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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레톤 Aug 17. 2023

방학을 기다리셨나요

2012년 5월 31일

방학이라는 말을 듣고도 설레지 않은 건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아주 어릴 때 정말이지 펑펑 놀면서 살았다. 그 흔한 학습지 한 번 풀어보지 않았을 정도로 공부 압력에서 자유로웠다. 초등학생 때는 피아노 학원과 아주 가벼운 수준의 영어 학원만 다녔고, 그조차도 매일 가지는 않았다. 그 덕분에 꽤 오랜 시간 방학을 만끽하며 보냈다. 여름 방학식날이 되면 오전 수업만 듣고 평소보다 일찍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거실에 책가방을 던져놓고, 맛없는 급식 대신 맛있는 집밥을 먹으면, 그 순간부터 시작인 것이다. 한 달여간 정말이지 놀고, 놀고, 또 놀 수 있는 나날들이 펼쳐졌다. 아무런 걱정이나 잡념 없이 무방비하고 평화롭게.


친구들과 놀이터에 가고, 문방구에서 이런저런 잡동사니를 구경하고, 자전거 뒷자리에 앉아 동네를 한 바퀴 돌다 보면 하루가 참 빠르게 지나갔다. 에어컨이 틀어져 있는 쾌적한 집으로 돌아와 수박을 먹고, 뽑기 아저씨가 놀이터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당장 동전을 손에 쥔 채 달려 나가던 그런 여름날들. 그 시간이 너무나도 좋아서 나는 늘 방학을 기다렸다. 기대할 대상이 있다는 사실은, 그 자체만으로 화사했던 내 어린 날들의 활력이 되어주었는지도 모르겠다.


물론 고등학교에 온 이후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학교 진도를 따라가기 위해서 방학에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그런 시간들이 고작 서너 번 반복되자, 교내 방송을 들으며 어차피 공부해야 할 거 고등학생한테 방학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중얼거리는 나 자신만이 남아 있었다. 회의감과 피로, 불안감에 잔뜩 짓눌린 채로, 다가올 시간에 대한 기대감은 흔적 없이 증발해 버렸다.


스무 살이 된 지금은 그때만큼 바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잉여로운 방학의 시간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다. 어린 내가 그토록 고대하던 소중하고 한가로운 황금빛 휴식은 앞으로의 시간들 속에서 허울뿐인 껍데기로만 남아있는 지도 모르겠다.


초등학교 2학년 때 일기장 속 아주머니의 말씀을 이제야 이해하게 된 것 같다.


얼마 전 대학로로 향하는 버스에 앉아 있는데 건너편에 앉은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초등학생쯤 되어 보이는 한 남자아이였다.


엄마! 저 사람은 왜 화가도 아닌데 베레모를 쓰고 있어?
그냥 쓰고 싶으면 쓰는 거지. 화가만 베레모를 써야 되는 것도 아니고, 멋 내는 거야. 너도 스카프 하고 싶으면 아무 때나 하잖아.
그래도 이상해. 난 마음에 안 들어.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그 나이에는 그런 생각을 해야 똑똑해지지. 수학 공식이나 영어 단어는 나중에 원 없이 외울 수 있지만, 그런 순수하고 엉뚱한 창의력은 다시 찾아오지 않는걸. 맞춤법도 제대로 모르던, 고작 아홉 살이던 나에게 놀아야 똑똑해진다고 말씀해 주신 아주머니도 이런 마음이셨을까.


창밖을 바라보며 끝도 없이 조잘거리는 아이의 말은 평범한 듯 평범하지 않았다. 아무도 의문을 가지지 않는 일상을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는 그 시선을 따라가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나는 네가 아주 오래 방학을 기다렸으면 좋겠어.

이번 여름방학에는 놀이터 그네에 앉아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매미 소리를 들으면 좋겠어.

다시 찾아오지 않을 맑고 가벼운 자유로움을 충분히 누려보길 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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