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혼여행 때부터 옷이며 핸드폰 충전기며 카드며 여기저기 두고 오더니 아직까지 무언가를 들고나가면 빈손으로 들어옵니다. 끝없는 잔소리와 경고에도 도통 고쳐지지 않는 나쁜 습관입니다.
더 화가 나는 것은 잃어버리고도 천하태평한 얼굴과 한없이 긍정적인 태도입니다.
남편: "또 잃어버렸네~ 아이참~ 미안해요~" (방긋방긋)
나: (ㅂㄷㅂㄷㅂㄷ)
수없이 반복되는 분실사건으로 인해 저도 이제 웬만한 걸로는 놀라지 않지만 어제는 주방에서 쓰는 대야가 사라져 간만에 남편을 한참 혼냈습니다.
대야를 도대체 어떻게 잃어버릴 수가 있을까요?
도대체 어떻게...?
대야가 사라진 건 어제.
그리고 대야가 사라지기 하루 전, 남편은 오랜만에 저보다 일찍 퇴근해서 안 하던 주방일을 했습니다.
잘 익은 파인애플을 너무나 좋아하는 남편은 통 파인애플만 사서 손수 손질해서 먹는데, 수박 껍질을 자르듯 매번 파인애플 껍질을 썰어내 대야에 껍질을 담아놓고 바로바로 버리러 갑니다. 껍질 양이 상당해 음식물쓰레기 통에 넣으면 넘쳐버려서 대야를 사용하는데 이 날도 대야에 껍질을 가득 담아뒀다가 버리러 나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뒤로 특별히 대야와 관련된 기억은 없다고 합니다.
추측컨데 남편은 대야에 담긴 파인애플 껍질을 버린 후 대야는 어딘가에 던져두고 경비실 옆에 사는 귀여운 보더콜리 한 마리와 놀았을 겁니다. 분리수거장과 경비실은 바로 옆이고 경비실과 보더콜리는 또 바로 옆에 있거든요. (남편이 음식물쓰레기를 자발적으로 버리러 가는 이유 1)
보더콜리와 놀고 나서 집으로 기분 좋게 걸어왔겠지요? 털레털레 빈손으로.
그리고 집에 와서는 예쁘게 손질되어 있는 파인애플을 먹었겠죠? 아무 생각 없이.
대야가 사라진 걸 발견한 저는 남편에게 분리수거장으로 가보라고 소리쳤지만 대야는 사라진 후였어요.
경비실 아저씨께서 버리셨을 수도 있으니 물어보라고도 해봤지만 보신 적이 없다고 하셨어요.
이제 잃어버리다 잃어버리다 대야까지 잃어버리나 싶어 이번에는 그냥 넘어가면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
A4용지에 '대야를 찾습니다'라고 써서 분리수거장에 붙이고 오라는 극약처방을 내렸습니다.
[분실물을 찾습니다]
분실물 : 대야
분실 날짜: 어제 날짜
분실 위치: 분리수거장 주변
대야를 보신 분은 010-OOOO-OOOO으로 연락 바랍니다.
이렇게 써서 분리수거장에 붙이고 있으니 경비실 아저씨께서 박스테이프로 붙여주시며 도와주셨다고 웃으며 들어오는 남편을 보고 있자니 헛웃음만 나옵니다.
아직 대야와 관련된 연락은 없습니다.
다시 사면됩니다. 다시 사면되는데 왜 이리 짜증이 날까요.
앞으로 다신 이런 일이 없도록 하겠다며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사과하는 남편이지만 대야를 잃어버린 건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일이겠지요. 왜냐하면 또 다른 물건을 어딘가에 놓고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똑같은 분실사건은 없습니다. 매번 다른 물건을 잃어버릴 뿐...
그래도 믿어야죠. 조금씩 고쳐지겠지요...? Please...
저희 남편은 철두철미하고 냉철할 것 같은 인상을 가졌지만 사실은 철두철미, 꼼꼼함과는 정말 거리가 멉니다. 주변에서 남편을 처음 보는 사람들은 실리콘밸리에서 일하다 온 사람일 것 같다고도 했습니다. 굉장히 기계도 잘 다루고 빠릿빠릿하게 일도 잘할 것 같다고 하지만, 저희 남편은 핸드폰도 2G 폰이 최고라고 말하는 기계치에 여기저기 물건을 흘리고 다니는 손이 많이 가는 사람입니다. 저도 이럴 줄은 몰랐습니다. 조금 덤벙되는구나 싶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습니다. 저도 뭔가를 가끔 놓고 오기도 하고 잃어버리기도 하지만 이런 남편 덕분에 저는 더욱 철저해지고 저희 남편은 갈수록 저에게 의지하는 듯합니다. 뭔가가 없어지거나 어디에 뒀는지 기억이 안 날 때는 우선은 제 이름부터 부르고 보는 느낌입니다. 이제는 저도 제 이름을 남편이 부르면 반응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그 대신 "스스로 찾으세요~"라고 답합니다. 이럴 땐 유치원 선생님이 된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