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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워너비 아티스트 Oct 04. 2022

인생 취미, 그 두 번째인 꽃꽂이

완전 노골적인 꽃 광팬이 되었다. 특히 창작의 매개체로서의 꽃은 나를 설레게 한다. 꽃을 가득 꽂은 화병을 방 한쪽에 놓아두고 나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눈으로 하트 광선을 발사한다. 이런 내가 나도 웃기다. 


좀 신기한 것은 사십 대 중후반으로 넘어오면서, 나의 친구들이 모두 꽃순이가 되었다는 것이다. 소싯적엔 꽃에 시큰둥했다. 매체에서 보이는 꽃이 전달되는 장면들이 전부 형식적이고 가식적으로 보였다. 축하할 일이 있을 때, 또는 위로가 필요할 땐, 삼겹살에 소주 한 잔이 훨씬 진실하게 느껴졌다. 그러던 내가 요즘 식물로, 꽃으로 마음을 온통 빼앗겼다.


네덜란드에 오니 한국에서 못 보던 색다른 꽃들이 많았다. 아니, 그냥 어디에나 꽃이 가득하고, 착한 가격이었다. 거기에 수많은 미술관, 그 안엔 반드시 더치 정물화가 있어, 이미 아름다운 꽃을 더욱 신비롭게 표현한 옛 마스터들의 색과 형태의 향연을 여한 없이 감상할 수 있었다. 그래서일까, 취미로 그림을 그렸었다. 꽃을 쳐다볼 때 내 안에 일어나는 감정의 변화를 내 손으로 표현해보고 싶었는데, 모든 그림이 다 어렵지만, 특히 꽃을 그리기는 정말 힘들었다. 



실감 나는 꽃을 그리기도, 뭔가 개념적인 추상화로 표현하기도 힘들었던 그림의 추억. 그래도 언젠가는 다시 도전해 보고 싶다.


이렇게 꽃에 노출이 지속적으로 많아진 네덜란드에서도 꽃꽂이란 취미는 내게 바로 오지 않았다. 비교적 꽃 가격이 착하지만, 여전히 내가 나를 위해 꽃다발을 사는 행위가 사치스럽게 느껴졌다. 일주일 행복하게 쳐다보기 위해 이삼만 원 쓰기 퍽퍽했던 정서상태였을까. 게다가 특이하게 여긴 꽃이 많은 것에 비해 꽃꽂이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다. 플로리스트는 꽃가게 사장님이지 꽃을 통해 창작하는 사람이랑은 좀 거리가 먼 느낌이니까. 


열심히 가드닝을 한 대가로 정원에 꽃이 좀 많아진 2020년의 여름, 나는 deadheading 이란 걸 배웠다. 목을 쌍둥 자르라는 뜻인 deadheading 은 그야말로 시들기 시작한 꽃대를 잘라주는 가드닝 기법이다. 꽃이라는 존재의 미션이 생식활동을 거쳐 2세인 씨를 생산하는 것이기에, 수정이 되어 씨가 생기기 시작하면, 그 식물은 조만간 영업 마감하고 시들어 버리게 된다. 그야말로 미션 완료이니까. 그러나 꽃을 계속 잘라주면, 식물은 아직 씨를 생산해야 된다는 사명감에 계속 꽃을 피우는 것이다. 이걸 지속해 주면 꽃 피는 기간을 몇 주 혹은 몇 달 연장시킬 수가 있다. 모든 꽃이 이렇진 않지만 많은 꽃들을 이런 방식으로 더 오래 즐기는 것이다.


꽃은 절대로 꺾으면 안 된다고 세뇌당해 온 지라 deadheading 은 그 이론이 합리적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하려니 의지가 필요했다. 나는 마음 다잡아가며 만개해 원숙해지는 꽃들을 쌍둥 쌍둥 자르기 시작했다. 자르는 건 그래도 하겠는데 버리기까진 차마 할 수가 없어 이렇게 모인 꽃들을 물병에, 유리컵에 꽂아서 식탁에 올려놓은 게 나의 꽃꽂이의 시작이었다. 정원에서 데려온 식물들을 집안의 컬러와 분위기를 위해 이리저리 배치하는 행위가 마치 뭔가 전통 있고, 기품이 느껴져 좋았다. (물론 예산도 착하다.)


이렇게 가드닝과 꽃꽂이의 시너지는 시작되었다. 이 기쁜 경험에 흥분해, 처음엔 하루에 두 번, 정원을 순찰하며, 어떤 꽃이 피었고, 어떤 꽃을 잘라줄지, 어느 꽃밭에 손길이 필요한지 체크를 했다. 이렇게 매일 정원에서 시간을 보내며 계절의 변화와 그로 인한 다양한 꽃들의 출몰을 눈으로 확인하고, 때로는 애타는 기다림을, 때로는 아쉬운 이별 같은 감정을 느낄 수도 있었다. 양동이 한가득 꽃을 모아서 꽃꽂이를 할 땐, 제일 좋아하는 음악을 크게 틀고 설레는 마음으로 시작했다. 어떨 땐 미리 머릿속에 계획을 갖고 꽃을 꽂았고, 어떨 땐 그냥 손 가는 데로 자신을 내버려 두었다. 꽃꽂이는 미각만 제외한 오감을 총동원하게 한다. 게다가 잘하기가 쉽지 않아 도전하는 맛이 있었다. 점점 내 삶에서 너무 큰 즐거움과 탐구의 대상이 되어가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꽃꽂이의 환상적인 세계로 나를 인도하신 저명한 저자들과 그들의 책을 소개 안 할 수 없다. 여기의 좋은 책들 덕분에, 나는 꽃을 꽂으면서 서양의 정물화와 조각을 생각하고, 색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완벽한 아름다움의 결정체인 꽃들을 고스란히 예술적 매개체로 쓴다는 것이 얼마나 사피이자 행운인지 알게 되었다. 물론 그 어려운 걸 그림으로 그리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과 함께. 


Erin Benzalein

그녀를 앞의 글 '막막한 일을 시작하는 방법'에서 언급했었다. 내가 가드닝에 입문하던 시절, 꽃을 키우는 즐거움, 좁은 땅에서 많은 꽃을 키우는 법에 대한 노하우를 전파한 사람이었으니까. 그런데 사실 그녀의 책 중 가장 성공적인 베스트셀러는, 꽃꽂이에 관한 책이다. 그녀의 사업의 핵심은 화훼임에도 말이다. 그녀의 꽃꽂이 책을 소개하겠다. 


Floret Farm's A Year in Flowers - Designing gorgeous arrangements for every season

책으로써 갖추어야 할 진(정성), 선(유용함), 미(아름다움)를 다 갖춘 책이다. 더욱 아름다워진 사진은, 이번엔 남편이 찍었단다. 책을 보면 그녀가 자기만의 노하우를 얼마나 활용성 높은 콘텐츠로 구성해 내는지 감탄하게 된다. 또한 그녀는, 화훼 농업, 플로리스트리, 온라인 강사, 베스트셀러 저술, 소셜미디어 마케팅, 사업 등, 연결된 분야들을 모두 굉장히 잘하고 있다. 읽다 보면 위에 언급된 모든 것들이 거미줄처럼 연결이 되어 있어서 결국 다 마스터할 수밖에 없겠다는 결론을 얻는다. 아무튼 이 책은 예술로서의 꽃, 그리고 비즈니스로서의 꽃에 대해 모두 너무 잘 다뤄주고 있다. 너무나 아름답고 감탄할 만한 꽃꽂이 사진들과 함께. 


이 책들은 보이는 순서대로 읽으면 좋을 듯싶다. 책 속 사진들이 워낙 훌륭해 그림만 봐도 그 값을 충분히 한다. 


Kiana Underwood

이란 태생으로 미국에서 십 대부터 살았던 그녀는 외교관을 꿈꾸며 명문대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아이들을 셋 나으면서 5년간 일을 중단했고 다시 새로운 뭔가를 찾아야 했다. 이때 그녀는, 남편의 권유로 플로리스트가 되었다. 어떤 플로럴 교육 과정도 거치지 않았고 자격증도 없지만 어릴 때부터 보아 온 할아버지의 정원과 가족들이 꽃으로 집안을 장식하던 안목에서 영향을 받아 자기만의 스타일을 갖게 되었다. 지금은 대표적인 럭셔리 웨딩 플로리스트로 꽃값 예산만 $100,000 이상이어야 그녀를 고용할 수 있다고 알려진, 업계에서 매우 부러워하는 스타 플로리스트다. 


Color Me Floral - Stunning monochromatic arrangements for every season

계절별(4계절), 칼라별(10개 칼라)로 총 40개의 꽃꽂이 작품을 선보인 이 책은, 적어도 내겐 꽃꽂이에 관해 본 책중 현재까지 으뜸이다. Monochomatic이란, 한 가지 칼라로 통일시킨 꽃꽂이를 말하는데, 그럼에도 표현해 낸 색의 향연을 보면 전혀 단순하지 않고 기발하다. 그녀의 꽃꽂이는 풍성하고, 고전적이면서도 '앗, 어떻게 저런 생각을!'이라고 느끼는 지점들이 늘 있어서 배울 것이 많다. 칼라의 배색에 있어서 그녀는 정말 누구보다 뛰어난 재주를 갖고 있다. 



Christin Geall

그녀는 가방끈이 길다. 대학에서 생태학과 인류학을 공부한 뒤 영국의 Kew에서 원예를 배우고 이후엔 글쓰기 석사를 했다. 마음 가는 대로 공부를 하고 스코틀랜드의 고성에서 florist in residence (거주 플로리스트), 가드닝 포털의 칼럼니스트로 일한 경력 등을 보면 그녀는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이고, 학자 + 작가 + 예술가라고 보는 게 맞을 듯싶다. 


Cultivate - The elements of floral style

앞의 두 책이 꽃꽂이에 대한 How to에 방점을 둔 책이라면, 이 책은 꽃과 꽃꽂이에 대한 단상이 맛깔난 글로 잘 표현된 '꽃에 관한 사진 수필집' 느낌이랄까. 그녀의 디자인은 보기엔 자연스러운 듯, 생각 없이 툭툭 꽂은 듯 하지만 그것조차 완벽하게 계산된 것임이 분명한 그런 스타일이다. 그녀의 책 도입부에 영국의 유명한 플로리스트였던 Constance Spry의 어록이 담겨있다. "내 안에 있는 예술적 비전을 제대로 표현해 내지 못해 수년을 어둠 속에서 답답해하던 어느 날, 문득 그걸 표현해 낼 수 있는 매개체(꽃)를 찾았어요. 그때의 그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환희입니다." 


책에서 본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작품들 근처에라도 쫓아가고 싶은 마음으로 겨울부터 연습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이미 추워진 날씨여서 꽃은 대부분 사서 꽂을 수밖에 없었다. 갑자기 늘어나는 가드닝 비용, 꽃꽂이 비용이 걱정도 되었지만, 코로나로 굳는 휴가비를 쓰기로 하고 그냥 편한 마음으로 연습했다. 


이듬해 봄이 왔다. 부지런히 가드닝을 한 결실로 튤립과 수선화가 피기 시작했다. 곱게 느릿느릿 올라오는 꽃 하나하나가 너무 소중했지만, 난 이들을 과감하게 잘라 꽃꽂이 연습에 썼다. 내가 키운 꽃으로 꽂는 꽃꽂이는 그걸 할 때의 마음도 결과의 퀄리티도 모두 달랐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 번씩 꽃을 사러 나가면 아무리 도매시장이라도 10만 원을 훌쩍 넘겼는데, 이 비용 없이 꽃꽂이를 할 수 있다는 게 너무 신났다. 물론 튤립과 수선화, 달리아가 공짜로 땅에서 솟구칠 리는 없다. 구근과 거름을 거금 들여 샀고 손 트고 허리 아파가며 가을 겨울 내내 심었더랬다. 그래도 봄이 되어 땅을 뚫고 나오는 꽃들을 보면 그 수고는 200%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왼쪽은 내가 키운 식물들로 한 꽃꽂이. 오른쪽 두 개는 산 꽃들. 직접 키운 꽃을 쓰면 꽃의 혼(!)이 느껴진다.  모두 초반에 했던 작품들.


꽃꽂이를 좋아할수록, 많이 할수록, 정원의 역할이 중요해졌다. 가드닝을 열심히 해야 꽃꽂이도 또한 맘껏 즐길 수 있으니. 두 취미가 이렇게 서로 상생관계, 또 인과관계일 수가 있을까? 


가드닝을 통해 생긴 꽃들이 꽃꽂이의 비용을 덜어주더니, 언젠가부터 꽃꽂이로 수입이 생기기 시작했다. 선순환의 구조가 더욱 단단해지고 꽃꽂이는 취미를 넘어서기 시작했다. 


꽃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요즘 나의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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