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산을 좋아한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 따라 많이 다녀보았고, 큼직한 산들은 많이 가본 편이다.
한라산, 덕유산, 오대산, 속리산 등 내로라하는 이름의 명산에 큰 어려움 없이 오른 경험이 있는 나는, 설악산을 올라 본 적이 없다는 생각에 이번 기회에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보고자 했다.
이번에 다른 점이 있다면, 누구와 함께 하는 산행이 아니라 단독산행이었다는 점!
제대로 된 취미생활을 하려면 옆에 누가 함께 해줘야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혼자서도 즐길 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을 한 나는, 혼자서도 산을 오를 줄 아는 여자가 되어보기로 했다.
준비는 철저한 편이었다. 다른 사람들의 블로그를 많이 보고, 코스에 대해 알아보았다. 걸리는 시간, 난이도를 고려했고, 일기예보를 수시로 들여다보았다.
알아본 바에 따르면 한계령-오색 코스는 쉬운 코스는 아니지만 경관이 장관이고 총시간이 10시간 정도 걸리는 코스였고, 등린이라고 자신을 표현한 한 블로거는 (내가 볼 때 그는 아주 겸손한 전문산악가이거나 신이 등산을 하라고 최적절한 신체조건을 하사한 타고난 자이다.) 힘들었지만 웃으며 등산을 마쳤다고 하길래, 나는 등린이는 아니고 등청소년(?) 정도 되니 이 정도 코스는 혼자서도 오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한계령휴게소에서 서북능선,끝청,중청,대청을 지나 남설악탐방지원센터로 내려오는 루트
집에서 새벽 3시 40분에 출발한 나는 굉장히 기대에 차있었다. 하나도 막히지 않는 고속도로를 슈웅 달려 3시간도 안 걸려서 오색주차장에 도착했다.
그러나, 시작부터 심상치 않았다. 오색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한계령으로 택시를 타고 이동한 뒤, 한계령에서 시작하는 코스인데, 원래 주차장 근처에 택시가 몇 대씩 늘어서 있곤 하다는 이곳에 택시가 없었고, 주차장에 주차도 한대도 되어있지 않았다. 내가 1 빠(?)! (멍충아 너 빼고 다들 날씨 때문에 안 온 거라고! 알고 보니 그날 한파주의보가 내려짐. 일기예보는 당일까지 확인하자!ㅠㅠ)
깜깜한 새벽에 혼자 택시를 불러 한계령으로 이동하는데, 택시 기사분도 이상하다고 하신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지고 바람이 세서 그런가 평소보다 사람이 너무 없다고 하시며 대청봉 꼭대기는 영하의 기온일 거라고 나를 걱정하신다.
"그래도 사람이 있긴 하겠죠?"
"그럼요~ 사람은 있을 거예요~ 설악산 대청봉 오르는 가장 좋은 코스를 고르셨네요~ 너무 겁먹지 말고 천천히 쉬면서 올라가세요~"
친절한 택시기사분의 응원을 받으며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6시 40분 등산 시작
날씨가 심상치가 않다. 바람이 너무 세게 불어서 귀에서 귀신소리가 들렸다. 예상치 못한 칼바람에 겁이 덜컥 났다.
'오늘 산에 오르면 안 되는 날인 거 아니야?' (응, 맞아. 이때 이성적으로 판단했어야 했다.)
그렇지만 나는 해지기 전에 하산하기 위해 새벽 6시 40분에 등산을 시작하였기에,
'새벽엔 날씨가 좀 더 안 좋을 수 있겠지. 곧 해가 뜨면 괜찮아질 거야~ 1시간쯤 올라가다가 도저히 안 되겠으면 다시 내려가면 되지~'
라고 생각하며 일단 발걸음을 옮겼다.
여기서 잠깐 딴소리를 하자면, 나는 등산을 좋아하지만, 등산 장비를 제대로 챙겨서 다닌 적이 없다. 방풍재킷? 방풍바지? 울티셔츠? Nope! 그냥 레깅스에 맨투맨, 패딩 입고 막 올랐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내년에 해외에 트레킹코스를 예약해 두었기 때문에, 연습을 위해 적절한 옷가지들을 구매해 두었었고, 오늘 테스트 삼아 입고 나왔는데...
결론부터 말하자면, 등산은 장비빨이 맞다... 그간 장비 챙겨 입고 다니는 사람들을 약간은 오버스럽다고 생각했던 나를 반성한다.
이번 등산에서 방풍재킷과 등산스틱이 없었으면 난 애초에 등산을 시작도 못했거나 큰 부상을 입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울티셔츠 없었으면 얼어 죽었을 지도...
피엘라벤 켑자켓에 무한한 영광을...(피엘라벤 관계자 아님)
다시 돌아와서, 1시간쯤 바람과 추위와 싸우며 묵묵히 올라가며 많은 고민을 했다. 그만 내려갈까? 속초 가서 맛있는 거나 먹고 놀까?
그런데 해가 뜨기 시작하면서 바람이 잠깐 잦아드는 거였다. 호오?? 이 정도면 가도 되겠는데?? (아니야!! 페이크야. 빨리 내려가!)
한 11시까지는 등산을 하다가, 그때 돌아가려고 맘을 먹어도 충분히 늦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나는 계속 걸어 나갔다.
그런데... 한계령 코스는 생각보다 엄청 험했다. 정말 정신 바짝 차리고 가지 않으면 실족사할 수 있을 것 같은 길도 존재했고, 아무리 위험해 보여도, 용기 내어 점프하여 지나갈 수밖에 없는 길도 존재했다.
그 블로거는 대체 뭐지... 등린이라며..!
11월 초반이라.. 아직 단풍의 끝물일 거라 생각했던 나의 가당찮은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설악산은 벌써 상고대가 찾아와 그것도 아주 활짝 피어나있었다.
단풍은 한 잎도 붙어있지 않았고, 이미 하얀 상고대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하산 후 찾아보니, 7일 갑작스러운 기온 하강에 설악산, 한라산 상고대 활짝~!이라는 기사가 눈에 띄었다.)
내가 계절 변환기에 산을 신경 써서 찾아본 적이 없고, 산의 날씨 변화에 대해 크게 신경 써본 적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산을 좋아한다고 하려면 이런 변화에 대해 알고 있는 것도 중요하겠구나.
거의 등산 초반부터 나타난 상고대
그 블로거의 말 중 하나는 정말 사실이었다. 경관이.. 경관이... 정말 말할 수 없이 멋졌다.
한계령삼거리에서 끝청으로 가는 길은 서북능선을 넘는 길이다. 그 능선길에서 보이는 경관은 너무 아름다워 바람이 귓방맹이를 때리고 손이 곱아 휴대폰 꺼내는 것조차 힘들어도 사진을 남길 수밖에 없게 만들었다.
난 왜 사진을 이렇게밖에 못찍는가
이렇게 불친절한 날씨 속에서도 그래도 11시까지 등산을 하다가 안되면 돌아가겠다는 나의 결심은 자꾸 흔들리게 된다.
경관이 너무 좋아서? Nope! 돌아갈 자신이 없어서 ㅡㅡ;;;; 길이 너무 험해서 그 길로 다시 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11시가 넘었는데 나는 아직 끝청에도 도착하지 못하였고, 중청까지 2.6km나 남아 있었다. 여기서부터 돌이킬 수 없는 죽음의 등산이 시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