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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톤 Dec 01. 2022

누군가의 밤 산책

감정에는 형용사가 부족하다

휴대폰 화면이 잠시 반짝, 빛나다 이윽고 검은 화면으로 되돌아갔다.

맞다. 무음 모드 해제하는걸 또 까먹었네.

연락 안 받는다고 그렇게 잔소리를 들으면서도 습관인지라 쉽사리 고치기 어려웠다. 휴대폰 액정을 두어 번 두들겨서 문자를 확인했다.


'전화 또 안 받네. 바빠?'

'안 바쁘면 나랑 산책 가자'


그 애는 한강공원에서 5분 거리에 사는 나를 툭하면 불러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쉬면서도 내가 보낼 답장은 정해져 있었다.


'8시에 입구에서 봐'


그러니까 이건, 나는 운동이라고는 숨쉬기 운동밖에 안 하니까, 내 체력으로 할 수 있는 운동은 걷기밖에 없으니까.

해가 떠 있는 동안은 의자에 앉아서, 달이 떠 있는 동안은 침대에 누워서 하루를 보내니까,

생존에 필요한 최소한의 운동을 위해서 나가는 거다. 별다른 의미는 없다.


노래를 들으며 걷다 보면 두 번째 곡의 클라이맥스에 다다를 즈음에 그 애의 실루엣이 보이기 시작했다. 평소에 만나기로 하면 종종 늦으면서 산책할 때만큼은 매번 먼저 와서 기다리는 게 신기했다. 산책이 그렇게 좋은가.


비스듬한 시선의 끝이 바닥에 있는 건지 본인 신발에 있는 건지, 괜히 발을 바닥에 문지르는 건 도대체 무슨 의미인 건지, 잡다한 생각을 흘려보내며 그 애의 신발 위에 내 시선의 끝도 가만히 겹쳐 올렸다. 시야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그 애의 머리카락이 순간 흔들렸다.


눈이 마주쳤다.


그 애는 입꼬리를 어색하게 올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알고 지낸 지가 몇 년인데 아직도 어색해하는지 답답하다가도 내 표정 역시 별반 다르지 않을 것 같았다. 평소에 잘 웃는다는 얘기를 많이 듣는데 이상하게도 그 애 앞에만 서면 온 얼굴 근육이 굳는 기분이었다. 내 눈꼬리가 휘어지는 걸 의식하며 손을 살짝 흔들었다.


"일찍 왔네. 오늘은 몇 시에 일어났어?"

"한... 네 시쯤?"

"새벽 네 시는 당연히 아닐 테고. 한결같다, 정말."

"그러는 너는 어떻게 주말에도 아침 일곱 시면 칼같이 일어나냐."


하루가 시작된 지 네 시간 지난 사람과 열세시간 지난 사람의 산책. 나에게는 밤 산책이지만 너에게는 낮 산책이려나. 자정이 넘어가면 컨디션이 급격하게 처지는 나와는 달리 그 애는 종일 해를 보지 않고도 곧잘 하루를 보내곤 했다. 절대 서로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굳이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내가 햇살의 눈부심에 대해 이야기하면 그 애는 새벽의 반짝임에 대해 말해주면 되니까. 그 무심한 관심 덕분에 매번 갑작스러운 산책에 응하게 되는 걸지도 모른다.


바람이 선선하게 불었다. 그 애의 녹색 후드티에서 은은하게 비누향이 났다.


"야."

"응?"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아서 괜히 불러보자 그 애가 나를 내려다봤다. 평소에 보면 마냥 어리고 애 같은데 그 애의 표정을 보려면 한참 올려다봐야 한다는 게 기분이 이상했다. 눈이 잠깐 마주친 것 같아 나는 황급히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누구에게도 할 수 없는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서 누구에게나 할 수 있는 이야기를 하나둘씩 꺼냈다. 시답잖은 이야기임에도 그 애는 상체를 완전히 내 쪽으로 기울여 웅얼거림에 귀를 기울여 주었다. 대체 어느 부분이 재밌는 건지 도통 모르겠지만 그 애는 이상한 포인트에서 한 번씩 피식,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런 얘기가 재밌어? 하여간 너는 이상해. 나 재미없다는 소리 많이 듣는데. 말주변도 별로 없고, 일상은 매일이 똑같고. 그렇다고 너랑 나랑 관심사가 겹치는 것도 아니고."

"재밌는데, 왜. 그래서 점심으로 샌드위치 먹었다고?"


밥 먹고는 도서관 갔다가- 오늘 계단에서 또 넘어질 뻔했어. 너 슬리퍼 새로 산 이후로 하루에 한 번씩은 발 헛디디는 거 같은데. 발이 납작해서 헐렁거리는걸 뭐 어떡해.

그런 실없는 얘기를 주고받다 보니 터널을 지나 한강이 보였다. 갈림길이 나오면 그 애는 항상 나를 쳐다보며 물었다.


"오른쪽? 왼쪽?"

"오늘은 오른쪽. 아, 해 다 져버렸네."

"아무리 여름이어도 여덟 시는 일몰 보기에는 좀 늦지. 꽤 어둑어둑하다."


여름이라고 하기에는 꽤 선선한, 여름과 가을의 그 사이. 덥고 습한 공기가 떠나간 계절은 생각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우리는 조용히 서로의 일상을 이야기하고, 이따금씩 유치하게 말꼬리를 잡고, 잠시 아무 말 없이 걷다가 또다시 대화하기를 반복했다. 침묵이 어색하지 않은 유일한 사람. 그 애와 이야기하는 건 참 편안했다. 모두가 고개를 꼿꼿이 든 채 앞만 보고 나아가는 와중에 그 애는 홀로 쭈그려 앉아 세상을 바라보는 것 같았다. 길고양이와 눈을 맞추고, 이름 모를 들꽃을 발견하고, 아스팔트 길의 상처를 알아봐 주는 사람. 그 애는 달을 닮았지만 스스로 빛을 낼 줄 알았다. 이따금 그 옆에 오래도록 주저앉아 있고 싶었다.


내가 너의 일상이 될 수 있을까? 모든 반짝임은 익숙해지면 환상과 기대만큼의 빛을 잃는다. 그래서 나는 차마 그 옷소매를 붙잡지 못하고 반걸음씩 느리게 그 애의 걸음을 따라갈 뿐이었다.


그 순간,

가로등이 그 애의 머리칼을 따라 빛났다. 빛의 끝자락이 눈동자에 닿아 가는 눈이 살짝 반짝였다. 약간의 미소를 머금은 그 옆모습을 볼 때 드는 감정이 울렁임인지 일렁임인지 언제나 알 수 없었다.


그 애와 걸을 때면 나는 자꾸만 사랑에 빠졌다. 선선한 바람과, 그 속에 가려진 텁텁한 온도와, 후각으로 전해지는 가벼운 달콤함과, 약간의 빛줄기. 항상 그 자리에 있는 듯 조금씩 변화하는, 아무 기대 없이 마주쳐 반짝임을 잃지 않는 그 모든 것들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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