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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톤 Jun 30. 2024

오늘

기대와 기다림 건너편에

살고 싶지 않다는 감각을 유일하게 느꼈던 시기는 열아홉 살 때였다. 열일곱부터 이어진 성장통에는 뚜렷한 이유가 없었다. 그 당시에 싫어하는 게 참 많긴 했다. 얼굴 모를 소음과 밀도 높은 공간. 보답할 수 없는 애정과 불투명한 표정들. 다만 그들의 순위를 매겨보라면 대답할 수 없었다. 환부를 모르는 환자의 삶은 그런 형태였다.


말 그대로 나는 죽지 못해서 살았다. 어느 노래 가사처럼 아픈 건 딱 질색인 나에게 죽음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베란다 창문을 열어놓은 채로 전화기를 붙잡고 우는 쪽을 택했다. 나를 건져내 달라는 의미는 아니었고 그냥 어느 정도 깊이에 가라앉아 있는지만 알아줬으면 했다. 그 정도로 이기적이었다. 전화를 받아준 사람들 중 누구도 내 삶의 이유가 되지는 못했지만 그들의 마음은 나에게 아까울 정도로 과분했다.


그때는 내가 스물한 살까지 살 수 있을 줄 몰랐다. 나의 오늘은 성인이 되기 전까지 한 번도 그려내지 못했던 미래였다.


고등학생 때 하루에 일기를 두 장씩 썼다. 정해놓은 분량은 아니었지만 쓰다 보니 그렇게도 많이 썼다. 우울한 얘기로만 가득할 것 같았는데 다시 읽어보면 마냥 괴롭기만 한 기억은 아니었다. 나는 끊임없이 누군가를 좋아했고 순간의 시간을 사랑했다. 그건 고통의 역치가 낮은 사람의 생존법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졸업을 하고 일기를 쓰는 빈도가 줄어든 대신 일기장 속 사람들이 이따금씩 현실로 툭툭 튀어나왔다. 가끔은 먼저 연락이 왔고 가끔은 내가 먼저 연락을 했다. 밥 한 번 먹자는 말을 빈말로 남기지 않기 위해서.


저번달에 만난 친구 두 명은 각자 다른 순간에 신기할 정도로 정확히 같은 말을 해 주었던 사람들이었다. 내가 아프다고 직접 말하기 전에 미리 알아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그건 내가 받아 본 가장 다정하고 다감한 사과였다. 내가 필사적으로 숨기고 있는 걸 네가 어떻게 알았겠어, 하고 창백하게 웃게 만들던.


2년 만에 닿은 서로의 근황은 놀라운 것 투성이었다. 친구는 내가 머리카락을 짧게 자른 모습을 처음 보았고, 나는 친구가 앞머리를 내린 얼굴을 처음 보았다. 자취를 시작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스스로를 책임지는 모습이 어른 같아서 그저 신기했다.


한참을 이야기하다 셋에서 둘이 되었을 때 친구가 나에게 요즘에는 좀 살만하냐고 물어왔다. 그 물음에는 시원하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다만 그래서 지금은 살고 싶냐는 질문은 참 어려웠다.


내 인생에서 요즈음이 제일 재미있긴 한데, 내일 죽는다 해도 뒤돌아보지는 않을 것 같아. 근데 또 오늘을 볼 때까지 살지 못했다면 억울했겠다는 생각은 해.


친구는 그 정도면 당장은 충분한 것 같다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둘에서 셋으로 돌아갈 때까지 답이 나오지 않을 이야기를 나누었다. 사람을 살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에 대하여.


이주쯤 지난 시점에는 또 다른 친구가 공연을 한다며 초대해 주었다. 구움 과자를 골라 포장된 상자를 받아 들고 만석인 버스를 탈 때까지만 해도 그 길이 하나의 놀이 같았다. 예쁜 디저트를 들고 친구를 만나러 가는 그런 놀이.


언제나 그랬지만 친구는 춤을 출 때 가장 반짝거렸다. 이번이 처음 보는 모습도 아닌데, 나는 고등학생 때도 공연 때마다 그 애를 영상으로 담았는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행복이 차츰차츰 슬퍼졌다. 영화 ‘인사이드 아웃’에서 기쁨이가 머리카락만은 노란색이 아닌 파란색인 이유를 이해할 것도 같았다.


현재라는 시간은 더 이상 우리가 기숙사 세탁방에 쪼그려 앉아 그려내던 텅 빈 허공이 아니었다. 스물한 살의 우리였고 현실의 오늘이었다.


이런 게 삶의 형태라면 살고 싶었다.


사실 공연에 친구 부른 거 이번이 처음이야. 무대에서 내려온 친구를 끌어안았을 때 살다 보면 이런 모습들을 볼 수 있겠다는 마음에 처음으로 기대가 생겼다. 아껴두고 싶은 무수한 처음을 함께하는 것. 곁에서 같이 나이 드는 것. 내가 보고 싶었던 것은 해가 지지 않는 여름도 별이 쏟아지는 하늘도 아닌 그런 자연스러운 일상의 풍경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외지고 어두웠다. 나이를 먹을수록 밤의 시간이 길어지고 있다는 걸 이따금씩 실감한다. 어른의 눈에는 어둠이 익어서 모든 것들이 훤히 보일까, 아니면 여전히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까.


그렇게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미래일지라도 나를 둘러싼 풍경들은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겠지. 그렇다면 그저 그 곁에서 평범하게 머물고 싶다. 나는 겁이 많아서 운전은커녕 자전거도 타지 못하지만, 조수석에 앉아 함께 갈림길을 고민하고 사탕을 나눠먹는 것도 하나의 삶일 거라고 믿는다.


살고 싶지 않아서 죽고 싶었던 그 시절을 조금은 애틋하게 되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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