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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톤 Dec 25. 2022

눈의 흔적

늘 똑같다는 걸 알면서도 매년 눈을 기다린다

정류장에서 세 대의 버스를 보냈다. 약속 시간에 한 번도 늦은 적 없는 친구가 오늘은 어쩐 일인지 20분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미리 늦는다고 연락을 줘서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다만 수족냉증을 가진 나에게 가혹하리 만큼 날이 추웠다. 바람을 최대한 피하기 위해 이리저리 몸을 돌려보다 결국 차도를 등지는 애매한 자세로 서 있었다.


정류장 옆 계단에서 몇 번의 인기척이 느껴졌고 그때마다 친구인지 확인하느라 조금씩 몸을 돌렸다. 롱 코트가 잘 어울리는 분이 지나간 뒤에는 내 취향의 향수 냄새를 풍기는 분이 지나갔다. 버스 노선을 잠시 확인하는 분도 계셨지만 결국에는 모두가 정류장을 떠나가고 고요가 찾아왔다.


이쯤 되면 전화해 볼까. 마침 신발도 컨버스라 발이 얼어붙을 거 같단 말이지. 그 순간 다시 계단에서 누군가의 모습이 나타났고 나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단정한 머리에 유난히 흰 피부, 가는 눈을 마주하는 순간 뇌까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체구도 비슷한 거 같은데. 그래도 시간이 그렇게 지났는데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일까.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확신하기 더 어려웠다. 내 바로 옆에 나와 같은 방향으로 서는 걸 보고 다시 헷갈리기 시작했다. 그 애는 언제나 기꺼이 나와 같은 방향으로 서서 같은 곳을 바라봐주는 사람이었으니까.


힐끔힐끔 쳐다보다 눈이 마주쳐서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 애는 놀라면 나랑 표정이 비슷해지니까 아마 눈을 크게 뜨겠지. 눈을 피하지는 않았지만 표정 변화가 없는 걸 보니 그 애가 아닌 것 같았다. 그 애는 절대로 내 눈을 오래 들여다보지 못했다. 마침 버스가 왔고 계단을 올라가는 그 옆모습을 보며 다시 확신했다. 아니구나. 애초에 사는 곳도 다른데 여기서 버스를 탈 리가 없다.


순간 실소가 나왔다. 이게 뭐람. 드라마에서도 영화에서도 책에서도 한 번쯤은 본 경험을 내가 하게 되다니, 너무 뻔하잖아.


그 애를 다시는 만나지 못하리라는 걸 잘 알기 때문에 나는 종종 마음속으로 혼잣말을 건넸다.


-그거 알아? 나 올해 겨울에는 네 생각 이번이 처음이야.

너는 왜 매번 뻔하디 뻔한 순간에만 생각나? 좀 더 멋있게 기억되면 좋잖아. 난 맛있는 거 먹을 때 같이 먹고 싶은 사람이 떠오른다는 것도, 그게 좋아하는 감정이라는 것도 너 때문에 처음 느꼈단 말이야. 그런 건 굳이 경험해보지 않아도 다들 알고 있는 거잖아.


문득 바닥을 내려다보자 정류장에는 며칠 전에 내린 눈이 녹지 않고 쌓여 있었다. 첫눈이 아니었는데도 그날 기어이 눈을 맞겠다며 패딩을 껴입고 집 밖으로 나갔다. 매년, 그리고 겨울에도 몇 번씩 찾아오는 손님이지만 눈은 언제나 반가웠다.


-나는 항상 네가 눈을 닮았다고 생각했어. 눈 결정의 모양이 모두 다른 것처럼 너랑 같이 있으면 매일 새로운 감정을 경험했거든.

나를 굳이 비유하자면 종이? 눈이 녹아서 물이 되고 그 물이 종이를 적시면 아무리 말려도 절대 처음 상태로 돌아갈 수 없잖아. 그때 생기는 약간의 주름이 나한테 남아있는 네 흔적이랑 비슷한 것 같았어.


눈이 내리면 난 왜 언제나 같은 마음으로 설렜을까. 눈은 언제나 하얗고 부드럽고 차갑고 늘 똑같은데. 뻔하고 뻔해서, 이미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좋아했는지도 모른다.


-난 눈을 좋아하면서도 막상 결정을 자세히 들여다본 적은 없어. 세상이 하얗게 뒤덮이는 게 마냥 좋았을 뿐이지. 어쩌면 그래서 네가 눈이랑 닮은 것 같아. 매번 새로워서가 아니라, 내가 어렴풋이 머리로만 알고 있던 감정들을 평범하디 평범한 방법으로 직접 손에 쥐게 해 줘서. 나는 네가 웃는 게 좋았고 이왕이면 웃게 해주고 싶었는데 이건 다들 흔하게 하는 말이잖아. 그 뻔한 감정을 직접 느끼게 해 줘서 고마워.


한때 그 얼굴을 가장 가까이에서 바라볼 수 있다는 건 행운이었고, 다시는 그 기회가 오지 않을 거라는 게 슬프지는 않았다.


-눈은 순식간에 녹잖아. 그보다는 오래 걸렸지만 너도 내 안에서 거의 다 녹은 것 같아. 이제 네 웃는 얼굴이 잘 기억이 안 나. 더 이상 네가 사 준 목도리 때문에 겨울을 기다리지도 않아. 사실 나는 겨울보다 여름이 더 좋거든. 더위보다 추위 많이 타는 거 기억하려나?

그래도 널 닮은 사람을 보면 한 번씩 네가 생각나고 순식간에 머리가 하얘질 거라는 걸 부정하지 못해. 그 정도로만 추억하게 해 주라. 그 정도 거리에만 머물러주라. 나는 앞으로 여름을 살 건데 여름의 태양빛은 눈에게 너무 뜨거우니까, 우리 슬슬 인사하자.


이제는 마음속으로라도 그 애의 안부를 묻지 않는다. 그럼에도 겨울이 다가오면 추억할만한 사람이 있다는 건 꽤나 기분 좋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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