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 맞고 전시 보고 바다 가고 국수 먹고 카페 가고
오늘은 종일 아무 일정이 없는 소중한 토요일입니다. 이른 아침 웬일로 저보다 일찍 눈을 뜬 남편의 인기척에 저도 눈이 뜨였습니다. 순간적으로 평일인가 싶어 출근 준비를 해야 하나?!? 하고 깜짝 놀랐는데 남편이 다정히 안아주며 웃어주어서 주말인 걸 알았습니다. 덕분에 토요일 아침부터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오늘은 주말이야~ 오늘은 토요일이야~ 오늘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날이야~"
마음속으로 흥얼거리며 오늘의 문을 열었습니다. 날씨가 너무나 화창합니다.
얼려놓았던 식빵을 데워 우유와 간단한 아침을 해 먹고 주말에 문을 여는 한의원에 갔습니다. 2주 전 심하게 접질린 발목이 정형외과를 가도 잘 낫지 않아 근처 한의원을 가고 있습니다. 남편은 만성 근육통이 있는데 도수치료를 계속 받아도 잘 나아지지 않아 이참에 한의원에 한 번 가서 침을 맞아보자고 꼬드겼습니다. 침 맞는 걸 싫어하는 남편인데도 순순히 가겠다 하는 걸 보니 근육통이 심한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하고 한의원에 나란히 손잡고 가니 나름 힐링데이트를 하는 것 같아 살짝 들뜨기도 합니다.
나란히 옆 침대에 누워 남편 침 맞는 걸 보면서 저도 침을 맞으니 평소 혼자 침 맞으러 와서 누워있을 때보다 훨씬 재미있습니다. 한의원이 따뜻해서 좋다느니, 근데 침대가 자기 몸에 비해 너무 작다느니, 덩치 큰 남자들은 침대가 작아서 침 맞기 불편할 것 같다느니, 침대가 너무 딱딱해서 엎드려 침 맞으니 너무 아프다느니, 혼자 침 맞으러 한의원을 왔을 때보다 남편이 옆에 있으니 침을 맞으러 온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시간이 더 잘 갔습니다. 같이 다니면 혼자일 때보다 더 정신이 없지만 더 재미있어 무엇이든 같이 하고 싶습니다.
밖에 나온 김에 자주 가던 작은 갤러리에 갔습니다. 갤러리 1층 꽃집 사장님께서 남편을 알아보시고는 화사한 인사를 해주셨습니다.
"남편분이 아내가 리시안셔스 좋아한다고 얼마 전에 사가셨는데 아내랑 오셨네요~"
접질린 발목 덕에 2주간 퇴근하고는 집에만 박혀 지냈는데 답답할 것 같았는지 얼마 전 남편이 하루는 리시안셔스 꽃다발을 사 왔습니다. 꽃집에 간 남편은 만 원 정도 하는 작은 꽃다발이 있는지 물었고 꽃집 사장님은 카네이션을 권하셨습니다. 옆에 있던 리시안셔스를 본 남편은 아내가 리시안셔스를 좋아하는데 리시안셔스를 넣은 꽃다발을 해주실 수 있는지 물었고 꽃집 사장님은 원래는 이만 원이지만 만 오천 원에 작은 리시안 꽃다발을 만들어주겠다고 하셨습니다. 남편은 예쁘게 만들어주셔서 감사해서 10프로만 깎아주시는 걸로 하고 만 팔천 원 결재해달라고 했습니다. 꽃집 사장님은 그럼 포장을 더 더 이쁘게 해 줘야지~하시며 꽃다발을 더 만져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꽃집 사장님은 남편을 바로 알아보셨나 봅니다. 덕분에 저도 기분이 좋아졌습니다.
갤러리에서 하는 작은 사진전을 보았습니다. 저는 부산 영도에 사는데 영도 자체를 주제로 하는 전시회나 영도를 배경으로 하는 사업, 활동들이 요즘 부쩍 많아져 주말마다 동네 여기저기 구경 가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오늘 본 사진전도 영도의 여러 풍경들을 찍어놓은 사진들이어서 "여긴 영도다리네! 저긴 어디지?" 하며 알아맞히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흰여울길을 지나 국숫집으로 가는데 화창한 날씨 덕에 바다가 심하게 반짝입니다. 차를 잠깐 세우고 절뚝이는 다리로 조금 걸어보았습니다. 저는 걸음이 정말 빠른 편인데 2주 넘게 반깁스를 하고 절뚝절뚝 걷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당분간 느리게 걷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느리게 걷는 것이 생각보다 좋았습니다. 앞만 보고 호다다닥 가는 것보다 옆에서 나는 벌과 나비를 보며 천천히 걸으니 마음도 편해지고 여유도 찾아오는 것 같았습니다. 딱히 바쁜 일이 없다면 앞으로도 천천히 걸어보아야겠습니다. 오늘도 바다를 보며 천천히 걸으니 그 어떤 순간도 이렇게 여유로울 수 없습니다.
동네 골목길 구석에 있는 국숫집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동네에서 제일 좋아하는 카페로 갔습니다. 골목길 사이 주택가에 있는 작은 카페인데 정원에 푹 빠진 사장님께서 운영하고 있어 다양한 종류의 화분들과 정원을 커피와 함께 즐길 수 있는 소중한 공간입니다. 정원, 꽃, 풀 등에 대한 서적과 그 외에 다양한 분야의 책들이 잔뜩 있어 아무것도 안 들고 가도 커피와 하루 종일 머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날씨 좋은 주말이라 그런지 자리가 거의 없었지만 제일 구석 큰 테이블에 다른 손님들과 함께 앉아 커피를 마실 수 있었습니다. 북적북적해도 워낙 분위기가 좋은 곳이라 그런지 사람들의 말소리도 카페 공기에 어우러져 커피맛을 더했던 것 같습니다. 딱 주말 오후 같았어요. 여유롭고 잔잔합니다.
사장님께서 공들여 꾸며놓으신 정원을 구경하고 늦지 않게 나와 집으로 향했습니다. 별다른 일정이 없는 주말의 시작이었는데 하나하나 하다 보니 알차디 알찬 주말이 되었습니다.
저녁에는 또 무엇을 할까요? 설레는 주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