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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톤 Feb 27. 2023

바보 같아

좋아한다는 말의 대체어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여름날 하필 가방에 머리끈이 없었다. 우산을 쓰고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며 덥다고 중얼거리니 그 애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여름에도 손발이 찬 내가 그런 말을 하다니 스스로도 신기했다. 불평이 무색하게도 순간 목덜미가 시원해졌다. 그 애는 우산을 들지 않은 한 손으로 내 머리카락을 틀어 올리더니 버스가 올 때까지 그대로 잡고 있었다.


잠시 당황했지만 곧 웃음이 터졌다. 머리카락을 붙잡혀서 차마 뒤는 돌아보지 못하고 앞만 바라보며 하염없이 웃었다.


“아 진짜 바보 같아. 이게 뭔데. 인간 머리끈이냐?”

“덥다며.”


버스 늦게 오면 언제까지 그러고 있으려고. 빗방울이 토독토독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그 애 모르게 소리 없이 웃었다. 정말이지 머릿속을 알 수가 없어. 이해할 수 없을 때, 이해되지 않아서 좋을 때마다 나는 반사적으로 같은 말을 반복했다. 바보 같아. 아, 진짜, 너 바보 같아.


버스를 타고 달리는 동안 날은 맑아졌고, 우리는 대학로에 갔다. 미술 전시를 하나 보고 나서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에 가기로 했다.


둘 다 길치라서 장소를 이동할 때마다 지도앱을 뚫어져라 들여다보는게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일까. 누가 먼저 제안한 건지 모르겠다. 우리 그냥 걸어갈래. 이정표 보면서 슬슬 걸어가면 되지 않을까. 비 그치니까 날도 좀 선선해졌는데.


노래를 들으며 무작정 걸었다. 언제나처럼 그 애의 이어폰을 나눠 꼈고, 언제나처럼 나는 조금 독특하게 생긴 그 이어폰을 어떻게 껴야 할지 몰라 정처 없이 손을 움직였다. 그러면 언제나처럼 그 애는 내 귀에 직접 이어폰을 끼워줬다. 유독 그 애 앞에서만 어린아이가 됐다. 나 이거 잘 모르겠는데. 이것 좀 해주라. 애매하게 웃는 나를 보며 그 애는 역시 생활형 바보라며 가볍게 놀리곤 했다.


그 애의 재생목록을 함께 들었다. 우리의 음악 취향은 겹칠 때가 거의 없었지만 그 취향을 구경하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이 노래 괜찮다. 잔잔하니 좋네.”

“그럼 이걸로 반복재생할까? 나는 다 아는 노래니까 괜찮은데, 너는 처음 듣는 노래가 계속 나오니까 멀미 나지 않을까 싶어서 걱정됐거든.”


그 애의 다정이 다가오는 순간은 늘 예측할 수 없었다. 그러자, 라고 대답한 이후로 우리는 그 곡을 열댓 번쯤 더 들었다. 자동차들이나 볼 법한 빛바랜 초록색 이정표를 따라 걸으며. 아니, 자동차들도 요즘에는 이정표 말고 내비게이션 따라가지 않나? 우리에게만 놀라울 정도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아서 그 나른함을 만끽했다.


터널을 걸어서 건너며 여기 걸어도 되는 거 맞냐고 서로에게 끊임없이 되물었다. 계속 웃음이 나왔다. 우리 왜 이렇게 바보 같지. 지도 찾는 거 귀찮으면 버스 탔어도 됐잖아.


“그래도 재밌잖아. 이렇게 걸으니까 난 좋은데.”


그 말에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최근 들어 이렇게 즐거웠던 날이 없어서.


40여분 쯤 걸어서 결국 교보문고에 도착했다. 걷는 건 좋아하지만 체력은 마땅찮은 탓에 정작 도착하니 둘 다 지쳐서 대강대강 책을 뒤적거렸다. 우리 이럴 거면 여기 왜 온 거야. 진짜 바보 같아.


집 가는 길에는 버스를 탔다. 이제 30분 정도 지나면 집에 도착할 터였다. 잠깐, 아까 우리가 걸은 시간 보다도 짧잖아. 다시 헛웃음을 짓는데 자꾸만 눈이 감겼다.


“... 야, 야. 일어나 봐.”


감각이 예민해서 밖에서는 절대 잠들지 못하는 내가 자다니. 조금 걸었다고 어지간히 피곤하기는 했나 보다. 고개를 들어 옆자리에 앉아있는 그 애를 올려다보는데 뭔가 이상했다. 버스가 멈춰 서 있었다.


“우리 버스 방향 반대로 탔나 봐. 지금 종점 도착해서 정차한 거 같아. 기사님도 방금 내리셨어.”


이건 또 무슨 일이람. 시계를 보니 한 시간 정도 지나 있었다.


“잠들어 버린 내가 할 말은 아닌데, 너는 창밖 보면서 뭔가 이상하다는 거 전혀 못 느꼈어? 집이랑 반대 방향인데.”

“나까지 잠들면 안 되니까 잠 깨느라 전혀 몰랐어.”


소리 내서 웃으며 나는 또 말했다. 이게 뭐람. 너무 바보 같잖아. 같은 표현만 종일 반복하는 스스로의 어휘력이 답답하면서도 그 말밖에는 할 수가 없었다.


“우리 이거 바보 사건이라고 부르자.”


그 애의 제안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버스는 다행히도 다시 출발했다. 이번에는 집을 향해서.


그 이후로 ‘바보 사건’은 꽤 자주 회자되었다. 가끔 다른 친구와 같이 있을 때 그날의 이야기가 나오면 우리 둘은 한참 낄낄거리다가 친구에게 설명해주곤 했다. 얘랑 나랑 저번에 버스를 탔는데 말이야. 바보 사건이 있었어.


친구들은 그렇게까지 재미있어하지는 않았다. 원래 말로 전달되면 재미가 절감되는 법이니까. 그래도 우리 둘만큼은 아주 오래오래 웃었다.


그날의 모든 순간들을 사랑했다. 사실 아직도 좋아하고 있고 더 오랜 시간 좋아하게 될지도 모른다. 우산끼리 부딪혀서 가볍게 팔이 튕겨 나가던 그 시간부터 전부 다. 다소 습하고 끈적이는 여름 날씨는 사시사철 체온이 낮은 나에게 살아있는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고, 잠깐의 소나기가 그친 거리는 찰박찰박했다. 귓속으로 흘러들어오는 노래는 부드러웠고, 버스가 우리 옆을 지나쳐갈 때마다 불어오는 바람이 시원했다. 그리고 어쩌면, 아마도, 꽤 높은 확률로 그 애의 옆에서 걸어서 좋았던 거겠지.


이 세상에 사랑한다는 표현이 사라지면 어떻게 될까? 오히려 사라지는 쪽이 더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그럼 각자 자기만의 고유한 “사랑해”를 갖게 될 테고, 그 말이 암호처럼 이곳저곳을 누비는 건 꽤나 멋진 일일 것 같다.


누군가는 “쩔쩔매게 돼.”라고 말하겠지.

또 누군가는 “나는 너야.”라고 말하겠지.

사실 내가 너에게 말한 “좋아해.”는 “바보 같아.” 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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