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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톤 Jun 07. 2023

430번 오페라

my love has the color of the night

물감 중 내가 이름과 번호를 외우는 색깔이 딱 하나 있다. ’오페라(OPERA)‘라는 이름의, 수채화에 사용하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울 정도로 쨍한 분홍빛 물감이다.

실제로는 이 색깔보다 조금 더 형광끼가 돈다.

아홉 살 즈음 학교 근처 미술학원에 잠시 다닌 적이 있다. 수업 첫날 제일 먼저 한 일은 팔레트에 물감을 짠 뒤 굳히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선생님께서 주신 물감 중 분홍색은 없었다. 자주 쓰는 색깔이 아니니 흰색과 빨간색을 섞어서 사용하라시던가.


살면서 좋아하는 색깔이 꽤 자주 바뀌었지만 그 당시에는 분홍색을 가장 좋아했다. 그래서 소소한 반항의 의미로 물감을 직접 하나 사 왔다. 우리 동네에 있던 가장 큰 서점 겸 문구점에서, 생각보다 많은 종류의 분홍색 물감을 찾아낼 수 있었다. 내 키보다 높이 늘어서있는 다양한 색깔의 물감들을 한참 동안 들여다보았다. 고민 끝에 집어든 색깔은 430번 오페라 색이었다.


역시나 선생님 말씀대로 오페라 색은 활용도가 높지 않았다. 하늘과 바다는 푸른색이고, 산과 숲은 초록색이고, 분홍색은 그 위에 핀 꽃을 그리는 정도에만 사용되었다. 더군다나 오페라 색은 자기주장이 너무나도 강한 색이라 배경과 어우러지게 칠하기가 참 어려웠다. 그럼에도 나는 오페라 색을 꽤 좋아했다. 내가 직접 고른 색깔이라는 데에서 오는 애정이 컸다. 파란 물감은 세룰리안 블루로, 초록 물감은 피콕 그린으로 이미 정해져 있었지만, 분홍색만큼은 내가 정한 물감이니까. 퍼머넌트 로즈도, 셸 핑크도 아닌 ‘오페라’로.


그 당시에는 하늘도 분홍색이고 바다도 분홍색이면 얼마나 좋을까 이따금씩 생각했다. 그럼 오페라도 세룰리안 블루처럼 남은 치약 짜듯이 다 써버릴 수 있을 텐데. 통통한 물감을 새롭게 사 올 수 있을 텐데. 내 멋대로 바다를 오페라 색으로 채울 용기는 없었기에 나는 늘 넓고 넓은 캔버스 위 아주 작은 공간만을 오페라에게 내주었다.


붓을 놓은 지 십 년도 넘게 지난 저번 주말에, 한강에서 뒤늦게 마주하게 되었다. 하늘을 자유롭게 뻗어나가는 쨍한 분홍색을. 저녁 하늘이 분홍색일 수 있다는 사실을 너무 늦게 깨달았다.

반포대교의 무지개 분수 앞에서 찍은 사진

모두가 감탄하는 저녁노을을 보며 이제는 내 손안에 없는 오페라 물감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매일 놀이터에서 놀다가 해가 지는 걸 바라보며 집으로 발걸음을 돌렸으면서도, 그때는 낮이 밤에게 남기는 한 줄기의 빛을 한 번도 알아채지 못했다.


아니, 몰랐어도 그냥 하늘을 오페라 물감으로 칠해볼걸 싶었다. 몰라도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감정은 원래 맹목적이고 편협하니까, 캔버스의 절반을 눈이 시리도록 밝은 분홍색으로 채워볼걸 그랬다.


사랑의 원형이 첫사랑이라면 나의 사랑의 색은 오페라 색이지 않을까. 너무도 우연하게 만났고, 많이 좋아했지만 충분히 표현하지 못했고, 가끔 마주치면 반가우면서도 조금은 시리다. 나에게 그런 의미를 주는 색깔이 밤의 공기를 머금고 있어 기쁘다.


좋은 기억은 어떠한 형태로든 흔적이 남는 것처럼, 나는 더이상 가장 좋아하는 색깔로 오페라색을 말하지 않으면서도 무의식중에 분홍색 물건을 자주 고른다. 자주 신는 컨버스의 색깔과, 아침마다 들여다보는 손거울의 색깔과, 일기장으로 쓰는 노트의 표지 등 곳곳에서 오페라의 물기가 아직 다 빠지지 않았다.


내게 처음으로 이름을 알려준 색깔에게 늦은 사과를 보낸다. 다시 이젤 앞에 앉는 날이 오면 그때는 원 없이 오페라 물감을 그어 보겠다고 다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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