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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톤 May 06. 2023

감정의 유통기한

하루 한 캔의 감정

달달한 사탕을 입에 넣어 천천히 맛보기보다는, 유리병에 담아놓고 가만히 들여다보는 것을 좋아한다. 다만 사탕을 바라보며 느끼는 그 허기와 갈증은 정말이지 징그럽게도 싫다. 그래서 늘 기다렸다. 사탕이 하루빨리 썩어버리기를. 썩은 사탕에게는 동요하지 않으니까.


모든 감정은 어차피 얄팍하다고 생각했다. 누군가 나에게 파란색을 좋아하느냐고 물으면 나는 한결같이 부정형으로 대답했다. '파란색'이라는 표현을 들으면 세레니티와 같은 색이 먼저 떠오르고, 나는 이런 색감을 분명하게 좋아하지 않는다. 다만 코발트 블루는 어느 정도 마음에 들어 하는 편이다. 그렇다면 나는 사실 파란색을 좋아하는 것일까? 부분과 전체는 늘 분리하기 어려웠고 나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전체를 좋아해 본 적이 없다.



작년 여름에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날 이 영화를 봤다. <중경삼림>에서 금성무가 연기한 경찰 223은 영화를 대표할만한 유명한 대사를 남긴다.


기억이 통조림에 들었다면 유통기한이 영영 끝나지 않기를. 만일 기한을 적는다면 만년 후로 해야겠다.

 

굉장히 로맨틱한 대사이지만 회의감이 들었다. 저기요, 경찰님. 상대방의 유통기한은 만년이 아니라면 이미 마음 뜬 사람을 평생 일방적으로 좋아해야 할 텐데, 유통기한이 빨리 끝나야, 아니 적어도 상대방과 어느 정도 비슷해야 행복해질 수 있지 않을까요? 아니면 섣불리 기한을 무한정 길게 적어두었는데, 그 사람이 나를 갉아먹는 사람이었다면 어떡해요?


이러한 질문이 무색하게도 어차피 통조림 캔의 유통기한이 한정적이라는 건 자명하다. 내가 지금까지 건져 올린 수많은 감정 중 사랑에 가장 가까운 것은 이 통조림 캔의 모양이지 않을까 싶다. 누군가를 좋아하는 건 단 한 개의 통조림 캔을 사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한 캔의 파인애플이 썩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니까 말이다. 유통기한이 각기 다른 통조림 캔을 매일 하나씩 구입하는 꾸준함에서 사랑은 비롯된다. 좋아하는 감정이 지속된다는 게 어제와 오늘의 감정이 완전히 동일하다는 걸 의미할 필요는 없다. 오늘은 오늘의 감정을, 내일은 내일의 감정을 담은 통조림 캔을 주고받고 그 캔의 기한이 남아있는 한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어떤 것에도 영원은 존재하지 않지만 영원한 사랑은 책임과 약속의 형태로 존재할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썩지 않는 통조림을 줄 수는 없지만, 매일 한 캔의 통조림을 선물하겠다는 약속을 하고 이행할 수는 있으니 말이다.


그 통조림 캔을 더 이상 모으지 않게 되더라도 당장 사랑의 감정이 끝나버리지는 않는다. 이전에 사 둔 통조림을 먹으면 된다. 그리고 고민하면 된다. 새로운 통조림을 더 사 올지, 지금 남아있는 것만 먹고 끝낼지. 유통기한은 한정되어 있고, 그 기간에 도달하는 순간 감정의 끝이 함께 찾아온다.


나는 누군가의 사랑에 기뻐하고 응원하는 것에 비해 스스로의 감정에 있어서는 꽤나 회의적인 편이다. 감정에 휩쓸리는 나는 자주 비효율적이고 맹목적이기 때문에 그런 내 모습이 참 싫다. 그래서 이따금씩 마음에 드는 통조림 캔을 사 오더라도, 한 입도 먹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리고 기한이 지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린다. 썩어서 못 먹게 되면 죄책감 없이 버려도 되니까. 정말이지 사랑받고 자란 데에 비해 사랑스럽게 자라지 못했다.


감정은 자주 거추장스럽다. 그럼에도 가끔씩 내가 감정이라는 걸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스무 살 첫 여행이었던 부산에서 택시를 타고 낯선 풍경 위를 달렸을 때, 꽃 시장에 들어선 순간 생화향이 느껴질 때, 멀리 사는 친구가 보낸 편지가 우편함에 꽂혀 있을 때.


내가 받는 사랑을 만끽하는 동시에 내가 하는 사랑은 끔찍하게 여기는 이기심은 늘 내보내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비정기적으로 통조림을 하나씩 사 온다. 뚜껑을 열지 않을 거라는 걸 아는데, 아는데도 한 번씩 바라보고는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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