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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KAY Jan 19. 2024

아이가 묻는 죽음에 대하여

죽은 사람만 불쌍하다는 옛 선현들의 말씀을 되새기며

 아이가 죽음에 대해 자각하기 시작했다. 죽음은 영원한 이별이며 그것은 돌이킬 수 없고 누구나 한 번은 겪는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이다. 이제 막 세상에 태어나 삶의 즐거움을 만끽할 줄 알게 된 이상, 그야말로 복잡한 심경이었을 것이다.  

 처음에는 조금 단순했던 것 같다. 마치 삶이 장편 비디오게임의 ‘한 판’이고, 게임에서 내가 선택한 캐릭터의 생명을 모두 소진하면 그 판이 끝나는 것처럼, 아이는 순진무구한 얼굴로 “엄마, 그럼 나는 언제 죽어?”라고 물었다. 그것은 마치 ‘이번 생에 나에게 주어진 생명하트는 몇 개?’라는 호기심과 등가교환 된 부호에 지나지 않았다. 내일의 준비물이 무엇인지, 오늘은 엄마가 마중을 나올 것인지를 묻는 것과 같이 몹시 일상적이고 무심하게 아이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런 질문이 당황스러운 것은 오직 나 혼자인 것 같았다. 생명의 유한함을 이제 막 눈치챈 어린아이에게 상처를 주거나 실망시키지 않고 대답하는 방법은 무엇인지 고민하는 동시에 엄마로서 상상도 하기 싫은 상황을 상상해서 대답해야 한다는 이중고까지 있었다. 심지어 그것을 특별한 기억으로 남기지 않기 위해 최대한 의연하게 답해야 하는 대화의 기술도 잊지 말아야 했다.

 “그건 아무도 모르지. 하나님만이 아실 거야.”라고 얼버무려보지만 그것은 아이가 원하는 답이 아니다. 그런 불확실성은 아이가 선호하지 않는다. 어차피 답정너인 아이와 논쟁을 이어가는 것은 ‘특별한 기억으로 남기지 않기’라는 규칙에도 위배된다. 결국 나는 대충 적당한 떡밥을 찾아서 아이에게 던져주는 것으로 작전을 변경했다. 평균 수명 백세시대라는 과학적이고 통계학적인 슬로건을 근거로 삼아 “우리 시은이는 아마도 120살 정도는 너끈히 살겠지.”라고 덧붙여 주었다. 그러자 비로소 아이의 얼굴에 평온이 깃들고 화제가 전환되었다.

 사실 큰 아이도 비슷한 연령 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화제로 삼아서 나를 근심에 사로잡히게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시기에 증조부의 장례를 치르는 등 충분히 계기가 있었기 때문에 질문 자체에 대한 혼란스러움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큰 아이의 경우 증조할아버지를 천국에서 빨리 만나고 싶다는 둥 천사들과 천국에서 살고 싶다는 둥 작은 아이와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죽음을 인지해서 내가 몹시 당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다 며칠 전 샤워하려고 준비를 하다가 불쑥, 죽지도 않은 각설이가 또 찾아오듯, 아이 입에서 “엄마, 그럼 시은이가 120살까지 살면 엄마는 언제 죽어?”라고 묻는 것이 아닌가. 아 괴롭다. 이혼한 전남편이 자꾸 찾아오면 이런 기분일까? 이혼은 아직 안 해봤지만 왠지 그럴 것만 같은 확신이 들면서 아이에게 빨리 적당한 떡밥을 던져주고 상황을 모면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아이는 속히 나의 수명에 대한 정확한 ‘데드라인’을 제시하라며 재촉했다. 옷을 다 벗고 샤워기에서 따뜻한 물이 쏟아져 나올 때까지도 멈출 줄을 몰랐다. 사람의 진을 빼는 놀라운 재능이 있는 아이 덕분에 하마터면 사실 그건 아무도 모르는 것이고, 가는 데는 순서가 없다고 말할 뻔했다. 나는 빠르게 피로해졌다.

 “시은이가 120살까지 살 테니까 엄마는 백 살 정도 살 것 같아.”

 사실, 아무리 백세시대라고 한들 백 살까지 살고 싶은 마음은 전혀 없었지만 최대한 아이를 배려해서 그렇게 대답을 했다. 내가 백세까지 산다면 아이는 얼추 환갑이다. 일흔에 아직도 모친이 살아 계신 나의 어머니를 생각하면 사실 그렇게 허무맹랑한 시나리오는 아니었지만, 백세까지 생존한다는 것이 마냥 축복같이 느껴지지는 않는 것이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나로선 최대한 선심성 답변을 했건만 아이는 도리어 목놓아 울기 시작했다. 세 자릿수 뺄셈이 가능 할리가 없음에도 아이는 나의 백세 죽음 이후에 자신에게 남겨진 절반의 삶을 걱정하며 울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엄마가 백 살까지 밖에 살지 못하는 것이냐며 오열했다. 아빠도 그럼 비슷하게 살 것이고 그렇다면 이 험한 세상에 언니와 자신만 남는 것이냐며 대성통곡했다. 엄마가 없으면 누가 밥을 해주고 누가 머리를 묶어주고 누가 책을 읽어 주냐며 구슬프게 울었다. 분명 미래를 걱정하는 것인데 너무나 현실에 기반한 걱정이라 60년이라는 시차가 무색해서 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인생 최대의 비보를 접한 아이는 자신의 불행을 비웃는 것 같은 엄마의 웃음이 불쾌하기도 하고, 혹시 좋은 변수가 있어서 엄마가 웃는 것은 아닌지 희망을 품어 보기도 하면서 중간중간 가자미 눈을 해가며 화냈다 울었다를 반복했다. 그리고 그 울음은 생각보다 길었다. 머리를 감고 몸을 닦고 새 잠옷을 입을 때까지 그칠 줄을 몰랐다. 결국 닌텐도사의 마리오 카트가 백 살의 악몽에서 날 구원해 주었다. 비디오 게임이 이렇게 고마울 때가 있다니 이것 또한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이후에도 아이는 정립되지 않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엄습할 때면 불시에 “엄마는 왜 백 살만 살 수 있어?”라는 질문으로 날 괴롭혔다. “엄마가 너무 좋아서 엄마랑 헤어지기 싫어. 엄마가 죽으면 엄마랑 헤어지는 거잖아. 나는 우리 가족이 너무 좋아. 아무도 헤어지기 싫어. 이렇게 영원히 살고 싶어.”라고 말하면서 흐느꼈다. 들썩이는 작은 어깨가 가여워서 꼭 안고, “엄마도 시은이랑 오래오래 같이 살고 싶어. 엄마도 시은이를 너무너무 사랑하니까.”라고 아이를 달래며 괜히 나까지 코끝이 찡해졌다. 아직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아이의 작은 가슴에서 콩닥콩닥 박동이 느껴졌다.

 미세 먼지가 뿌옇게 내려앉아 있던 답답한 날들이 이어지다 파란 하늘이 보이는 어느 날이었다. 아이들과 해변을 걸으며 평온과 행복에 대한 생각을 잠깐 했던 것도 같다. 삶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가. 도란도란 걸어가는 아이들을 멀리서 바라보니 내 삶도 희극이고 웃음과 행복이 가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그대로 집으로 돌아갔어야 했는데……

 아이들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들의 대화를 들었을 때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에 어쩌다 이런 대화를 하게 되었는지조차 이해가 안 가지만 아이들은 멀쩡히 살아있는 나의 유품을 어떻게 나눠 가질 것인지 뒤에 그 당사자가 따라오든지 말든지 개의치 않고 논의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죽으면 이미 손가락이 나보다 굵어진 언니는 엄마의 가방과 옷, 목걸이 귀걸이 등을 가질 예정이고, 동생은 엄마의 반지와 하이힐과 드레스를 갖겠다고 천진난만하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주 죽이 척척 맞아 일사천리로 합의에 도달한 듯싶었다.

 왜 엄마는 백 살까지만 살 수 있냐며 오열하던 바로 그 아이다. 내가 죽은 뒤에 알뜰하게 자신의 지분을 챙기는, 심지어 그 과정이 평화롭기까지 한 이 아이들이 내가 무병장수를 다짐하며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건강을 챙기기 위해 나를 운동장으로 나가게 하던 바로 그 아이들인 것이다. 상속 다툼은 없었으니 기뻐해야 하는 것인가?   

 그래. 백 살 귀신은 이제 떨어져 나갔나 보다. 건강하게 죽음을 인식하고 주어진 생명을 마음껏 누릴 수 있다면 사실 족하다. 아마도 울고불고하던 그때도, 해맑게 웃는 지금도 아이에게는 자신의 삶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긴 여정의 한 순간이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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