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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창 Jun 19. 2016

사랑한다는 것은 (2)

꾹꾹 눌러쓴 편지

    해외 출장을 자주 다니던 시절, 새로운 호텔에 묵을 때면 호텔방에 들어가자마자 책상 서랍 속에 엽서가 있는지 확인했다.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면 대개는 밤이 늦거나 새벽녘이 되었다. 운이 좋은 날에는 창문의 커튼을 열어젖히면 낯선 도시의 밤거리를 볼 수 있다. 그렇지 못할 때에는 코앞에 있는 맞은편 건물의 불 꺼진 창을 마주하게 된다. 창문을 열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진 날엔 조용한 새벽 공기가 방 안으로 밀려들어 오면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가족들의 소식을 전해주는 것 같다. 그러면 엽서에 꾹꾹 눌러 몇 자 적었다, 아내와 아이들에게.


    이중섭은 아내와 아이들에게 수많은 편지를 적어 보냈다. 7월 4일과 7월 9일에 보낸 편지를 잘 받았느냐고 시작하는 편지는 7월 13일에 썼다. 아내도 아이들도 그에게 답장을 쉼 없이 보냈다. 중섭은 아내에게 6월 25일 자와 6월 28일 자 편지를 잘 받았다고 썼다.

    내 편지는 언제나 '사랑하는 아내', '사랑하는 딸' 또는 '사랑하는 아들'로 시작한다. 중섭의 편지는 그렇지 않다. 한 단어로 표현하기에는 너무도 아내를 사랑한 그의 편지의 첫 줄은 대개 이렇게 시작한다.


'나의 최고 최대 최미의 기쁨, 그리고 한없이 상냥한 최애의 사람, 오직 하나인 현처 남덕 군'    


    그가 아내에게 그려 보낸 엽서들에는 글은 없단다. 오직 그림만 그려 보낸 엽서 속에서 그는 아내에게 사랑한다고, 보고 싶다고, 그립다고...... 사무치도록 외친다. 남편과 떨어져 아이들을 키우며 고생하는 아내를 머리 끝부터 발가락까지 그리워한다.


    두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들은 안쓰럽기 그지없어 다 읽어내기가 어렵다. 아들에게 보낸 편지들은 꿈에서라도 매일 만나는 가족들과 함께 지낼 상상으로 그린 - 아빠와 엄마와 아이들이 손을 맞잡고 있는 - 그림들로 가득하다. 자전거 하나 제대로 사 주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서 자괴감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일까, 그는 이번 전시회만 잘 되면 아빠가 꼭 자전거를 사주겠노라고 여러 편지에 걸쳐 썼다. 그가 마주했던 처절한 가난이 종이 한 장, 딱 한 장을 더 마련할 여유도 주지 않으면, 중섭은 형제에게 한 통의 편지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 다시 종이가 생기면, 그는 똑같은 그림을 두 장 그려서 형제에게 각각 편지를 적었다. 그래서 그의 편지들은 더 절절하다.


    마음은 꺼내어 보여주어야 한다고 믿는다. 말 안 하면 모르냐고 하는데, 제대로 알기 어렵다. 예전에는 전화를 많이 사용했는데, 이제는 문자를 더 많이 사용하는 시대가 되었다. 전화는 목소리를 통해서 상대방 마음을 읽을 수 있지만, 문자는 참 어렵다. 그런데 손으로 쓴 편지는 다르다. 편지지에 써 내려간 글씨부터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를 전달한다.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쓴 편지는 그래서 맛이 다르다. 사랑한다는 말은 절망 속에서도 키가 크는 황홀한 고백이라고 했다. 그러나, 정성 들여 편지를 쓰지 못하는 사랑은 헛일이다.




    탄생 100주년을 맞은 이중섭의 전시회를 다녀왔다. 이미 여러 번의 전시회를 통해서 익숙한 그의 그림들보다는 그가 살았던 세월의 흔적들에 마음이 쓰였다. 내가 나이가 들어서 그런가...... 박수근 탄생 100주년 전시회 때에도 그의 살았던 흔적을 따라 눈시울을 붉였었는데...... 아내와 연애하던 시절에 보았던 연극, "길 떠나는 가족"은 김갑수의 연기에 빠져 보느라 그랬는지, 아니면 내가 어려서 그랬는지, 그렇게 사무치게 슬프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이번 전시회는 유난히 그의 편지들이 많이 소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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