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로 촉발된 공멸 방지툴의 해체
노아 홍수 이전의 인류는 전 인류가 한 언어를 쓰고 한 사람의 인생이 천년 가까이 되었다. 그러니 그들의 발전과 진보는 바벨 이후의 시대와 비교할 수도 없다. 바벨의 도시 문명 사건 이후 인류는 오랜 세월 과학기술의 발전이 거의 답보상태였다. 나의 공멸방지책이 효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런 시절에도 인간의 탐욕이 세상을 어지럽히고 고통을 가중시켰지만 자연을 찾아 도피를 떠난 사람들의 자녀들에게는 어린 시절 잠깐 에덴의 행복 같은 것이 주어지기도 했다. 자연의 재해가 없어 풍성한 가을을 계속 맞이하던 시절, 아이들은 물장구에, 바람의 노래를 섞어 시원한 행복을 만들어 내었다. 부모들이 보살피는 보살핌 속에 자연이 보여주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순진하고도 사랑스러운 숨소리를 토해내며 잠에 들었다. 마치 에덴의 어느 날처럼. 그러나 그런 날들은 길지 않았다.
태풍이 몰아쳐 왔다. 그들의 삶은 재난과 기근의 연속이 되었다. 자연은 인류가 행하는 대로 인류의 통치를 따라 행한다. 인류가 블랙홀과 같은 흡입력의 탐욕을 발휘하면 자연도 태풍을 일으킨다. 인류의 탐욕이 다른 이의 삶에 재난을 주고 그들의 모든 것을 수탈하여 말려 버리면 자연은 인류에게 재난과 기근을 준다. 피조세계는 그 통치자인 인간의 질서를 따라 움직인다. 인류의 탐욕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이었다. 그 탐욕은 그칠 줄 몰랐다. 인류의 탐욕은 모든 곳을 덮었고 자유로이 살던 아이들을 습격했다. 아이들은 약탈을 당하기도 했다. 그러다, 자신들을 보호해 주겠다는 명목으로 왕이라는 자들이 와서 노예로 삼았다. 그리고 세월이 흐르고 아이들도 커서 자녀를 낳았다. 그런데 자신들을 보호해 주겠다던 왕이 전쟁에서 지면 상대편 왕이 공녀로 아이들의 딸들을 끌어갔다. 또 전쟁에 이겨도 아들들을 끌고 갔다.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아들들을 전쟁터로 끌고 갔던 것이다.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쇠 농기구와 놋그릇들을 빼앗아 갔다. 왕 자신의 왕국의 메커니즘 유지를 위해 위해 재산을 빼앗아갔다. 자신들을 지켜주는 대가로 내야 하는 세금이라고 했다. 마치 조폭들이나 걷는 보호비와 같은 것이었다. 사실 자신들과 같은 폭압자들이 없다면 애초에 보호도 필요 없는 것이다. 땅의 모든 곳은 이렇게 왕국이나 공화국 그리고 다양한 통치 체계를 가진 자들에 의해 빠짐없이 점령당했다.
로마가 한참 왕성한 정복을 행하던 시절 나는 세상에 왔었다. 이 일은 뒤에서 더 자세히 다루어야 하겠다. 지금은 인간 구원의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는 것이 더 우선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제국들과 착취와 업악의 역사가 흘렀다. 나의 이름을 가졌던 종교도 힘 있는 자들의 대열에 합세해 종교의 이름으로 백성들을 억압했다.
그러다 억압에 대항한 자유를 주장하는 자들이 나오는 듯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것은 자유가 아니었다. 반역이었다.
중세의 신은 내가 아니었다. 중세의 기독교라는 종교의 신은 탐욕이었다. 중세에는 세속과 같은 권력의 악귀가 신이었다. 그것으로 사람들을 억압하며 심지어 인간의 지성도, 인간의 인권도 말살했다. 심지어 죄 없는 자들을 이단으로 몰아 죽였다. 또 무고한 자들을 마녀로 몰아 사냥했다. 순전한 자들의 재산과 권력을 이단재판이나 마녀사냥을 도구로 하여 탈취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이 나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이단재판관이나 마녀사냥꾼들은 나를 믿는 자들도, 나의 사역자들도 아니었다. 그들의 추기경과, 교황은 나를 알지도 못하는 자들이었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옛 뱀 사탄의 계략이었다. 사탄은 그러한 악한들이 나를 믿는 자들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활동하게 했다. 그 악한들이 한 인들로 인해 사람들이 우리에 대해 불만을 품도록 만들었다. 사실 자기 편인 자들을 동원하여 악행을 하고 그 악행을 우리에게 덮어씌운 것이다. 그리고 우리에 대한 반역을 선동했다. 그 반역의 방향은 중세 이전의 그리스와 로마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즉 중세의 악신이 자신들을 다스리기 이전 시대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것이 르네상스다.
거짓 신들이 자신들이 신들로 인간들을 속이던 그 시절이 좋다고 하는 것이다. 이런 영감을 사람들에게 불어넣고 그 시절이 아름다웠으며 그 시절로 돌아가면 인간주의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속삭이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알고 보면 그 시절에 인간들은 거짓신들을 섬기고 그 신들에게 자신들의 운명을 묻고 그들이 추구하던 지혜를 준다고 믿었던 신들과 그들을 이어주던 악령들인 데몬들을 섬기며 살았다. 그 시절도 여전히 중세의 악신과 이름만 다를 뿐 동일한 악신들에의해 통치를 받은 것이다. 중세에 인간들이 섬겼던 성자는 사실 아폴론이었다. 아폴론의 축일을 크리스마스로 정하고 아폴론의 부활일을 부활절로 섬겼었다. 이름만 인간으로 갔던 나의 이름 예수를 따랐을 뿐 실질적인 본질은 아폴론이었다. 인간들이 자신들의 욕망을 염원하는 도구로서의 우상으로 그냥 존재했을 뿐인 신은 아폴론이었지 내가 아니었다. 로마인들이 자신들의 신의 이름은 바꾸었는데 여전히 그들이 구한 것은 같았다. 그들은 아폴론의 이름으로 그리고 주피터의 이름으로 행하던 일을 그대로 예수의 이름으로 그리고 여호와의 이름으로 행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를 그들은 섬긴다고 했는데 그들이 섬긴 것은 나의 육신의 어머니 마리아도 아니었다. 물론 나의 어머니는 신도 아니었으며 단지 신실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나의 어머니 마리아 상에 광배를 씌웠다. 그 형상은 바로 헤라(로마신 주노)의 형상과 같았다. 바로 제우스(로마신 주피터)의 아내였다. 그 아들은 아폴론으로 바로 중세에 나를 통해 상징되던 신이었다. 로마 황제와 배교한 로마의 메트로폴리탄 감독들은 아폴론의 축일과 부활일을 크리스마스와 부활절로 정했다. 12월 25일은 태양이 가장 짧아지는 동지로 들어가기 전 태양을 위해 드리는 축제였다. 그리고 태양이 달이 뜨는 밤보다 더 오래 뜨기 시작하는 춘분은 태양신 아폴론의 부활일이었다. 그것을 나 예수의 이름만 붙여서 부활절로 만들었다. 너희가 생각하기에 중세에 나의 이름으로 불렸던 신은 나이겠는가? 아니면 아폴론이겠는가? 너희는 중세에 있었던 종교가 과연 성경에 나와 있는 나를 믿는 자들의 풍습이었다고 생각이 되는가? 고대의 수많은 귀신들은 중세에 성자들이라는 이름을 이용하여 사람들에게 숭배를 받았다. 사람들은 고대에 하던 대로 자신들의 탐욕을 위해 성자들의 탈을 쓴 귀신들에게 제물을 바쳤다. 이것은 어느 신들의 종교 메커니즘이던가? 잘 생각해 보라. 지혜 있는 자들은 깨닫게 되리라.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던 로마를 생각해 보자. 그들은 여전히 식민지의 백성들을 강제로 정복하고 그들을 약탈했다. 로마나 모든 도시 문명 즉 제국은 모두 약탈과 착취에 의해서 유지된다. 그것은 시대를 막론하고 변할 수 없는 법칙이다. 누군가 돈을 번다는 것은 누군가의 돈이 그에게 흘러들어 갔다는 것이다. 즉 누군가는 돈을 잃었다는 것이다. 누군가 부를 누리려면 누군가 착취를 당해야 한다. 물론 새로운 재화를 발견하여 그것을 사용하면 된다. 그런데 아프리카에서 100 원하는 것을 유럽에 가지고 와서 100원에 판다면 손실이다. 왜냐하면 운송비가 손해가 나고 도매점과 소매점을 운영하는 비용과 인건비가 손해가 나는 것이다. 그것을 만회하려면 아프리카에서는 도둑질하듯 물건을 빼앗아 와야 한다. 그래야 모든 비용을 제하고도 이윤을 남길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경제요, 이것이 경영의 철칙이다. 로마의 유명한 빚쟁이였던 시저는 갈리아 원정을 통해 갈리아인들 즉 켈트족과 그 옆의 게르만족의 황금을 약탈하여 로마 최고의 부자가 되었다. 그로 인해 로마의 황금가격이 폭락하였을 정도였다. 로마의 부는 무력침략과 강제 약탈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 후에 그들이 기독교라는 종교를 국교로 삼았을 때도 그들이 믿는 신은 여전히 내가 아니었다. 만약 그들의 신이 참으로 나였다면 그들은 약탈이 아닌 사랑을 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는 마지막까지 약탈의 경제를 버리지 못했다.
이 세상 임금 마귀는 원래 도적질 하는 자다(요 8:44) 그는 처음부터 아담의 것을 도적질 했다. 그리고 그 탐욕으로 나의 자리도 도적질 하려 했고 지금도 하려고 하며 앞으로 그렇게 되게 하려 한다. 그는 원래 도적이며 약탈자다. 그 옛 뱀의 욕심을 삼킨 인간의 속에 있는 것도 약탈의 DNA다. 그것이 바로 공멸의 DNA인 것이다. 그러니 과거와 현재에 있었던 세상의 신은 바로 약탈의 신이다. 그 이름을 바꾸어, 고대에는 여러 민족들의 신으로, 중세에는 예수와 여호와로, 그리고 현대에는 경제 이데올로기로, 그 껍데기를 바꾸어 성형했으나 여전히 그 본질은 도적질 하는 자, 빼앗는 자, 멸망시키는 자다(요 8:44) 그것에게서는 약탈과 멸망밖에 나오지 않는다.
서구제국 열강들이 아시아와 아프리카 그리고 신대륙을 착취해서 그들의 부를 누린 것이나 미국이나 유럽의 강국들이 후진국들의 노동력을 착취해서 자신들의 부를 만든 것이나 같다. 도시 문명 제국은 그런 착취를 당하는 후진 국이 있어야 번성할 수 있는 구조다. 후진국은 자신들이 생산하는 것은 싸게 선진국에 판다. 자신들이 기술력이 부족함으로 자신들이 노동력으로 생산하는 제품도 싼 것이다. 그런데 그 제품의 가격이 선진국의 동일한 제품에 비해 몇 배나 싸다. 그렇게 파는 것을 당연히 여긴다. 그리고 자신들의 기술로 못 만드는 것을 선진국에서 수입하는데 그 가격은 자신들 나라의 물가의 몇 배가 되는 물가로 사 온다. 선진국의 가격으로 사 와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빈인빈, 부익부가 점점 심화된다. 그리고 후진국이 그것을 벗어나려면 자신들도 자신들보다 더 가난한 후진국을 찾아 그들의 노동력을 착취해야 한다.
경제의 핵심은 약탈과 착취다. 누군가의 돈을 빼앗지 않으면 나는 돈을 얻을 수 없다. 노동자가 생산한 가치를 기업가가 노동의 가치를 도둑질해야 이윤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마르크스는 알았다. 나는 인간들이 사는 세계에 개인별로 그 노동의 대가가 다르다는 법을 설정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인간들은 그것을 스스로 설정했다. 똑똑한 자는 어리석은 자의 노동 가치를 낮게 책정해 착취한다. 돈이 있는 자는 가난한 자의 노동 가치를 낮게 책정해 착취한다. 권력이 있는 자는 힘없는 자들의 노동 가치를 낮게 책정해 착취한다. 아프리카에서 100원에 사서 유럽에서 100원에 팔면 손해이듯 노동자에게서 100원에 사서 100원에 시장에 팔면 손해인 것이다. 물론 손해를 보면 안 된다. 이윤이 적정하면 된다. 그러나 노동자 1000명은 100만 원을 버는데 사장 자신은 혼자 30억을 벌 권리는 누구에게 받았는가? 나는 그들에게 그런 권리를 준 적이 없다. 내가 준 것은 사랑이었다. 서로가 서로에게 내가 준 능력으로 섬기고 사랑하고 돕도록 한 것이다. 똑똑하고 힘 있고 돈 있는 자의 모든 것은 내가 준 것이다. 그들은 청지기다. 그들은 그것으로 나를 사랑하듯 자신의 형제들을 사랑하고 섬겨야 한다. 그렇지 못하고 그들이 자신의 능력으로 형제들을 착취한다면 그들은 나의 것을 도둑질한 것이다. 독일 개신교의 유대인 청년 마르크스는 성경에서 이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의 사상은 프랑스의 저명한 기독교 운동가 시몽 백작에게서도 배운 것이다. 그들은 성경에서 나의 사랑의 경제학을 배웠다. 마르크스는 그 시대가 그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하여 폭력혁명을 꿈꾸었지만 생시몽 백작(클로드 앙리 드 루브루아, Claude Henri de Rouvroy, comte de Saint-Simon, 1760년 10월 17일 ~ 1825년 5월 19일)은 계속 성경의 가치를 지켜 폭력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최상위 포식자인 기업이 돈을 벌려면 자국이나 타국의 시민들을 상대로 장사를 해야 한다. 그런데 가장 효율적인 것이 집이다. 왜냐하면 일반적으로 판매하는 상품 중에 가장 많이 팔리고 가장 비싼 물건이 집이기 때문이다. 집 값을 올리면 가장 확실한 돈벌이를 할 수 있다. 처음에는 몇 년 열심히 일하면 살 수 있을 정도의 가격으로 팔았지만 점점 그 가격을 올린다. 그러면 어리석은 시민들은 자신의 자산 가치가 올랐다고 기뻐한다. 그러나 자신들이나 자신들의 자식이 집을 사려면 전에는 몇 년만 일하면 되었는데 이제는 평생을 일해도 집을 살 수가 없다. 그만큼 비싸게 사게 되는 것이다. 그럼 누가 돈을 벌었을까? 최상위 포식자인 건설사 주인이다. 그리고 부동산 제벌들이다. 일반 서민들은 집 한 채를 가지고 있다. 팔면 앞에 붙은 집의 가격을 뜻하는 숫자는 바뀌었지만 그 돈으로 다시 집을 사려면 그 돈을 모두 주어야 한다. 아니 그럼 자신이 소유한 것은 바뀐 것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조삼모사처럼 앞에 숫자가 달라지니 자신은 돈을 벌었다고 착각을 하는 것이다. 아이스크림을 1,000원에 사서 냉장고에 넣어두었는데 아이스크림 가격이 2,000원이 되어 두 배나 올랐다. 그럼 돈을 번 것 같다. 그런데 그 아이스크림을 팔아서 2,000원을 벌고 동일한 아이스크림을 사려면 2,000원을 다시 주어야 한다. 어떻게 돈을 번 것인가? 물론 다른 물건들의 가격은 부동산만큼 빨리 오르지 않으니 당장은 집을 팔아서 쓰면 다른 물건들은 오르지 않은 가격에 살 수 있다. 그러나 일반 서민들은 자신들의 집을 팔아서 소비하는데 쓰지 못한다. 그것은 부동산 제벌들이나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문제는 집 가격이 오르면 다른 물가도 서서히 시간을 두고 따라 오른다는 것이다. 집이 두 배로 오르면 반드시 시간을 두고 다른 물가도 두 배로 오른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본주의의 법칙이다. 원래 아이스크림 가격이 두배로 오르면 다른 과자 가격도 두 배로 오르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단지 그것이 시간을 두고 오를 뿐이다. 그러니 일반 서민들은 집을 팔아서 써보지도 못하고 계속 집을 더 비싸게 살 수밖에 없다. 단지 속는 것이다. 아이스크림 가격이 2000원으로 올랐으니 돈을 벌었다고 생각한 것처럼 속고 있는 것이다. 아이스크림 가격이 오르면 돈을 버는 것은 아이스크림을 만드는 제과회사 회장이다. 아니면 최소한 아이스크림 도매업자 정도는 되어야 돈을 버는 것이다. 그래서 빨리 다른 물가가 오르기 전에 아이스크림을 팔아 그 돈으로 싼 다른 물건들을 사서 쓰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냉장고에 아이스크림 하나 들고 있는 가난뱅이는 돈을 번 것이 아니다. 그거 올랐다고 기뻐하지만 올랐으니 더 오를 수도 있어 그 아이스크림을 먹지도 못한다. 혹시 급한 일이 있어 아이스크림을 팔 일이 있어 팔면 그것으로 끝이다. 다시 사고 싶으면 처음보다 더 비싼 가격인 2000원에 계속 사야 하는 것이다. 이렇게 단순한 원리도 모르고 착취를 당하는 것이 일반 시민들이다.
도시 문명은 이런 착취가 없으면 그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다. 그것을 그럴듯하게 포장을 하고 돈을 버는 것처럼 착각하게 만든다. 그래서 하위의 시민들은 서로서로 자신들끼리 싸우고 상대의 살을 깎아먹으면서 치열한 경쟁을 한다. 그리고 언제나 상위의 포식자들은 그들을 속여 착취를 하고 자신들에게 그들의 원망의 화살이 돌아오지 않도록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교묘하게 자신들의 착취를 포장한다. 광고를 통해 집에 고급스러운 부가가치의 이미지를 주기도 한다. 자신들 착취를 정당화하기 위해 광고를 하고 소비문화를 조성한다. 또는 팬덤을 형성하여 그것을 즐기도록 한다. 마치 마약에 중독이 되거나 알코올에 중독이 되는 것처럼 그들을 중독시킨다. 다시 마약을 사기 위해서 더 악착같이 자신들에게 충성하게 하고 자신들이 만든 착취의 메커니즘을 위해 헌신하게 한다. 착취의 문명이며 착취의 메커니즘이다. 그 메커니즘을 효율적으로 작동시켜 주는 것이 테크놀로지다. 금융 테크놀로지나 산업 테크놀로지등이 이에 속한다. 경제나 사회과학도 비슷한 카테고리에 속해 있다. 과학 테크놀로지는 이런 것들을 떠받치는 기둥역할을 한다.
이렇게 도적질 하는 도적놈은 인류를 속여 끊임없는 약탈의 문화를 만들었다. 그것이 약탈의 메커니즘이다. 그런 약탈의 메커니즘을 만든 자인 자신을 숨기고 그 누명을 나에게 씌웠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자유의 혁명을 일으키게 했다. 거짓 권력에 억눌려 있던 사람들의 욕구는 폭발해 올랐다. 모든 이성과 의지를 동원하여 자신들 스스로의 빛을 밝히기 시작했다. 바로 계몽주의다. 거짓으로 인간 속에 있는 이성을 속박하던 족쇄를 풀기 위해 죽을힘을 다했다. 그것이 문예부흥이요. 인문주의 부흥이다. 그런데 이것도 자유가 아니었다. 그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인간들의 착취의 메커니즘은 르네상스 이후 과학과 사회 시스템이 현저히 달라진 현재에도 여전히 작동하고 있다. 단지 사악한 세상 임금 마귀는 인간들을 계속 속여 이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자신의 반역을 위해 인류를 계속 조종하고 있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인류가 반역을 꾀하는 것이다. 그 결과 인류는 공멸에 이른다. 그러나 사탄은 인간들에게 결코 그 결국을 알려주지 않는다. 심지어 현재는 그 자신의 정체마저 숨기로 이데올로기로 사람들의 생각에 파고들어 사람들을 속인다. 그는 처음부터 거짓말하는 자였으며 거짓의 아비다. 그의 일은 원래 속임이다(요 8:44) 바로 그의 이름대로 데몬이다. 저 소크라테스의 신 바로 다이몬인 것이다.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표현하지만 실상은 사악한 착취자요, 찬탈자다.
르네상스도 사실 이 속이는 자가 인류를 속인 또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결국은 더 확실하게 자신에게 종노릇 하는 인류를 만들기 위한 속임수였을 뿐이다. 그는 과거 그가 인간들을 속여 지배하던 고대로 회기 하기를 원했다. 회기로의 명분은 신에 의해 억압당하는 인간에게 자유를 선사한다는 것이다. 인간들은 신이라는 이름에 반기를 들었다. 자신들을 억압하던 그 이름으로부터 자유를 원했다. 속이는 자는 자신이 나의 이름으로 착취하고 지배했던 역사의 과오를 나에게 남기고 자신은 이성의 빛이라는 새로운 신이 되었다. 옛 뱀은 자신의 길을 갔다. 그의 길은 언제나 속이는 것이었다. 인류가 나의 이름에 반기를 들게 했다. 그리고 인간 스스로의 이성을 추구하게 했다. 속이는 자는 인류가 추구하는 이성 속에 들어가 이데올로기라는 이름으로 인간들을 조종하고 지배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자신들의 이름을 주피터나 제우스로 헤라나 주노로 부르지 않았다. 또는 중세에서처럼 나의 이름 예수를 참칭 하지도 않았다. 이제 원수는 이데아(Idea)가 되었다. 자신을 이데올로기로 포장했다. 바로 이데아(Idea)의 우상(Idol-ogy) 즉 이데올로기(Ideology)가 된 것이다. 바로 과거 소크라테스 일파들이 섬기던 신의 이름이다. 그런데 더 이상 그 이데아는 신이 아니었다. 신의 인격성은 삭제하고 원리 또는 진리로 자신을 포장했다. 그리고 원리와 지식을 추구하는 인류를 만들어 갔다. 그래서 철학자들의 신은 인격성을 삭제한 절대정신으로 표현되었다. 신의 인격성을 삭제한 인류의 집단 지성과 같은 성격의 신을 만들어내었다. 그런데 그 아이디어(Idea, 헬라어 이데아)는 사실 인간들에게 영감으로 즉 생각으로 다가오는 옛 뱀의 변장한 모습일 뿐이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인 존재가 마치 인간 자신이 떠올린 생각 즉 아이디어(Idea)의 모습으로 다가오니 인간은 그것이 자신을 삼키려는 거짓신인지도 모르고 그 아이디어를 받아들인다. 그래서 작가들이나 사상가들 심지어 과학자들도 이를 영감이라 부른다. 더 이상 그리스 종교 광신자들이 섬기던 신 이데아가 아닌 인간의 아이디어 영감으로 자신을 포장한 것이다.
그래서 문예부흥 이후에 소개된 그리스의 종교는 더 이상 종교가 아닌 철학으로 소개되었다. 원래는 지혜를 추구하여 지혜의 최종신인 이데아로, 신적인 존재로 윤회를 통해 상승하기를 원했던 종교가 철학으로 둔갑하여 인류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사실 과거에 인간들을 미혹시켰던 소크라스의 다이몬이 또다시 인간들을 다른 가면을 쓰고 미혹시켰을 뿐이다.
그런데 신이라는 이름은 삭제했다. 그래서 무신론의 세상을 만들었다. 그래야 신에게 반기를 든다는 명분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신을 삭제함을 우리나 원수 자신도 인간의 개념에서 삭제를 했다. 그래야 신이 아닌 자신이 참신이 우리와의 대결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중세를 통해 인간들에게 나의 이름 예수를 참칭 하여 다가가 억압과 착취를 했던 거짓 영은 이제 그 모든 원망을 나에게 투사케 했다. 그래서 인류가 신에게 반기를 들도록 조종했다. 그래야 인간들이 참 신인 나를 비웃고 나에게 다가올 수 없기 때문이다. 원수는 신이라는 이름을 삭제함으로 나를 인간들의 세상에서 삭제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자신은 인간들에게 원리나 진리 영감이라는 이름으로 침투해 인간들을 인간들 스스로도 알지 못하게 지배하는 신이 되었다.
그렇게 해서 그 영감의 신은 인간들 스스로 테크놀로지를 발달시켜 과거 내가 세상에 심어둔 공멸 방지툴들을 해체하도록 했다.
공멸 방지툴이나 지금 하고 있는 르네상스의 약탈의 영에 대한 내용들은 사실 성경에 나와 있어도 인간들이 짐작하기 어려운 내용들이다. 특히 공멸 방지툴은 인간들에게 알려서 좋을 것이 없었다. 인간들은 그것을 아는 순간 자신들을 살리기 위한 도구라는 사실보다 반항심이 앞설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깨트리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했을 것이다. 아마 앞의 글을 읽는 너희들도 비슷한 감정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인정하기 싫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아마 대부분은 자신 안에 그런 심리가 작동한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단지 그냥 거부하고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나, 무시하는 마음, 또는 분노가 일어났을 것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경멸하는 마음이 일어났을 것이다. 비웃는 마음 말이다. 그것이 인간의 속성이요. 반역의 본성이다.
르네상스를 통한 문예부흥과 과학혁명은 새로운 문제들을 가져온다. 바로 공멸 방지책이라는 방어막을 인간이 해킹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것은 마지막 공멸의 길을 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