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나를 미워했다.
나를 미워했다
나를 증오했다.
밥먹고 커피를 마시는 내가 역겹기 까지 했다.
모두 내탓이 아니라 하였지만 ,
모두 내탓이였다.
뱃속에서 건강했던 아이가 태어나기 일주일전
태동이없어 찾아간 병원에서
나는 응급제왕절개를 했고
그렇게 갑자기 아픈아이와 마주하게 되었다.
아이가 뱃속에서 태변을 먹었고
기도를 막아 뇌손상이 왔다.
의사는 뇌가 거의 다 녹아서 남아있는 뇌가 거의 없다고 했다. 평생 누워서 지내게 될거라고 , 99프로 중증 장애인으로 살게 될거라 했다.
미역국을 먹으며 몸조리를 하는 내가 혐오스러웠다. 아이를 아프게 낳고 무슨자격으로 내입에 먹을걸 넣고 있는걸까. 나는 나를 죽이고 싶었다.
그렇게 아파트 난간에서 떨어져야하나 수백번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때문에 죽을 수 없었다.
내가 없음 안되는 갓난쟁이를 두고 차마 그럴수 없었다.
“ 장애를 가진채 이 아이가 과연 행복할수 있을까
분명 불행할꺼야“ 라며 장담하고 아이와 함께 뛰어내릴까도 생각했다. 그땐 나도 내가 무서웠다.
온갖 생각으로 나를 괴롭히고 망치고 있던때
나보다 먼저 아픈아이를 키워온
어떤 엄마의 말 한마디가 나를 살렸다
“ 일단 버텨요, 하루를 살지말고 버텨요”
그랬다 … 그땐 그것이 최선이였다.
아이가 니큐에서 2달 입원 후 집으로 돌아오니,
나는 간병인 간호사 의료인이 되어야만했다.
첫아이를 키우는 설렘은 사치였다.
처음 만져보는 석션기, 주사기, 수액줄과 같은 여러 의료용품을 다루어야만 했다.
강직과 경기로 밤에 한시간도 못자는 아이와 씨름하며이렇게 평생 살아야 한다는 두려움은 나를 압도하고 집어 삼켰다. 그때의 삶은 하루 하루를 사는것이 아니라 , 그저 아픈배를 움켜쥐고 웅크린채 버티는 것과 같은 것이였다.
그땐 몰랐지만 그게 정답이였다.
이제와 생각해보니 그렇게 버티는것 또한 능력이였다.
고통을 꼭 이겨내야만 잘하는것이 아니라,
잘 버텨냈던것 또한 칭찬 받을 일이였다.
버티다 보니 조금씩 살아가지기 시작했다.
봄에 피는 꽃잎의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했고
나무와 따뜻한 햇살의 묵묵한 위로를 받을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다.
답장을 하지 못한채 몇개월 쌓여만있던
수십통의 지인들의 문자에
늦게나마 답장을 할수 있게 되었고
그들이 내민 손은 잡고 나는 조금씩 일어나 삶을 살아가게 되었다.
그렇게 하루살이로 버티기만 했던 내가 삶을 온전히 즐기며 살수 있게 된것이다.
인생이 나에게 남긴 상처는 나를 성장시켜줬다
진정한 사랑을 알게 되었고
인생을 알게 되었으며
시련이 있는 생의 한가운데서
아주 이따금 느끼는 행복감이지만
그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인지를
몸으로 마음으로 느낄수 있었다.
장애아이를 낳았다고 인생이 망했다고 생각한것은 내착각이였다.
다수의 사람들과 아주 많이 다른 모습의 삶이지만
그래서 삶은 더욱 슬프지만 아름다운
한편의 소소한 영화같은것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