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들과 취준생들은 좋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온갖 종류의 스펙을 쌓는다. 고생들이 말이 아니다. 고등학생들도 대학입시를 위해 스펙을 쌓아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생이 스펙 쌓기의 연속인 듯하다. 교직과목을 이수하고 교생실습을 하고 임용고시를 거쳐야 학교에서 가르치는 교사가 된다. 대학에서 가르치려면 더 오래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아야 한다. 어려운 관문을 뚫고 직장에 취직하면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승진을 위해서는 시험을 치르거나 자격증을 더해야 하는 경우도 많다. 어쩌다 일찍 직장을 그만두게 되는 경우에는 공인중개사, 공동주택관리사를 비롯해 여러 가지 자격증을 얻기 위해 학원을 다니고, 집안일에만 전념하던 주부들도 아이들이 품을 떠나고 나면 부업을 차리기 위해 요리학원이나 바리스타학원의 문을 두드리기도 한다. 세상 누구나 나이가 되면 다 하는 것 같은 자동차 운전도 학원에 등록하고 필기시험에 합격하고 또 실기시험에 합격해서 면허증을 얻은 후에야 가능하고, 많은 분들은 도로연수까지 받아야 한다. 꼭 학교나 학원을 다니고 시험에 합격하고 자격증을 얻어야 하지 않더라도, 배우고 익히지 않고서 저절로 되는 일은 세상에 거의 없다. 음악이나 미술, 예능을 전공하는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는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
젊은이들이 연애하고 결혼하는 문제를 어려워하는 경우가 많다. 여자를 만나면 남자들이 대놓고 물어본단다. 어떤 직장을 다니고, 얼마나 받으며, 언제까지 다닐 거냐고...... 남자들이 느끼는 것도 별반 다르지 않단다. 서로가 평생을 사랑하고 의지하며 행복한 가정을 만들어갈 소울메이트를 찾는 것이 아니라, 같이 살 집을 마련하고 자동차를 구입하고, 어쩌다가 아이를 가져서 낳게 되면 책임을 공유할 파트너를 찾고 있는 듯하다. 물론, 다 그렇지는 않겠지만......
영아와 유아의 두뇌는 성장의 시기별로 발달하는 단계가 있다고 한다. 아이들이 물건을 집어서 입에 가져가는 것조차도 학습의 과정이란다. 몸과 마음이 건강한 사람으로 자라기 위해서는 제 나이에 걸맞은 교육을 받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한다. 그런데, 대한민국의 많은 아이들은 영유아 때부터 온갖 선행학습으로 인해서 제 나이보다 훨씬 앞선 교육을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지식은 일찍 습득하는지 모르겠지만, 지혜가 자라날 여지는 없다. 공부는 배우는 것(學)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익혀야 하는 것(習)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탓이다.
자녀들이 자라면서 사춘기를 지날 때쯤이면, 북한도 무서워서 쳐들어오지 못한다는 "중2병"을 거쳐 간다. 아이와 주고받는 대화가 "오늘은 잘 지냈니?"와 "몰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아지면 부모들은 애가 타기 시작한다. 한 번은 꾹 참고 다가가서 "무슨 일이 있었니?" 하고 딴에는 마음을 열었는데 돌아오는 답이 "내버려 둬."이면 상황은 달라진다. 방을 왜 안 치우니, 아침에 늦잠 자지 말고 밤에 일찍 자라, 게임하듯이 공부 좀 해라,...... 그러다가 결국엔 큰소리를 내고 때로는 손찌검을 하기도 한다. 아이가 방문을 닫아 버리면 마음은 그보다 더 멀다. 대개의 부모들은 어쩔 줄을 모른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삼십 년 전의 자신들의 모습인 것을......
자연스럽게 화풀이가 남편이나 아내에게 옮겨갈 가능성이 높아진다. 아이가 너를 닮아서 저렇다는 등 말다툼을 하던 중에 그저께 설거지하다가 참은 감정까지 북받쳐 올라오면 부부간의 교양 있는 대화는 어느 곳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이 되기 십상이다. 십 년이 지난 시집살이 이야기가 안 나오면 다행이다. 등을 돌린 어색한 감정으로 주말을 다 지내고 나서도 어떻게 풀어야 할지 모르는 마음으로, 그저 월요일인 것이 고맙다는 생각으로 집을 나서는 남편들도 적지 않을 것이다.
운전면허도 시험을 치르고 합격을 해야 한다. 난 홍콩에서 근무할 때, 서른다섯의 나이에 운전면허를 취득했다. 열 시간 내외의 학과목 수업을 꼭 순서대로 다 수강해야 하는데, 영어로 진행하는 강의는 일주일에 한두 번 밖에 없어서 두 달이 넘는 시간이 필요했다. 영어로 시험을 봐야 하니, 우리말처럼 대충 눈으로 쓱 훑어서 공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대신 교통법규와 안전에 관한 공부는 제대로 했다.
하지만, 결혼과 출산과 육아는 공부를 한 기억은 없다. 시험을 본 기억도 절대로 없다. 지금의 아내를 비롯해서 어느 누구도 내가 결혼을 위한 준비가 되었는지 점검하지 않았다. 물론 부모님은 내가 적당한 직장을 가져서 적어도 금전적으로 독립할 수 있는 때를 기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사회도 결혼을 위한 자격증이나 면허증을 요구하지 않는다. 마치 우리는 결혼과 출산과 육아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는 듯하다. 따지고 보면 사춘기 때 훔쳐본 잡지나 만화책에서 본 것들, 스포츠신문이나 해외토픽에서 주워 담은 것들, 대학 때 어쩌다 교양과목에서 들어본 것들, 야동에서 본 것들,...... 그래서 제대로 반듯한 지식은 별로 없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일은 평생을 함께 할 배우자를 만나고 자녀를 낳아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일이다. 그렇게 소중한 일,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인데, 그것을 이해하고 배우고 그래서 더 잘 하기 위해서 학교나 학원을 다니고 시험을 보는 일은 하지 않는다. 진짜로 중요한 것을 예습하고 공부하고 복습하고 또 공부하지 않는다. 아이들은 학원을 다니지 않으면 인생에서 금방이라도 낙오자가 될 것처럼 생각하면서도......
첫아이가 한 살이면 부모로서의 나이도 한 살이다. 아이를 낳기 전에 삼십 년을 살았건 사십 년을 살았건 별 소용이 없다.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아 서투른 것이 당연하다. 아이가 왜 우는지 모르면 답답하기 이를 데가 없고, 갑자기 아프기라도 하면 세상이 무너지는 듯하다. 경험을 통해서, 의사 선생님을 통해서, 친정어머니를 통해서, 책을 통해서 배워간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이다. 먹고사는 일이 바쁘고 힘들다는 핑계가 많아지면 우리는 더 이상 결혼생활을 어떻게 더 잘할 수 있는지, 자녀양육의 올바른 길이 어느 길인지 공부하려 들지 않는다. 대치동 어느 학원에 어느 선생님이 더 잘 가르치는지, 어느 대학교의 입시요강이 어떻게 바뀌었는지가 중요할 뿐이다.
터울이 많이 지는 늦둥이를 본 부모는 대개 마음의 여유가 있어 보인다. 남의 집 막둥이는 쉽게 수월하게 크는 것처럼 보인다. 경험으로 배운 덕일 것이다. 경험이 우리에게 알려주지 않는 것들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공부하고 배우고 익히자. 자녀가 사춘기만 지나고 나면 자동적으로 다시 고분고분하고 착한 아이로 돌아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좋은 관계를 매일 쌓아 가지 못하면 부모 자식 지간도 평생 데면데면한 관계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 대화법을 가르치는 박재연 대표의 인터뷰 기사를 읽으며 다시 한 번 반성하고 돌아본다. 내 경험으로는, 아이들에게 잘못한다고 야단치고 더 잘하라고 다그쳤던 것들은 거의 예외없이 아이들의 모습에서 보게 되는, 아이들이 원해서 닮은 것이 아닌, 내 유전자가 전해 준, 나의 단점들이다. 그럼에도 저는 잘났다고 아이들에게 큰소리만 쳤으니...... 미안하고 또 미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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