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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톤 Jul 30. 2023

시선의 끝에 걸리는 건

시작과 끝, 그리고 방향

11월에 열린 체육대회는 당연하게도 추웠다. 같이 경기를 보던 친구가 선수로 출전해야 한다며 덜덜 떠는 내 위에 자신의 패딩을 얹어주고 갔다. 바닥에 대충 펴 둔 두꺼운 종이 박스 위에 앉아 운동장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많이 몰려 있어도 눈으로 친구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카메라를 확대해서 친구의 모습을 몇 번 찍은 뒤 경기가 시작할 때까지 멍하니 기다렸다. 마침 다른 친구가 옆에 앉아도 되겠냐며 다가왔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패딩이 왜 두 개냐는 물음에 하나는 친구 거라고 짧게 대답하고 가만히 운동장을 응시했다. 그 친구도 같이 운동장을 쳐다보다가 갑자기 내 눈을 바라봤다. 처음에는 모르는 척하다 점점 민망해져서 왜 날 보느냐고 물었다. 친구는 한 지점을 손가락으로 똑바로 가리키며 대답했다.


“쟤구나. 너한테 패딩 주고 간 애.”

“어떻게 알았어? 너랑은 모르는 사이 아닌가.”

“그냥 네 눈 보니까 느껴졌어. 쟤랑 친하고 신경 쓰는구나, 하는 게.”


생텍쥐페리는 사랑이 서로 같은 곳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 친구는 아직도 내 시선의 끝이 아닌 시작점을 바라본다. 내가 뭘 좋아하고 뭘 싫어하는지 놀라울 정도로 금방 알아채는 건 아마도 그런 버릇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 조금 어색했던 자리가 있었다. 익숙한 공간이 아니었고 아는 사람도 없었다. 원래 혼자서도 이곳저곳 돌아다니는 걸 즐기는 성격인데, 그날은 누구라도 같이 올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간절했다. 어색한 감정이 티가 났는지 다행히도 몇몇 사람들이 뻘쭘해하는 나를 꽤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그렇게 다가온 사람 중 유독 기억에 남는 한 명이 있었다. 첫인상은 친절하지만 어딘가 사무적이고 냉랭하다는 정도. 하지만 이내 내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보며 액정이 깨져서 눈이 아프다고 투덜거리는 모습에 긴장이 풀어졌다. 누군가를 새롭게 알게 되면 사람의 분위기를 색깔로 인식하는 편인데, 그때는 옅은 하늘색 위에 진한 물감 몇 방울이 튀는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게 짧은 순간이 지나가고 그 사람과의 대화는 그걸로 끝일 거라고 생각했다.


조금 기운이 나서 준비되어 있던 이런저런 행사들을 구경했다. 생각보다 시끌벅적한 분위기라 입장하자마자 집에 가고 싶어 졌던 것이 무색하게도 꽤 즐거웠고, 마지막으로 예약해 둔 서비스만 이용하고 퇴장하려 했다. 그때 어느덧 내 근처로 와 있던 그 사람이랑 눈이 마주쳤고, 그는 나를 마주 보고 똑바로 걸어왔다.


순간 당황해서 황급히 가던 방향을 꺾어서 한쪽 벽면에 기대어 섰다. 나 왜 피했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는데 그 사람이 내 옆으로 와서 섰다. 내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기에 오래 머물지는 못했지만, 나와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바쁘게 움직이다 틈틈이 다시 내 옆으로 오기를 반복했다. 그 사람은 매번 내 시선의 끝에 걸려 있던 것들에 대해서 물었다. 내가 읽던 글자들이나 내가 넘겨보던 사진과 같이 시덥지 않은 것들. 사실 그날 내가 가장 자주 바라본 건 그 사람이었을 것이다. 어떤 점이 마음에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무의식 중에 내 시선의 방향은 정해져 있었다. 그러다 보면 몇 번은 눈길이 부딪혔고, 내가 살짝 웃자 그는 여지없이 내 옆으로 와서 물었다. 왜 그런 표정으로 웃고 있냐고. 그게 그날의 마지막 질문이 되었다.


첫 번째는 호의. 두 번째는 친절. 세 번째는 관심. 그다음은, 글쎄, 뭐였을까. 내심 그 안에 담긴 감정이 호감이기를 바랐지만 섣불리 기대하고 싶지 않았다. 더 정확히 말하면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봐 두려워서 결국 인사를 남기지 않고 조용히 나왔다. 다시 만나게 될 가능성이 딱히 없는 사람인지라 잠시 망설였지만 끝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는 쪽을 택했다.


눈길, 말 그대로 눈이 걸어가는 길. 지도를 손에 쥐고도 길을 찾지 못하는 지독한 길치인 나는 감정에 있어서도 방향 감각이 엉망이다. 시선은 그 무엇보다 솔직하지만 그만큼 불분명하다. 그래서인지 그물처럼 엉켜있는 눈의 경로를 따라가다 보면, 그물의 끝에 도착하고서도 자주 외면하게 된다. 그물망 사이로 전해지는 감정들을 움켜쥐는 순간, 바스러져서 바다로 돌려보내지도 못하게 될까 봐. 영화 <비포 선라이즈>에서 셀린이 다른 곳을 볼 때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제시의 눈길과 같은 감정들이 내게는 늘 어렵다.


시선의 시작점과 끝을 바라보고 그것에 대해 질문하는 것. 그게 누군가에 대한 관심의 시작이자 전부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시선의 방향이 같은 사람을 발견한다면 확신하지 못했던 감정에 한 번쯤 용기를 내보는 순간이 찾아올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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