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 12월 31일
작년 이맘때 즈음에는 친구와 광화문 거리를 걸었다. 크리스마스 마켓이라는 이름의 상점들을 구경하다 마요네즈와 데리야끼 소스로 버무려진 감자튀김을 한 그릇 샀다. 둘 다 딱히 배가 고프지 않았던 터라 그 감자튀김을 꼬치로 한 개씩 찔러가며 오래오래 나눠 먹었다. 계단에 쭈그려 앉아 덜덜 떨며 먹으면서도 그게 그렇게도 즐겁다고 사진까지 찍어 두었다. 마지막 하나 남은 감자튀김은 서로에게 끝까지 양보하는 동안 차갑게 식어갔다.
그날 친구에게 양초를 하나 선물 받았다. 분홍색 털모자를 쓴 3단 눈사람 모양의 양초. 기운차 보이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조금 오래 들여다보았을 뿐이었는데 친구는 어떤 향이 마음에 드냐며 이것저것 물어보더니 버스 정류장에서 끝내 양초를 내 손에 쥐여주며 말했다.
이 눈사람은 녹지 않을 테니까 너랑 오래오래 함께했으면 좋겠어.
그런 말들은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다. 영원이란 시간은 허상이고 눈사람이 언젠가 녹을 거라는 점은 아주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덧없이 새끼손가락을 거는 마음이 언제나 예쁘다고 생각했다. 영원을 가장 약속받고 싶었던 사람에게 끝내 철없는 소리를 들어보지 못해서 그런가. 우리가 우리였던 열아홉 번째 1월 1일에 일기장 위로 건네받은 편지는 이러했다. 솔직히 너한테 어떤 말을 하면 좋을지 모르겠어, 항상 그랬어. 나는 너한테 조건 없는 마음을 영원히 줄게라는 말은 너무 무모하고 난 그런 말 하지 않으니까 하지 않을 거야. 너는 널 믿어야 해. 인생에 정말 별 일이 다 일어난다,
세연아,
당시에는 그 말이 마냥 서운했다. 흔적 없이 녹아버리는 것만이 미래일지라도 어쨌든 우리는 지금 같이 있으니까, 함께하는 미래를 그려주기를 내심 바랐던 것 같다. 나는 늘 그렸거든. 하지만 변하지 말라고 애원해 놓고서 내가 먼저 변하던 순간과, 좋아하는 것에 더 이상 설레지 않아 슬퍼하던 순간부터 겨울 인사는 조심스러워졌다. 미래의 시간을 어디까지 약속해도 괜찮을지, 실수가 아니었던 잘못들을 반복하지 않을 수 있을지.
여느 때처럼 연말 결산도 새해 목표도 없는 12월의 마지막 날을 보내는 이유는 여전히 그런 고민들이 너무 어려워서이다. 이제야 그때 받은 글자들을 조금 이해할 것 같다. 내년의 내가 조금도 예측되지 않지만 당장 확신할 수 있는 건 눈사람 위로 절대로 성냥불을 붙이지 않겠다는 다짐밖에 없고, 그건 친구를 믿기보다는 내가 그런 사람이라는 걸 믿기 때문이다. 그 정도는 지난 일 년 동안 조금도 어렵지 않았으니까.
스물두 살에도 녹아버릴 눈사람을 끌어안고 살지 않을까? 눈사람이 부서졌을까 봐 꼭 두 시간쯤 뒤에 놀이터로 달려가보던 다섯 살 때나, 올라프가 녹을까 봐 조마조마해하며 겨울왕국을 보던 열한 살 때나, 지금이나, 별로 다를 게 없어. 하지만 올해의 장면이 되어 준 사람들에게는 그런 유한함을 감춘 채 인사를 보냈다. 올해에 처음 배운 것이 있다면 서운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마음도 사랑의 일종이라는 점이었다. 좋아한다는 말을 들으면 나도, 라고 대답하기보다 똑같이 좋아한다고 말해주는 법 역시도.
덕분에 행복했고
내년에도 네 덕분에 행복할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