게 300파운드의 부재를 털어 냈고 - 아니 털어낸 척 해야 했고 - 그 일은 Y에게 ‘역시 모든 건 아홉수 때문’의 절대적 당위가 되었으며, 남은 여행의 의미를 더욱 단단히 더욱더 맹목적으로 집착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만약 그 300파운드를 프랑스까지 잘 들고 왔었더라도 이 또한 본인이 믿는 믿음 - 내가 보기엔 그저 샤머니즘- 대한 합리적 대처이자 소망 -내가 보기엔 그저 미신- 을 보다 더 확신 -내가 보기엔 그저 맹신- 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겠지. Y가 잃어버린 300파운드는 어쩌면 여행 내내 나를 쫓아 다니던 질문에 대한 답이었을지 모른다. 그래 뭐 어차피 내 돈도 아니고 덕분에 우린 결국엔 완전했으니까. 



“300파운드, 너는 계획이 다 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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