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를 담아
프랑스 파리 출생 화가 미셸 들라쿠르아는 자신이 살아온 파리를 배경으로 작품을 그렸다. 1933년생인 작가는 <그 시절의 PARIS>라는 이름으로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 프랑스의 가장 아름다웠던 시기인 벨에포크 시대를 그렸다. 이 시기는 산업혁명을 거쳐 프랑스 파리에 풍요가 깃들고 예술과 문화가 번창하면서 평화를 구가한 시기라고 한다. 즉, 그의 어린 시절 그때의 파리를 그렸다.
그가 오랫동안 그려온 그림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림에서 평화로움과 여유로움, ‘행복’이란 말이 떠올랐다. 모두 자신이 살아온 곳 파리의 옛 모습을 따뜻하게 담아냈다. 내가 본 현대 파리의 모습과는 다르나 내가 본 파리의 모습도 보이는 듯해 다시 보는 것 같아 좋았다. 나 저기 갔었는데 저 때도 있었구나. 저 건물 이름이 뭐였지? 괜스레 있는 추억도 없는 추억도 떠오르게 만드는 그림이었다. 가족이든 연인이든 사람들이 함께 있다. 같은 곳을 바라보거나 손을 마주 잡고 있거나 안고 있는 그림이 많았다. 지금껏 자연의 모습을 그린 그림만 많이 보고 좋아했는데 도시 파리의 건물 굴뚝들이 내뿜는 연기조차 아늑하게 느껴졌다. 그때의 행복했던 파리의 장면들을 보며 이건 그림을 넘어 역사적 기록으로 남겠다는 생각도 든다. 굴뚝에서 뿜어져 나와 구름이 될 것 같은 연기, 달그락 말발굽 소리가 정겨운 마차, 고풍스러운 옷차림, 복작복작 아기자기한 건물들 이 사실적이고도 현실적인 파리의 모습을 이렇게나 세세히 담아냈다. 옛 파리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영화 속 모습 같았다.
내가 살아온 곳, 내가 살고 있는 곳을 계속해서 그린다는 게 어떤 의미일까 짐작해보았다. 유년 시절 기억 속 그리웠던 파리의 모습을 추억하며 그렸을까? 그가 그린 그림을 보면 저 시절을 보낸 사람은 추억을 떠올릴 수 있겠다. 다시 떠올리고 싶은 추억이 있다는 것, 지금 이 순간도 새로운 나날과 함께 꽃 피어날 추억으로 쌓아 올릴 수 있다는 게 큰 의미로 와닿았다. 그때의 내 모습도 그때 내 곁의 사람과 함께했던 시간도 그립다. 그리워할 것은 쌓이고 또 쌓여 평생을 뭔가를 그리며 사는 것 같다. 이 시절에 살았던 것도 아닌데 이 그림을 보며 향수를 느낀다. 각자 그리는 대상, 그리움이 향하는 곳은 달라도 향수를 느끼는 사람들이라면 이 그림을 보고 그 그리움에 평안을 얻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림을 보자마자 느낀 몽실몽실한 기분이 좋았다. 진짜 곧 크리스마스구나. 설렘과 함께 탄성을 자아냈다. 그림에 많은 사람이 등장한다. 이 중에서도 나는 크리스마스트리를 가리키며 함께 보고 있는 부부로 보이는 두 사람과 어린 자녀가 눈에 띈다. 뒤에 강아지는 반려견일까? 나뭇가지 하나하나에 눈꽃이 피었다. 섬세한 붓 터치로 이렇게 자세히 표현했구나! 돋보기로 그림을 보는 것 같았다. 그의 그림은 공통적으로 사람이 많이 등장한다. 이 그림에도 역시나 많은 사람들이 보였고 작지만 두 눈 크게 뜨고 자세히 살펴보게 되었다. 무엇을 하고 있나? 무엇을 보고 있나? 살펴보고 숨은그림찾기 하듯 찾아내는 게 이 그림의 재미였다. 가족이 함께 도시 중앙 거리에 설치된 예쁜 트리를 보며 기분 좋은 크리스마스를 기대하는 것 같아 나도 함께 설렌다. 겨울, 크리스마스 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이 그림을 보자마자 확 몰려온다.
Noel의 뜻이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크리스마스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럼 이 작품은 크리스마스! 크리스마스! 외치는 것이었구나! 다른 그림도 찾아보니 이 그림과 비슷한 그림이 많았다. 파리에서 나고 자란 그는 파리의 모습을 모두 보았고 그것을 그림으로 옮겨 담았다. 크리스마스트리 뒤 중앙 통로를 따라 시선을 옮기면 뒤에 큰 건물이 보인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일까? 그곳에 있지 않은 나도 이 공간에 함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니 저절로 한 편의 동화가 그려진다.
하얀색이 주는 느낌이 좋다. 하얀 눈 세상이 차가워야 하는데 오히려 포근하게 느껴진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기분이라 그럴까? 창밖에는 온 세상이 하얀 눈으로 덮여 하얀 동화 세상 같고 거실에 온 가족이 둘러앉아 따뜻한 난로에 몸을 녹인다. 알록달록 반짝 빛을 내는 예쁜 크리스마스트리 아래 빨간 리본으로 묶은 선물상자를 풀며 만끽하는 크리스마스가 떠올라 한껏 기대하게 된다. 어떤 선물이 안에 들었을까? 내가 원한다 노래를 부르던 그 선물이 있을까? 아이의 마음으로 이 그림을 보게 된다. 크리스마스 분위기 물씬 나는 이 그림을 보니 크리스마스 캐럴이 귓가에 맴도는 것 같다. 동화 속 한 장면 같은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은 마음이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인상 깊었던 크리스마스 선물이 있다. ‘악동 테리에’라는 한 권의 책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나 어렸었는데 여전히 산타클로스의 존재를 믿었던 나는 이번에는 산타 할아버지께서 어떤 선물을 주고 가실까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아침 일찍 눈을 뜨고 제일 먼저 확인한 머리맡에는 처음 보는 한 권의 책이 있었다. 달랑 책 한 권? 조금 실망스러웠다. 내가 원했던 건 아마 크고 폭신한 인형, 예쁜 장갑 같은 거였던 것 같다. 게다가 책 제목과 책의 표지 그림은 너무나도 마음에 안 들었다. 왜 얻어맞은 듯이 눈에 든 멍에 악독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아이가 그려진 책을 선물로 주셨을까? 너무하다고 원망했었다. 크리스마스 아침부터 떨떠름하니 울상인 내 얼굴을 보고 엄마·아빠가 나를 놀리셨다. “너가 올해 말을 안 듣더니 엄마·아빠 말 좀 잘 들어라고 그런 책을 선물로 주셨나 보다. 여기, 표지 너 아니야? 00이가 여기 표지에 있네!” 분한 마음에 그 자리에서 바로 크게 울었다. 나는 분명 착하게 살았고 엄마·아빠 말도 잘 들었다며 분개했다. 그때 나는 고집 세고 말 안 듣는 말썽쟁이였나 보다. 이 책 선물로 말 잘 듣고 착하게 크길 원하셨던 엄마·아빠의 장난이었지만 그냥 서러운 마음뿐이었다. 기대하지도 않았거니와 조금 펼쳐보다 인상도 험악하고 주먹질까지 하는 테리에를 보고 이게 뭐람 하곤 그 책은 찬밥이 되었던 것 같은데 지금도 집 책장 어딘가에 꽂혀있을 이 책을 꺼내 읽어봐야겠다. 우리 반 악동의 마음도 이 책으로 알아볼 겸 말이다.
요즘 눈이 펑펑 내리며 새하얗게 변한 세상이 너무 예쁘다. 아침에 길을 나서면 정말 하얀 눈밭이 겨울왕국 같아 이보다 더 예쁜 크리스마스트리는 없을 것 같다. 온 곳에 크리스마스트리보다 예쁜 나무들이 하얀 눈에 덮여 이제 진짜 겨울이구나 연말이구나 곧 크리스마스구나! 너무 예뻤다. 아이들과도 이렇게 찾아온 겨울을 기념하며 교실을 꾸몄는데 모두 설렘 한가득 기대에 부푼 듯했다. 우리 반은 아침에 잔잔한 크리스마스 캐럴 피아노 버전을 틀어 놓고 아침 활동을 하기도 하고 미술 시간, 창체 시간에는 겨울, 크리스마스로 반을 한껏 꾸미고 있다.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으며 따라 부른다. ‘겨울’ 하면 떠오르는 노래 알아보기 시간도 가졌는데 대부분의 크리스마스 노래를 아이들이 알고 있었다. 역시 명곡이니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노래라 아이들도 알고 있는 듯했다. 지금은 캐럴 시즌이다. 집에서도 일을 할 때나 그냥 아무것도 안 할 때도 크리스마스 캐럴을 틀어놓고 흥얼거리는 내 모습을 보니.
크리스마스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 크리스마스에는 무얼 하며 보내나? 가족들과 보내거나 친구들을 만나 홈파티를 하며 보내는 것 같다. 12월 초부터 SNS는 한창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가득 채워졌다. 12월이 되자 지인들과 주말마다 크리스마스 파티를 여는 사람도 보였고 친구를 만나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고받으며 연말을 만끽하는 사람도 보였다. 역시 연말이 물씬 느껴졌다. 나는 크리스마스에 무얼 하며 보낼까? 나는 사실 나이가 들수록 크리스마스에 그렇게 큰 기대나 설렘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또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며 설레는 우리 반 아이들을 보니 나도 덩달아 설레는 것 같다. 우리 반 시집 출간 전시회에 쓸 긴 레드 카펫을 배달받아 들고 옮기니 내일 뭐 해요? 혹시 선생님 우리 선물이에요? 선생님 뭐 준비하죠? 그거 트리죠? 우리 크리스마스트리 만들어요? 나에게 무언가 기대하는 눈빛으로 묻는 탓에 부담이 되다가도 그럼 한 번 해봐? 또 새로운 일을 벌이며 아이들과의 마지막 시간을, 특별한 연말을 준비하고 있다. 이제 마지막이라는 것이 실감 나며 어떻게 우리의 지금을 더 예쁘게 추억할 수 있을까 고민한다.
특별한 선물이나 많은 지인들에 둘러싸인 크리스마스는 아니지만, 크리스마스가 지나가면 금세 2023년이 될 것 같아 아쉽기도 하지만 그래도 기다려진다. 크리스마스는 새하얀 눈 이불처럼 폭신하다. 열심히 달려온 올 한 해 수고 많았다고 스스로를 토닥이고 옆 사람을 포근하게 안아주며 다가올 내년을 기대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의 의미가 남다르듯 크리스마스는 없던 동심도 자극하는 날인 만큼 어른이에게도 올해를 따스하게 돌아보며 기념하는 날이 되었으면 좋겠다. 소중한 사람과 따뜻함을 느끼며 오순도순 보내는 크리스마스가 되길.
글자국 하나하나가 모여
의미 있는 메시지가 되기를 바라며
-오늘도 현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