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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톤 May 06. 2024

연체 반납

겨울에게, 여름으로부터

여유로운 봄날의 공원이 떠오르게 하는 사람과 산책을 했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밤공기가 차갑다며 바짝 붙어서 걷던 날에 나에게 글을 쓰냐고 물어왔던 사람과. 화려한 장식 없이도 반질반질한 손톱으로 양산을 감싸 쥔 채 걸어오는 언니를 보며 그동안의 모습 중 그날이 가장 언니답다고 생각했다.


평균키 정도인 나와도 꽤 차이가 날 만큼 언니는 키가 작은 편인데, 내가 굽이 6cm나 되는 통굽 샌들을 신는 바람에 우리의 눈높이는 한 뼘 더 멀어졌다. 언니의 양산 그늘 아래로 들어가려면 허리를 숙여야 할 정도였기에 나는 내가 양산을 들겠다며 손잡이를 잡았다.


햇빛을 피하려고 노력해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양산을 쥐는 게 꽤나 어색하고 어려웠다. 우리는 적지 않은 시간을 걸었고, 빛의 높이와 방향은 시시각각 바뀌었고, 언니의 높이와 온도를 나는 겪어보지 못했으니까.


언니의 얼굴에 그림자가 적당히 지는지 잠시 살펴보았다. 언니는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맑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외모는 동글동글 귀엽지만 내면은 단단한 사람. 다시 한 겹 더 들어가면 여리고 섬세한 사람. 그 무른 속내가 햇빛에 너무 빨리 익어버리지는 않았으면 해서 언니 쪽으로 양산을 살짝 더 기울이고 걸었다.


그리고 언젠가의 나에게 우산을 씌워주던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나보다 키가 크다는 이유로 쉽게 우산을 쥐여줘 버렸는데, 그건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감정이었겠구나. 비를 대신 더 맞는 것도 상대의 어깨를 살피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닌데 나는 혼자서만 멀리까지 가볍게 걸어왔구나.


키가 더 자랐다는 게 마음이 더 자랐다는 뜻은 아니었을 텐데, 나 때문에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렸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때면 그를 시체처럼 과거 속에만 가만히 뉘어둘 수가 없었다.


언젠가 소설을 쓴다면 죽은 사람이 승리하는 이야기를 써야지, 하고 생각했다. 좋은 기억만 남겨두고 떠난 사람과 새로운 감정을 끊임없이 전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과연 어느 쪽이 이길까 궁금해하면서. 적어도 내가 봐온 수많은 경우들에서는 늘 후자가 미소 짓는 결말이 찾아왔다. 그래서 해골로 남은 패자의 손을 한 번쯤은 잡아주고 싶었다. 집필 기간을 길게 마련하고 천천히 써보자고, 그렇게 반례를 하나쯤은 남겨보자고.


내가 좋아했던 사람은 나에게 죽은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절대로 다시 볼 수 없다는 단순한 사실이 호흡을 차츰 지워갔다. 그가 나의 현재였을 때 내가 받은 마음은 이미 연체가 되었다. 바코드를 찍으면 듣기 싫은 시끄러운 소리가 났을 것이다. 돌려줄 기간이 끝났다. 그건 설령 우리가 다시 만난다고 해도 변하지 않을 한 가지였다.


대출 기한이 끝나고 나서야 좋아한다는 말은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라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놓치기 싫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꽤 오랫동안 고민했다. 그에게서 빌려 온 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돌려줘도 될까에 대해서. 내가 그래도 되나. 감히 그래도 되나.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에도 꼭 대출한 도서관에서 반납해 달라는 주의사항이 적혀 있는데.


내심 그가 승리하기를 바랐다. 그냥 나를 그렇게 계속 괴롭혀달라고. 내가 아무도 좋아할 수 없게 만들어달라고. 소설도 결국에는 허구니까 내가 정말로 만들고 싶었던 예외는 나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날 언니에게 작은 선물을 하나 건넸다. 바람이 조금 더 시원하던 날에 사 두었던 프랑스풍 비누였는데 언니는 많이 기뻐하며 그날 몇 번이나 고맙다고 말했다.


항상 보면 많이 사랑받았고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인 거 같아요. 사실 저는 그걸 잘 못 해서 주변 사람들이 가끔 서운해하더라고요. 언니가 옅게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저도 별반 다르지 않아요. 그냥 제가 받아본 걸 어설프게 따라 하는 거예요. 그 말을 하면서 아차 싶었다.


미안, 이번에도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이겼네.


그는 겨울을 닮은 사람이었고 그 속에 꽤 오래 갇혀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걷는 계절은 이미 봄이었다. 아직 너만큼 좋아해 본 사람은 한번도 없었지만 그것도 가능한 날이 올지도 모르겠지. 여름과 가을이 지나면 겨울은 다시 한 번 올 테니까.


그에게 늘 미안하다. 그를 과거에 둔 채로 내 시간이 흐르고 있어서 미안하다. 그 덕분에 좋아하게 된 계절이 겨울이 아니라 여름이라서 미안하다. 이제 날씨가 정말 여름이네요, 라고 말하는 언니 옆에 앉아서 손에 남은 아이스크림을 마저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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