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나’는 ‘나’
엥? 얼굴에 웬 사과? 기이하다. 그런데 흥미롭다. 얼굴을 사과로 가린 이유가 뭘까? 중절모를 쓰고 검은색 양복을 입은 멋쟁이 신사일 것 같은데 얼굴은 비공개다. 그래서 더 궁금증을 자아낸다. 왜 가렸을까? 누가 보면 안 되나? 가려야만 하는 이유가 있나? 유명인이세요? 이날 얼굴은 보여주기 싫었어요? 아니다. 누구나 한 번쯤 봤을 작품, 그 유명한 화가 마그리트다. 이런 차림의 신사가 등장하는 그림들이 많았는데 그때마다 얼굴을 가렸었다. 사람을 볼 때 가장 먼저 보게 되고 궁금한 얼굴을 가린 이유도, 하필이면 사과인 이유도 있을 거다. 사과를 조금만 치워도 얼굴이 보일 것 같은데 눈이 보일 듯 말 듯 가려져 있다. 위에 큰 사과나무가 있어 그 순간 딱 사과가 떨어지며 얼굴을 가리지는 않았을 거고. 왜 하필 사과일까? 뉴턴이 생각나기도 하고. 손쉽게 볼 수 있는 과일, 사과에 얽힌 이야기가 있을까? 이 그림엔 그만의 특별한 이유가 곳곳에 숨겨져 있는 것 같아 더 참을 수 없다. 샐러리맨일까? 연례행사에 참여하는 차림일까?
그의 그림은 하늘이 배경이었던 적이 많다. 이 그림도 역시나 하늘이 보인다. 맑고 깨끗하기보단 회색빛이 도는 하늘이다. 걱정이 있어 안개가 낀 걸까? 강 앞에 서 있는 모습 같다. 미묘하게 다른 색인 하늘과 강물이 이어졌다. 하늘과 강을 배경 삼아 정장 차림으로 벽돌 난간 앞에 어색하게 서 있다. 경직된 어깨와 부자연스러운 팔을 보니 갑작스레 사진을 찍는 걸까? 그림만 봐서는 도통 모르겠다. 자화상이라는 걸 알고 보니 그림 속 남자는 화가 자신인데 그럼 자신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기 위함일까? 이 의도였다면 성공이다. 이 작품도, 이걸 그린 화가도 궁금해 미치겠다. 어떤 사람일까?
이 그림을 보고 있으니 “니가 왜 거기서 나와?”가 절로 나온다. 사과로 얼굴을 가린 이유가 뭘까? 뒤편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상상력을 자극한다. <Man in a Bowler Hat>라는 작품에서는 새로, <The Lovers>에서는 천으로 얼굴을 가렸다. 얼굴에 담배 파이프도 두고, 얼굴을 떼어도 봤다가 엄청나게 키워도 보고 난리다. 해보고 싶은 건 다 해보셨군요. 작품을 보는 사람의 상상력에 맡겼다. 궁금해서 르네 마그리트의 실제 얼굴도 찾아보았다. 아, 저렇게 생기셨구나. 정장을 갖춰 입고 점잖은 모습이 상상했던 모습과 비슷했다. 생각보다 인자한 웃음이었다.
<사랑의 노래>라는 ‘조르조 데 키리코’ 작품이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데 이 작품에 나오는 초록색 공이 뇌리에 박혀 초록색 사과를 그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얼핏 보면 초록색 사과와 비슷해 보인다. 아니면 선악과를 상징해 ‘사과’를 그렸을까? 뉴턴의 만유인력의 법칙의 ‘사과’를 떠올렸을까? 이론, 법칙이 우리 눈을 가려 새로운 것 또는 깊숙한 본질은 보지 못한다는 걸 표현한 걸까? 뭔가 눈을 가려 통념과 편견에 휘둘리는 사람을 표현한 것 같기도 하다.
<골콩드> 작품도 그렇고 마그리트 그림 속 남자들은 저 시대 때 남자들이 입은 옷차림을 표현한 것 같다. 실제로 <사람의 아들>은 자화상이기도 하고 마그리트가 저렇게 자주 입었단다. 그럼 왜 <사람의 아들>일까? 누구나 저렇게 입었다는 의미로 평범한 우리 모두를 표현한 걸까? 평범한 남자이기 전에 누군가의 아들이라는 의미가 포함된 걸까? 이유를 찾아봤으나 알 수 없었다. 그저 남겨진 우리는 그의 작품을 보며 추측할 뿐이다. 마그리트는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작가다. 그의 작품들은 그냥 슥 하고 지나칠 수 없다. 생각하게 만들고 싶었다는 그의 의도는 그대로 들어맞았다. 우리는 아직도 그의 작품을 보며 생각하고 있다. 그의 손끝에서 탄생한 작품들은 여전히 우리가 생각하는 걸 멈추지 않게 만든다.
“나는 나의 작품을 단순히 보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게 만들고 싶다.”
- 르네 마그리트 -
벨기에가 낳은 천재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작품은 많이 알려져 있다. 나도 제목은 잊고 있었지만, 중절모에 검은색 양복을 입은 수많은 신사가 비처럼 떨어지는 그림과 공중에 뜬 돌섬은 참 신기하게 봤던 기억이 또렷하다. 역시 초현실주의 작가라 그런가 말도 안 되는 상상을 많이 그렸구나. 저런 생각은 어떻게 하는 걸까? 신기해서 눈이 가고 한 번 보면 뇌리에 콕 박히는 그림을 그린 작가라 생각했다. 좀 더 궁금해 르네 마그리트의 삶을 엿보았다.
<골콩드>도 그렇고 중절모를 쓴 남자들을 많이 그린 이유는 튀고 싶어 하는 많은 예술가들과 달리 평범하게 살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중절모를 쓴 남자의 익명성에 자신을 투영했다고 한다. 평범한 옷차림의 그들이 나인 것 같기도 하다. 그림을 보는 우리도 이렇게 투영해볼 수 있다. 또 그의 개인사가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오랜 우울증으로 집 근처 강에 뛰어들어 운명한 어머니의 영향을 받았다는 말도 많았다. 심한 우울증에 빠진 어머니가 어린 그와 형제들을 방 안에 가두기도 했고 물 위로 떠 올랐을 때 어머니의 마지막은 흰 레이스 잠옷으로 얼굴이 가려져 있었단다. 어린 나이에 그 모습을 직접 봤다니 큰 정신적 충격을 받았을 것 같다.
<연인들>을 보면 남녀의 얼굴이 베일에 싸여있다. 어릴 적 트라우마가 나타난 것일 수도 있고 연인들의 사랑을 베일에 싸여있다 표현한 것일 수도 있겠다. 차가운 색감에 으스스한 분위기를 내는 듯해 정열적인 사랑과는 거리가 먼 것 같기도 하다. 서로를 삼킬 듯 갉아먹는 사랑을 표현한 걸까? 어쩌면 그가 파이프를 그리고는 밑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고 쓴 <이미지의 반역>처럼 이건 사랑이 아닐 수도 있겠다. <꿈의 열쇠>에서 사물을 그리고는 밑에 전혀 다른 이름을 적어둔 것처럼 ‘모순’을 표현하고 싶었던 걸까? 다 내 추측일 뿐 작가의 생각을 알 수는 없었다. 유명한 평론가들도 서로 논쟁할 뿐 의견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는 걸 보면 분석하는 게 뭔 의미인가 싶기도 하다. 초현실주의 작가들은 이성을 배제하고 손이 가는 대로 ‘자동기술법’을 사용하여 그리기도 했으니 그림을 보는 우리만 박 터지게 머리 싸매고 고민하는 거겠다. 사실 작가는 의도한 게 아니라 마음 가는 대로 무의식의 세계를 나타낸 것인데 우리만 심오한 뜻이 있을 거라 지레짐작하는 건 아닐까? 그림에서도 문제를 찾고 정답을 찾으려고 하고 있네. 그래도 궁금하긴 하다.
데페이즈망 기법으로 전혀 관련 없는 엉뚱한 것들끼리 조합해 어울리지 않는 공간에 두거나 왜곡시켰다. 그의 작품이 초현실주의고 그가 곧 초현실주의다. 우리에게 친숙하고 일상적인 사물로 어쩜 저런 작품을 만들었을까? 그의 시선은 새롭다. 남다르다. 이에 대중매체의 많은 영역에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사과는 비틀즈의 사과 앨범에 영감을 주었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 ‘천공의 성 라퓨타’의 성이 <피레네의 성>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찾아보니 이 외에도 시대를 풍미한 작품들 중 마그리트로부터 영감을 받은 것이 참 많았다. 그의 그림은 신비한 분위기를 풍긴다. 특이함에 끌려 더 찾아보고 싶게 만든다.
“제 작품이 전하려는 것은 한 편의 시라고 말하겠습니다.”
- 르네 마그리트 -
그는 계속 그림이 ‘시’라는 말을 했었는데 왜 시를 생각했을까? 그러고 보면 짧은 표현들이 만들어내는 언어유희의 매력이 그림에도 느껴진다. 매번 틀에 박힌 생각을 깨부순다. 이렇게 볼 수도 있나? 기발하다. 그가 제시하는 관점으로도 보고 싶어진다. 새로운 시선으로 보는 그의 눈이 부럽다. 그의 시선 끝엔 그의 철학이 있었다. 우리는 그의 그림을 궁금해하다 생각을 시작하고 끝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내가 바로 마그리트 그림이야.’라고 한껏 개성을 드러내는 그림들을 보며 그의 생각들에 감탄했다. 그의 그림은 한 편의 시였다.
초현실주의 작가라지만 현실적인 작품 같기도 하다. 환상적이라지만 철학적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 세계는 알다가도 모르겠다. 아이들의 엉뚱한 상상이 르네 마그리트를 닮은 듯도 하다. 아이들이 “이게 뭐람?” 싶은 작품을 작품이라 내놓아도 미래의 르네 마그리트라 생각해야겠다. 신기하고 환상적인 작품으로 우리는 새로운 시선을 얻기도 하니.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은 화가들은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라는 단편적인 내 생각을 꾸짖었다. 그림만 그리는 게 아니다. 화가도 시인이고 철학자였다. 하나의 그림을 그리는 데도 많은 생각과 고민을 거쳐 영감을 얻고 그걸 그림이라는 매체로 표현한 것이었다. 표현한 방법이 달랐을 뿐이지 모두 사색의 순간이 쌓여 탄생했다. 갑갑할 수도 있는 사색을 통해 이런 철학적인 작품들이 탄생하지 않았을까? 어쩌면 마그리트는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자기 생각을 표현하기 위해 그림이란 수단을 썼던 것 같다. 화가에게는 그림 자체가 목적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그를 보니 미술도 시도 철학도 다 예술 같다. 그림만 예술이 아니다. 모든 것이 예술이 될 수 있고 예술은 또 그 시대를 대표하는 문화가 된다. 나는 예술인이 아니야. 예술은 나랑 거리가 멀어. 미술관 가는 거 안 좋아해. 전시회는 고리타분해. 그림 볼 줄 몰라. 그렇게 말하지만 사실 모두가 함께 예술을 향유하고 있다. 방법은 달라도 모두 예술이다. 곳곳이 문화예술 공간이다. 가수 싸이의 “예술이야” 노래가 떠오른다. 다 예술이다. 예술 같다. 우와 소리가 절로 나오는 그의 그림들을 보고 있으니 나도 예술에 살짝 발을 담근 기분이다. 철학적으로 사유하고 싶어진다. 환상과 현실 사이를 오가며 자유롭게. 신비로운 무의식 세계에서.
<사람의 아들> 작품은 얼굴을 사과로 가린 덕에 그 사람의 표면적인 얼굴에만 집중하지 않게 된다. 물론 저 사과에 가린 얼굴이 궁금하기도 하지만 왜 가렸을까? 생각하다 보니 자기 내면을 바라봐주길 원한 거겠다 싶다. 내 겉모습만 보고 날 판단하지 마세요. 더 깊은 내 모습도 알아봐 줬으면 하는 마음에서. “껍데기 말고 내 마음을 봐줘!” 하는 듯하다. 그가 사용한 사과, 베일 등이 나는 가면으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모두 때에 따라 가면을 쓰기도 한다. 직장에서도 누군가와의 관계에서도 ‘나는 이런 사람이어야 해.’라는 생각으로 나를 바꾸기도 한다. 맞춰주기 위해 나를 그 모습에 끼워 맞춘다. 그렇게 틀에 맞추며 나는 깎여 나간다. 어쩜 날 설명하고 이해시키기보다 날 바꾸는 게 더 편해서? 내가 생각해도 가면을 쓴 내 모습이 더 좋아서? 누구나 남들에겐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 있다. 남들이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이러하면 좋겠다는 소망도 있다.
그래도 ‘나는 이런 사람이야.’ 있는 그대로 보여줄 수 있으면 좋겠다. 전부는 아니더라도 내 있는 그대로의 모습 편안히 내보일 수 있는 사람 단 한 명이라도 있으면 좋겠다. 매 순간 나를 바꿔가며 사는 건 힘들고 지치는 일이니. 설령 그렇게 바꿔야만 해 바뀌었더라도 나를 잃었다고 슬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기억하면 좋겠다. 내가 원했든 원하지 않았든 진실이든 아니든 바뀐 '나'도 '나'라는 것을.
이미지 출처
[나무위키] 사람의 아들 [The Son of Man]
[나무위키] 르네 마그리트 [Rene Magritte]
[네이버 지식백과] 사랑의 노래 [The Song of Love]
[나무위키] 골콩드 [Golconde]
[나무위키] 연인들 2 [The Lovers II]
[네이버 지식백과] 이미지의 반역 [The Treachery of Images]
[나무위키] 피레네의 성 [The castle in the pyrene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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