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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39, 2부 02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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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흔다흔넷 Oct 30. 2022

운수 좋은 날

Y said


   그날 내가 무심결에 했던 작은 날갯짓이 오늘 이렇게 거대한 폭풍이 되어 나를 삼켜버릴 줄은 미처 몰랐다. 나는 그때 왜 그랬을까. 왜 구랬을까.


   그러고 보니 오늘도 시작부터 조짐이 좋았다. 역시나 바르셀로나 공항에서 비행기가 무사히 이륙하고 난 후, 언제나 그랬듯이 나와 9는 마치 의식을 거행하듯 초콜릿을 꺼내어 무언의 눈빛을 교환하며 건배를 한다. 이상하게 여행 중 특히 비행기 이륙 후에 먹는 초콜릿은 더 맛있다. 언젠가 프랑스 여자들은 섹스는 포기해도 초콜릿은 포기 못한다고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역시 뭘 좀 아는 여자들이 우글거리는 프랑스의 파리로 꿈틀거리며 들어간다. 초콜릿 때문인지, 내 몸을 흐르는 혈류 속도가 점차 느려지고, 경동맥을 따라 뇌로 들어가는 피의 양의 줄어들어 점차 희미해지는 의식을 애써 붙잡으려고 … 아니 그냥 잠시 졸았던 것 같다.


   프랑스에는 예정 시간보다 20분 정도 일찍 도착했다. 도대체가 유럽여행 중에 비행기가 딜레이 되었다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았던가? 우리는 벌써 두 번째 예정보다 빨리 도착했다. 거기다가 날씨는 어찌나 적절한지. 역시 파리의 하늘은 살짝 흐려야 더 운치가 있지 않나. 역시나 오늘의 최대 미션은 숙소 찾기이다. 공항을 나서면서 2번이나 환승해야 한다. 비행기-> 버스-> 지하철-> 트램 후와~ 잘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공항 인폼에서 우리가 내려야 할 역을 물어보니 친절하게 버스노선을 알려준다. 편도를 끓고 공항 리무진에 탑승했다. 평균 시간은 1시간이라는데 길도 막히고, 다음 정거장에서 사람들이 버스 안을 다 채울 때까지 기다리는 바람에 2시간은 걸린 것 같다. 아무렴 어떠랴. 난 낭만의 도시 파리에 있는데! 차창 밖으로 에펠탑도 보이고 얼마 후엔 개선문도 보였다. 내가 진짜 파리에 왔구나~ 서울과 비슷한 모습에 왠지 편안한 느낌마저 든다. 우리 역은 종점이었고, 내리자마자 지하철역으로 가서 편도 표를 끊었다. 생각보다 가야 할 정거장 수가 많긴 했지만 파리 지하철은 꽤 쾌적했다. 몇 년 전에 파리를 홀로 여행했던 9의 말로는 지하철이 아예 신식으로 바뀌었고 없던 안전문도 생겼다고 했다. 역시! 아무래도 내가 오는 것을 미리 알고 정비를 해둔 것 같다. 역시! 라데팡스 역에서 트램을 갈아탈 때 약간 우왕좌왕하긴 했지만 역시 잘 탔다.


트램이 출발하고 점점 빠르게 지나가는 풍경들과 함께 문득 어떤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나의 간담도 서늘해졌다. 아마도 사람의 감정 상태를 투시해서 고유의 색으로 찍을 수 있는 카메라가 있다면, 그날 그 순간의 나를 온통 새파랗게, 하지만 머리만 새하얗게 찍어냈을 것이었다. 정신을 차리기 위해서 머리를 세차게 흔들며 두 손으로 양볼을 몇 대 쳤다. 불현듯 정확히 일주일 전 스페인에 도착하던 날, 억세게 운이 좋았던 그날이 떠올랐다.


  

   드디어 로마를 떠났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안정권에 들자마자 9와 함께 로마 공항에서 사 온 초콜릿을 먹었다. 기분이 좋아진다. 왠지 시작부터 조짐이 좋다. 9는 참 잘도 잔다. 평상시엔 앙다물고 예민함을 폴폴 풍기는데, 어쩔 땐 저렇게 무방비 상태로 잘도 잔다.  심지어 비행기가 착륙할 때 그렇게 덜컹거렸는데도 참 잘도 잔다. 그 어떤 이동수단에서도 숙면을 취할 수 없는 나로서는 참 부러운 능력이 아닐 수 없다. 9를 흔들어 깨운다. 9는 아직도 꿈속 너머 어딘가에 있는 듯 동공이 풀린 채로 벌써 도착했냐고 내게 묻는다.


주섬주섬 짐을 챙겨서 비행기 밖으로 슬렁슬렁 나온다. 요즘은 안 하는 건지 유럽이라 안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출입국심사 자체가 없다. 로마에서 나올 때도, 스페인에 들어갈 때도. 절차가 간단해서 좋긴 한데 여권에 도장이 추가되는 소소한 기쁨이 사라져서 아쉽기도 하다. 수화물을 찾을 때까지 엄청 많이 걸어야 했다. 설상가상으로 가는 도중에 바르셀로나를 증명하는 사인이 1도 안 보여서 진짜 빠세로나 인지 의심이 들기도 했다. 가는 내내 ‘짐이 잘 도착해야 할 텐데.’라고 생각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사람들이 하도 짐에 손을 많이 대고 분실률도 높아서 걱정했는데 다행히 우리 캐리어가 일착으로 나왔다. 역시! 오늘은 운이 좋다.


짐을 찾은 후 9는 어깨가 뽀사질 것 같다면서 배낭에 있던 노트북을 캐리어로 옮기고 싶다고 했다. 우선 사람이 없는 구석을 찾았고, 그곳에서 9는 자신의 캐리어를 활짝 열어젖혔다. 그 사이 나는 9에게 어떤 종용도 없이 그녀만의 시간을 벌어주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몸으로 막아주고 있었다. 뒤에서는 컨베이어 벨트가 하릴없이  돌면서 일정한 소음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소음은 마치 백색소음과 같이 내 귓가에 맴돌면서 나의 집중력을 한껏 끌어올려 주었다. 당연히 나의 눈은 오롯이  9와 그녀가 하는 행동에 고도로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 그녀는 열어젖힌 캐리어 내부에서 발견할 수 있는 여러 각도와 직사각형 노트북이 만들어 낼 황금비율을 계산하면서 요리조리 눈알을 굴리고 있었다. 다행히 일찍 도착해서 여유가 많았던 터라 9를 재촉하진 않았지만, 스멀스멀 단전에서부터 무언가 기어 올라오는 것을 애써  억누르고 있는 나를 느낀다. 그 어느 순간에서도 ‘각’과 그 각이 만들어낼 ‘아름다움’에 열중하는 9를 보고 있노라면, 가끔은 경외심이 들기도 한다. 9는 드디어 그녀만의 계산을 마쳤는지 조심스레 노트북을 캐리어에 놓고, 그 각이 흐트러 질세라 또 더 심혈을 기울이면서 캐리어를 닫았다. 세상 모든 것엔 반드시 처음과 끝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드디어 다 끝났나 보다. 이제 9는 만족스럽게 씨익 웃는다.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 에어비앤비 호스트인 존이 문자로 잘 도착했는지 물어본다. 존은 참 친절하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빨리 존네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존에게 도착 예정 시간을 적은 문자를 날리고 일단 버스를 탔다. 왕복 10.2유로이다. 차창 밖 하늘은 시커멓고 곧 비가 쏟아져 내릴 기세다. 한 25분 갔으려나. 에스파냐 광장 역에 내려서 캐리어를 끌고 걸어간다. 스페인에는 소매치기가 극성이라 하여 시야에 들어오는 모든 사람들을 예의 주시하며 간다. 그런데 우려와는 달리 그들은 우리에게 별 관심이 없어 보인다. 잘 생긴 남자들이 많구만. 관심을 가져주지 않아 오히려 살짝 아쉬운 마음이 들 정도의 생김생김. 역시! 오늘은 운이 좋다.

혹시 몰라서 우산을 준비하긴 했지만, 다행히 숙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비가 세차게 내리진 않았다. 역시! 오늘은 운이 좋다.


존네 집을 찾기는 어렵지 않았다. 우리에겐 구글신이 있으니까. 거기다가 우리에겐 구글신이 특별히 어여삐 여기사 마치 인간으로 현현하신 듯 그 능력을 고스란히 전해받은 네비의 신 9도 있으니까. 존은 키도 크고 스페인스럽게(?) 생겼으며, 사교성이 좋았다. 하지만 영어 발음은 너무 스페인스러워서 문자에서만큼 소통을 원활하게 할 순 없었다. 그래도 알아듣기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존의 집은 4층이었지만, 엘리베이터가 있으니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에어비앤비 소개글에서 존이 그렇게 자랑하던 엘리베이터가 보였다. 존이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누르고 이내 문이 열렸다. 9와 내가 자연스럽게 캐리어를 들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순간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우와 난 살다 살다 이렇게 작고 괴랄한 모양의 엘리베이터는 처음이었다. 엘리베이터의 내부 공간이 정삼각형도 아닌 찌그러진 둔각 삼각형 모양으로 생긴 것도 이상했고, 진짜 두 명 들어가면 꽉 차는 소름 끼치게 작은 공간이었다. 9와 나처럼 건장한 여자 둘이 들어간다면 어깨를 한 뼘 정도는 포개어야 겨우 들어갈 수 있을 정도였다. 당연히 대형 캐리어 둘과 건장한 인간 3명을 동시에 운반하기엔 한없이 가엾고 하찮아 보이는 엘리베이터였다. 9와 나는 존에게 짐짓 태연한 척하며 애써 영혼을 빼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없는 것보다는 겨우 나을, 정말 딱 그 정도의 수식어만 허용 가능할 엘리베이터였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의 숙소인 4층까지 짐과 인간들을 올리기 위해서 가장 합리적인 방법을 모색해야 했다. 존과 캐리어 한번, 9와 캐리어 한 번을 다시 움직인다. 그리고 난 씩씩하게 걸어 올라간다. 존네 존내 작은 엘베에 낚였음을 인정하고 싶지 않았기에 더 씩씩하게 뛰어 올라간다.


존은 집안 곳곳을 엄청 자세하게 하나하나 다 설명해 주었고, 물어보는 것들도 잘 알려주었다. 존네 집은 사진과 거의 흡사해 보였지만 무언가 달랐다. 그러니깐 음 딱히 다르다고 말할 건 없는데 확실히 사진에서 더 좋아 보이긴 했다. 아무렴 어떠랴. 난 드디어 꿈에 그리던 가우디의 도시 스페인의 바르셀로나에 도착했고, 사진보단 좀 구리지만 꽤 흡족한 공간에 있지 않은가!


줄곧 언제 내릴까 우리의 눈치를 보던 비는 드디어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그래도 한 시간이나 일찍 체크인해서 저 비를 안 맞았다고 생각하니, 역시! 오늘은 운이 좋다. 얼추 짐을 풀고 배가 고파서 돌아다니다가 케이터링 가게를 발견했다. 뷔페식으로 이런저런 음식을 고르고 계산하는 시스템이었다. 몇몇 메뉴는 1인분씩 계산하고 또 다른 메뉴들은 그램당으로 계산했다. 우리는 스페인 입성을 기념하기 위해 스웩 넘쳐 보이는 와인도 하나 샀다. 좀 많이 샀나 싶었는데 생각보다 금액은 덜 나와서 깜놀했다. 역시 스페인이다. 집에 와서 옴마나 하나도 안 남기고 다 먹고 마셔 버렸다. 행복하다. 역시! 오늘은 완벽하다!!! 하하하.



   바르셀로나의 숙소에 처음 도착한 날, 억세게 운이 좋았던 그날, 나는 기쁨에 취해 얼추 짐을 정리하면서 나중에 영국에서 쓰려고 미리 환전해 온 300파운드를 잘 숨겨둔다고 굳이 매트리스를 낑낑대며 들어 밑에 넣어 두었었다. 아무도 모르게 해야 안전할 거라고 생각한 나머지, 9에게도 비밀로 했다. 그러고는 스페인에서 머물렀던 일주일 내내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그냥 놔두고 온 것이다!!! ㅠㅠ 왜 그랬을까, 왜 구랬을까.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9가 괜찮냐고 묻는다. 그저 나는 9에게 별일 아니라는 듯, “나 스페인에 뭐 두고 온 것 같아.”라고 들릴 듯 말 듯 모기만 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고맙게도 한 번에 한 가지만 할 수 있는 9의 단일 집중적인 특성 덕분에, 9는 숙소 찾기에 열중하느라, 크게 괘념치 않는 듯했다. 나는 하나도 안 괜찮았지만, 아닌 척했다. 머리가 점점 하얘지다 못해 투명해질 것 같았지만 그래도 일단 숙소를 찾아야 했다. 그저 한시바삐 생각을 정리할 안락한 장소가 필요했다. 나는 영혼을 겨우 끌어모아 숙소 찾기에 열중했고, 역시  9의 능력 덕분에 우리는 생각보다 금방 숙소에 닿을 수 있었다. 아주 다행이다. 다행이어야 했다.


젊은 남자 사장이 한인 민박을 혼자 운영하고 있었는데, 우리가 원래 예약했던 트윈룸이 없다고 욕실이 딸린 가족룸으로 업그레이드해 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대충 짐을 던져놓고 존에게 일단 메시지를 보내본다. 돈을 놔두고 왔다 하니 벌써 다른 게스트들이 묵고 있고 일주일 후에나 나간단다. 그쪽 허락 없인 들어갈 수 없고 손님들에게 말한다면 그들이 가질 수도 있으니, 일주일을 희망으로 살던가 지금 그들에게 말하던가 선택하라고 했다. 나는 그들이 가져가진 않을 것 같지만 존한테 미안하고 또 두고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고 기다리겠다고 했다. 존은 더 못 도와줘서 미안하다고도 했다. 나중에 다시 바르셀로나에 오냐고 해서 못 간다고 했고, 돈 받는 방법은 더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돈이 나에게로 다시 올까? 나는 도대체 그날 왜 그랬던 것일까? 뭐에 홀린 듯 여행 중 단 한 번도 매트리스 밑에 돈을 넣어둘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는데, 왜 나는 그날 그렇게 마치 뭐에 홀린 듯 그랬던 것일까? 억세게 운수가 좋았던 그날의 모든 이벤트들은 이 비극의 아이러니한 전조였던 것일까. 아니면 액땜이라고 해야 하나. 샤머니즘적 믿음으로 촉발되었던 아홉수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한 나와 9의 여행은 결국 샤머니즘적 믿음으로 수렴되는 갖가지 이벤트들로 점철되어야 하는 것일까. 모든 속박과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어 택했던 상징적인 ‘아홉수의 소멸’ 안에서 결국 나조차 소멸되는 것은 아닐까. 너무 배가 고파도 갓 삶은 감자는 식기를 기다려야 한다. 그래야 화를 피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 아무리 궁금해도 그때를 기다려야 한다. 무수히 많은 의문들은 결국 피할 수 없으니까.



   그땐 미처 몰랐지만, 문득 몇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노라니, 나는 존네 존내 작은 엘베에게서 뿐만 아니라 존내 존스러운 존에게서도 농락당했던 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을 지울 수가 없다. 결국 나는 끝내 그 돈을 찾을 순 없었다. 300파운드의 미스터리. 애써 쿨하게 놓아줄 때까지 내 맘을 시리게 했던 300파운드. 여행이 끝나고도 한참 지난 지금 생각해 봐도 도무지 알 수가 없는 일이다. 그날 나는 왜 그랬을까. 왜 구랬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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