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레톤 Feb 17. 2024

사랑이라는 단어 없이 사랑을 말하기

투명함에 대하여

열 살 무렵 학교에서 무엇을 배웠는지는 조금도 기억나지 않지만, 단원평가에서 틀렸던 문제는 아주 정확하게 기억한다. 친구와 싸웠을 때 취해야 할 행동은 무엇인가. 너무도 쉬워서 주관식으로도 풀 수 있을 법한 문제를 나는 당당하게도 틀려왔다. 그때 사지선다에서 골라낸 답은, '굳이 화해할 필요 없이 다른 친구랑 놀기'.


말도 안 되는 오답을 적어낸 주제에 왜 틀렸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며 불평하는 나를 보고 엄마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람에게 미련이 없는 걸 넘어서 소중함을 몰라보는 딸내미가 진지하게 걱정됐을까. 아니면 아직 어려서 그러겠거니 하고 그저 웃었을까. 확실한 건 지금의 엄마는 웃는다. 네가 그랬지, 하고 한없이 재밌다는 듯이 해맑게.


선천적으로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면 그건 하나의 결핍일까?


꽤 오랫동안 나에게 인간관계란, 다들 필요로 하니 나에게도 필요할 것이라고 믿는 그런 종류의 것이었다. 같이 있으면 재밌고 없어도 크게 아쉽지 않은.


그 생각에 균열을 내는 데에는 단 한 명의 반례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러니까 그 애를 가장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내가 처음으로 좋아했던 타인. 그 애는 여러모로 나와 성향이 반대였다. 운동을 아주 잘했고, 늘 햇볕 아래를 뛰어다니면서도 피부가 투명하리만치 하얬다. 그 말간 얼굴 위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가 늘 너무 쉽게 드러났다.


그런 솔직함 때문인지 그 애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찾아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나와는 다르게 꾸밈없이 편안하게 사랑받는 사람. 그게 그 애의 첫인상이었다.


특별한 접점이 없었는데도 그 애는 어느 날부터 먼저 인사를 건넸고, 먹을 걸 사다 줬고, 나와 마주치기 위한 수많은 우연을 티가 나도록 허술하게 만들어냈다.


처음에는 분명 웃어넘겼는데. 한 번 틀어지면 돌아보지 않을 사람으로 넘겨버릴 수 있었는데. 아무 날도 아니었던 어느 날에, 그 애가 친구들 사이에서 왁자지껄 웃다가 나를 돌아봤을 때, 나는 그 애에게서 처음 보는 표정을 발견했다. 잠시 멈칫했다가 하얀 얼굴 위로 약간의 혈색이 번졌고, 이내 물이 흐르듯이 웃으며 손을 살짝 들어 보였다. 그때가 아마 나의 시작이었을 것이다.


무언가 시작되어 버린 감정은 설레기보다는 두려웠다. 나는 친구도 가족도, 아니, 나조차도 그렇게까지 좋았던 적이 한 번도 없어서.


내가 문제집을 풀고 있으면 그 애는 조용히 두 칸쯤 떨어져 앉아 어느 날에는 간식을 두고 갔고 어느 날에는 쪽지를 쓰고 갔다. 나는 늘 그 애가 시야에서 사라진 뒤에야 얼굴을 손으로 반쯤 가리고 큰일 났다는 생각을 되뇌었던 것 같다.


그 애가 어느 여름날에 담벼락 아래를 걷다가 지나가듯 해준 말은 이랬다.


우리 엄마가 너 엄청 좋아해.
평소에 하도 네 얘기 많이 했더니.


그 말을 마치고 그 애는 바람 빠진 풍선처럼 민망하다는 듯이 웃었다. 뭐든지 숨기는데 능숙했던 나는 태연한 표정을 지었지만 머릿속으로 수많은 물음표들을 떠올렸다. 너야 워낙 살가운 성격이니까 어머님이랑 도란도란 대화하는 장면을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은데, 무슨 이야기를 했길래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을 좋아하게 만들었을까.


나는 그 애 이야기를 엄마에게 꺼내본 적이 없다. 친구에게 조차 털어놓은 적이 드물었다. 그냥, 도저히 뭐라고 말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진심이 되어버린 감정들은 저마다의 무게를 가졌고 결코 가볍지 않아서 입 밖으로 꺼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 애만큼은 아니지만 사람을 좀 더 아끼고 좋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그 애에게서 배운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도 조금이나마 전할 수 있게 되었을 때, 언젠가 엄마와 대화를 한 적이 있다. 특정한 누군가에 대해 이야기하려던 건 아니었고, 최근 일상을 풀어놓았을 뿐인데 유독 한 사람이 자주 등장했다. 그를 좋아한다는 말은 고사하고 비슷한 뉘앙스의 어떤 표현도 꺼내지 않았다. 그럼에도 엄마는 가만히 듣다가 짧은 한 마디를 읊조리며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사람이 참 귀엽네.


그때 퍼뜩 깨달았다. 사랑이라는 단어를 단 한 마디도 넣지 않아도 사랑을 표현할 수 있구나. 그리고 사랑이라는 단어를 한 마디도 듣지 않아도 알아챌 수 있구나.


박서련 작가의 '더 셜리 클럽'을 읽다 보면 사랑에 빠졌을 때 어떤 사람은 노래를 부르고 어떤 사람은 그림을 그리고 어떤 사람은 요리를 한다는 문장이 나온다. 나는 무언가를 계속 썼던 것 같다. 일기도 편지도 에세이도 모두 그 애 때문에 썼다. 내가 무언가를 기억하고 싶다고 느낀 건 그 애의 웃는 얼굴이 시작이었으니까.


그 애는 내 손끝에서 나온 가장 긴 편지들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한 번도 그 애에게 좋아한다고 직접적으로 말해본 적은 없었다. 그저 오글거림을 참아가며 최대한 주절주절 구체적인 감정을 적었다. 투명해지기 위한 내 나름의 노력이었는데 그걸 좋아한다는 세 글자로 간추리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이 글은 그 편지들의 마지막 장에 덧붙이고 싶은 추신이다. 사랑이라는 단어에는 실체가 없어서 사실 나는 아직도 헷갈린다. 내가 너에게 느꼈던 감정들을 사랑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


그래서 그 감정에 나는 그냥 네 이름 세 글자를 붙일래. 그게 도대체 어떤 감정이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이렇게 대답할게.


이 관계에 아픔의 총량이 있다면 무조건 내가 더 아파야겠다, 싶은 마음.


나는 이제 네가 그립지 않고 많은 것들이 흐릿해졌지만 이 마음은 오랫동안 가라앉아 있을 거라고, 그 한 마디를 아주 늦게서야 보내주고 싶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새벽 산책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