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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톤 Jan 17. 2024

돌고 도는 초콜릿

마음의 무게

기숙사 학교에 다닌 덕분에 고등학생 때 학교로 정말이지 다양한 물건들을 주문해 보았다. 어둑한 시간에 택배 상자를 안고 귀가하는 일상에 퍽 재미를 붙였던 것 같기도 하다. 옷이나 책, 세안용품처럼 꼭 필요한 것들뿐만 아니라 향수, 만년필 잉크 같은 취미용품까지. 그중 가장 자주 구입했던 건 온갖 종류의 초콜릿이었다.


입이 짧고 먹는 행위 자체를 귀찮아하는 나에게 초콜릿은 끼니를 대신해 줄 때가 많았다. 학교 매점에는 없는 종류의 맛이 먹고 싶어지면 1kg에 가까운 대용량을 택배로 주문했다. 기숙사 반입 금지 물품이라 상품명에 학용품이라고 표시해 달라는 배송 메시지를 남겨 가면서까지.


초콜릿이 도착할 때마다 제일 먼저 했던 건 친구들의 면학실 자리로 쪽지와 함께 초콜릿을 배달하는 일이었다. 사람과 처음 친해질 때 간단한 한입거리 간식을 건네듯이, 무심하고 표현이 적은 나에게는 나름 의식적으로 행하는 애정 표현이었다.


나 역시 수도 없이 많은 초콜릿을 선물 받았다. 외출한 김에 유명 제과점에서 사 왔다며 아이스팩에 포장되어 온 초콜릿도 있었고, 기숙사에 누워 배고프다고 말하면 룸메이트들이 각자 서랍을 뒤적거려 냅다 침대로 던져주던 초콜릿도 있었다. 나는 유독 그런 기억들을 자세하고 오래 간직한다. 친구가 복도에서 마주칠 때마다  자주 쥐여주던 초콜릿은 키세스이고, 시험 10분 전에 긴장 좀 풀라며 매점까지 뛰어가 사다 준 초콜릿은 페레로 로쉐였던 것까지. 그렇게 주거니 받거니 학교 안에서는 초콜릿이 돌고 돌아다녔다.


나는 좋은 감정에 쉽사리 무뎌지지 않는 편이라 손바닥보다도 작은 그 소소한 간식에 질리지도 않고 늘 기뻐한다. 다만 그 끝은 외로워질 때가 자주 있다. 초콜릿은 너무 가볍고 사소하고 쉬우니까. 상대에게는 그처럼 작은 호의에 불과한 것을 내가 너무 무겁게 받아 들고 있을까 봐. 상대의 무게를 모르는 채로 마음의 균형을 맞추는 일은 늘 어렵다.


인간관계에서 내가 느끼는 불안은 언제나 그런 종류였다. 마음의 크기가 다른 건 무거운 쪽에게 조금쯤 비참한 기분을 준다. 그래서 나는 상대가 보내오는 마음을 늘 다 먹지 못하고 몇 입씩 남겼다. 내가 가벼워져야 이 시소 놀이에서 위로 올라가는 기분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그럼에도 나는 결국 나보다 무거운 마음들을 만났을 때 스스로 땅 위로 내려온다. 내가 준 포스트잇을 전부 모아서 책상 위에 붙여놓는 장면이나, 몇 개 되지도 않는 초콜릿을 사진까지 찍어두며 간직하는 장면을 마주칠 때. 그런 사람들은 마음에 무게를 다는 게 별 의미가 없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최진영 작가의 소설 '구의 증명'을 읽다 보면 주인공은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시체를 뜯어먹는 쪽을 택한다. 표면적인 행위는 기괴하고 괴물 같지만 정작 그 안에 담겨있는 마음은 너무나도 인간적일 것 같았다. 나의 일부로라도 그 사람을 남겨두고 함께하고 싶은 마음이겠지.


초콜릿은 아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내 안에 머물 수 있으니까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따뜻한 마음들이 잠깐씩 자리해주다 보면 체온이 낮은 나도 언젠가는 손발이 따스해지는 날이 올까. 나는 아마 아주 오랫동안 쉽게 좋아하고 쉽게 기뻐하는 하루를 반복하며 살아갈 것이다. 초콜릿 속에 숨어 있는 예쁘고 설레는 마음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도 점심으로 초콜릿을 먹었다. 바빠서 끼니를 거르려던 나에게 걱정하는 마음을 잔뜩 담아준 엠엔엠즈 초콜릿.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그 마음에 체하지 않게 조금씩 베어 먹었다. 눈이 비가 되어 내리는 오후를 밝혀 주는 건 그런 마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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