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ape of death
꽃을 선물 받으면 닷새 정도 물갈이를 해주다가 꽃병으로 옮겨 말린다. 말라붙은 꽃잎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할 즈음에는 꽃병을 비운다. 그의 가장 예쁜 모습을 나만은 기억해줘야 할 것 같다는 강박에서 나는 언제나 자유롭지 못하다.
식물이 시들어가는 걸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건 늘 마음에 가벼운 생채기를 낸다. 생명의 연소를 향한 애도라는 흔한 감정과 함께, 나에게 꽃을 다발로 내미는 손 위에는 꽃 선물을 처음 해본다는 말이 자주 얹어졌기에. 내가 받은 건 한 손에 쥐어지는 몇 가닥의 줄기가 아니라 그들의 무수한 처음이었다.
식물이 원하는 죽음은 무엇일지 자주 고민한다. 내 보잘것없는 미련 때문에 그들이 원하지 않는 모습으로 오래 남겨두는 건 아닐까. 귓속말로라도 유서를 남겨주면 좋겠다.
어린 시절에는 과학 실험에 사용된 부레옥잠과 알로에를 땅에 묻어준 적도 있었다. 칼로 난도질한 것으로도 모자라 쓰레기통에 버리기에는 알로에 즙이 눈물처럼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학교 화단으로 몰래 달려가 그들이 있어야 할 자리는 여기인 것 같다는 어린 생각으로 흙을 덮었다. 지금 돌아보면 그것조차도 오만에서 나온 실수였을지도 모르겠다.
죽음은 대부분 우연적이라는 점에서 늘 잔인하다. 어떤 죽음은 벚꽃처럼 흩날리며 마지막까지 아름답고, 어떤 죽음은 동백꽃처럼 급작스럽게 통째로 추락한다. 필연으로만 삶을 채우려면 그 끝을 어떻게 맺어야 할지 많은 방법이 떠오르지는 않는다.
이왕이면 내 노년의 모습을 보고 싶지만 나는 오래도록 장수하고 싶다는 욕심은 없다. 그래도 아직 내 눈에는 아침 햇살로 반짝이는 눈 발자국이 너무 예쁘니까. 가장 차가운 시간에 따스함이 만들어내는 아지랑이를 보기 위해 새벽이 기다려지니까. 그게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지 않을까 싶다.
언젠가 나를 꽃다발 말리듯 붙잡는 미련이 사라지면
내가 더 이상 지켜내고 싶은 게 없어지면
그 순간에 내 삶의 커튼을 영원히 닫아버리고 싶지만
그 선택은 아마도 내 것이 아닐 것이다.
나의 죽음의 모양은 식물의 형체를 가질 테니까.
오늘도 겁 없이 꽃을 말린다.
오래 보고 싶어 해서 미안해.
미안함은 사랑이 아니라던데
언제부터 미안했는지조차 이제는 알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