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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2.2.2. 죄와 싸워 이길 전신

by 에스겔

죄와 세상과 사탄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 사탄은 죄를 짓도록 유혹하고 세상은 죄로 말미암아 오염되었다. 죄를 짓고 죄에 속한 곳 즉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곳이 세상이다. 이렇게 죄와 세상과 사탄은 서로 연결되어 죄의 삼위일체를 이룬다. 죄를 짓는 인간이 세상의 통치자이므로 세상은 죄로 물들게 되고 죄의 세상이 된다. 결국 죄의 삼위일체를 떠받치는 것은 죄를 짓는 죄인이다. 인간이 죄를 짓지 않는다면 이런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인간의 공멸의 DNA 즉 죄성을 해결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전에 사탄의 종노릇 하는 인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전신으로 온 것을 언급했다. 그 핵심도 결국 인간이 죄를 이기도록 하는 것이다.


01.3.2.2.2.1. 필멸자(必滅者) 죄인


가인이 아벨을 돌로 쳐 죽이는 사건을 격은 후 아담의 아들 셋은 자신의 아들의 이름을 쓸모없는 자, 또는 망할 놈, 또는 필멸자라고 해석될 수도 있는 에노쉬라고 지었다. 자기 아들의 이름을 이렇게 짓는 자는 없다. 셋과 아담의 가족은 깨닫게 된 것이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된 것이다. 인간은 죄의 탐욕에 물든 망할 놈들이 된 것이다. 인간은 결국 공멸의 DNA를 가지고 멸망을 향해 내달리는 존재가 된 것이다. 존재 자체가 죄에 물든 인간은 구해낼 길이 없다. 스스로 죄를 이기고 싶어도 이길 힘도 없다. 또한 죄를 이기고 싶은 마음도 없다. 온통 죄의 생각뿐이다.


01.3.2.2.2.1.1. 필멸자(必滅者)의 죄성


너희 인간은 죄에 얼룩졌지만 이름이라도 의를 행할 때는 자기 자랑으로 마음이 뿌듯해진다. 가난한 자들을 도울 때에도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자 이름을 게시한다. 또 어떤 자는 더 의로운 것처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자기 이름을 숨긴다. 그러나 이미 마음속에는 자기 의로 가득 찬다. 자신은 그렇게 선을 행하는 자인 것이다. 그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뿌듯하다. 사실 알고 보면 그 선의 숨은 내면을 살피면 동기가 순전하지 못한 경우가 상당하다. 어떤 자들은 다른 이가 자신을 착하게 봐주기를 원하고 자신 스스로도 그렇다고 생각하기 위해 선을 베푼다. 그런 후 누군가 자신을 알아주지 않고 자신에게 수치심을 느끼게 하면 분노한다. 또는 자기가 옳음을 나타내기 위해 선행을 행한다. 그것으로 다른 사람들 위에 서서 판단한다. 그렇게 판단하는 목적이 있다. 결국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나은 자임을 자타가 공인하게 만드는 것이 목적이다. 이 동기들은 결국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고 자신의 편인 사람들이 자기를 위해 움직이도록 조종하거나 자신의 옳음으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기질의 사람들이 세상에서 가장 착하고 옳다는 인정을 받는다. 그러나 이 모든 착하고 옳다는 자들이 사는 동기는 빼앗고 도둑질하는 것이다. 타인의 마음을 빼앗아 자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여 자신을 위해 이용당하게 하는 것이다. 자신은 착한 사람이므로 자신이 당하는 상황은 억울하니 자기를 편들어 달라는 것이다. 또는 자신은 옳으므로 자신의 옳은 가치를 따라 움직이는 것이 마땅하다고 자신과 타인을 속인다. 그러나 그 속에 숨어있는 진정한 진의는 타인을 자신을 위해 움직여 이용하는 것이다. 심지어 노동의 대가도 지불하지 않고 움직이게 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것을 성실하게 하지 않으면 옳지 않은 인간들이라 낙인을 찍어버린다. 그래서 타인이 자기를 위해 억지로라도 움직이게 만든다. 역시 인간은 도적질 하는 자, 마귀의 자식들이다. 바로 독사의 새끼들인 것이다. 심지어 대부분의 인간들은 플라톤의 동굴의 우화와 같이 사악한 자신이나 타인의 모습을 모르고 죽을 때까지 산다. 어려서부터 사악하게 살아 개인적인 심판을 부른다. 결국은 전체의 죄가 뭉쳐 공멸의 심판을 부른다. 그런 자신들의 상태를 모르고 왜 이런 재난과 심판을 당해야 하는지 하늘을 향해 삿대질을 한다. 그것이 인간의 상태다.

그럼에도 너희 대부분은 이 설명에 동의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인간의 죄성에 대해 알 수 있도록 예를 들어 쉽게 설명해 나가겠다.


01.3.2.2.2.1.2. 죄성의 뿌리: 자기 중심성


이런 너희 인간이 죄를 이길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인간의 욕망 자체는 죄에 뿌리를 두고 있다. 기본적인 의식주와 생존에 대한 욕구가 충족되면 가장 먼저 작동하는 것이 자존심이다. 그것을 위해 기질별로 다양한 행동양식을 보이지만 생존욕구 바로 다음에 작동하는 것은 이기적 자아다. 그 이기적 자아가 바로 자존심이다. 그것은 자기 중심성이고 자신을 위주로 세상을 보는 눈을 가진다. 자기의 명예와 자기의 이익, 그리고 자기의 자존심은 서로 연결되어 하나와 같이 작동한다. 이 이기적 자아가 바로 욕망의 뿌리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자아를 처리할 수가 없다.


01.3.2.2.2.1.2.1. 자기 중심성의 역사


이 이기적 자아가 가인 안에서 작동하여 자기 동생을 별 이유도 없이 들에서 돌로 쳐 죽인다. 이유는 우주가 자기를 중심으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을 인정하지 않고 동생을 인정한 하나님에 대한 반항으로 동생을 죽였다. 자아 중심성은 모든 가치의 판단이 자기이며 자기 자존심이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한지 사람들은 묻지만 자신 안에도 이 괴물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렇게 자아 중심성이 작동을 해도 보통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조차 눈치채지 못한다. 자아 중심성은 또한 라멕 안에 작동하여 소년과 아이를 죽인다. 소위 용사와 영웅이라는 자들 안에 작동하여 다른 자들의 것을 착취하고 다른 도시의 자원을 빼앗고 다른 국가를 멸망시킨다. 인간은 이기적 욕망을 발현해 전쟁 강간과 살인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것을 당연시 여긴다. 과거뿐 아니라, 최근의 역사에서도 이것이 여실히 드러난다. 아프리카의 시에라리온에서는 다이아몬드가 피를 부른다. 우간다에서는 아이들에게 마약을 먹여 전쟁도구로 길러낸다. 그 아이들은 자신의 형제와 마을 사람들을 죽이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그들은 더 이상 인간으로 취급받지 못하고 마약에 취한 살인 도구로 취급받는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의 이기적 자기 중심성이 만들어낸 참극들이다. 이 모든 것은 인간이 도구질하고 빼앗고 멸망시키는 사탄의 속성을 받아들여 사탄의 형상을 가지게 된 데서 출발한 것이다. 사탄의 마음과 정신을 닮은 자들이 저지를 만행이 자기 중심성의 역사다.

이 자기 중심성은 개인의 삶과 사회와 국가를 그 악함으로 인한 멸망으로 이끈다. 결국 지옥도가 되게 한다. 이기적 중심에서 시작된 착취는 신분질서라는 구도 안에서 아래로 갈수록 더 극심한 무게를 가중시키는 흉악한 착취를 만들어 낸다. 힘이 없는 하부 구조에 속한 자들이 가장 극심한 고통을 당하게 만든다. 이런 자기 중심성의 폐해에 대해 계속 여러 예를 들어 살펴보겠다.


01.3.2.2.2.1.2.2. 자기중심적 사랑


인간 내면의 깊은 자기 중심성 즉 이기적 자아는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짙게 인간을 장악하고 있다. 인간은 가장 위대한 가치인 사랑조차도 오염된 구정물로 만들어버린다. 일반적인 사람의 성적 행위의 동기는 자신의 쾌락이다. 그것에서 조금 발전하면 상대를 만족시키고 그것을 통해 자신의 성취감을 얻는다. 대부분의 남자들의 심리가 이와 같다. 여자들은 그 행위를 통해 근본적으로 자신의 쾌락을 추구한다. 조금 더 발전하면 상대가 자신에게 빠져들어 헤어 나오지 못하도록 만든다. 이성적 또는 성적 매력으로 상대를 유혹하고 자신에게 빠져들게 만든다. 그래서 자신만을 사랑하게 하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상대가 충족하게 만든다. 그것이 세속적 사랑인데 이 사랑은 전혀 이타적이 아니다. 자신의 만족과 유익을 구한다. 내가 단지 사랑하는 행위나 성적 행위를 공격한다고 생각한다면 나의 말을 너희는 오해했다. 나는 사랑하는 행위나 그 사랑으로 인한 육체적 관계를 성스럽게 여긴다. 그러나 성을 스포츠로 여기고 또 상대를 쾌락의 게임을 즐기기 위한 도구로 여기는 기본적인 생각들을 질타하는 것이다. 여자나 남자의 성을 돈으로 사고 또 자신의 지위나 성적 매력으로 상대를 사로잡아 가지고 노는 것을 책망하는 것이다. 상대를 사랑을 빙자하여 평생 돈 벌어오는 노예로 또는 자신의 쾌락을 위한 성 노예로 만드는 것을 경멸하는 것이다.

상대의 조건이나 상대가 가진 어떤 것이 아닌 진정 상대의 마음을 어여삐 여기고 그 한 사람 자체로 만족하고 그를 귀히 여기는 것이 사랑이다. 그가 가진 것이 무엇이든 그를 이해하고 용납하고 그 사람 안에 있는 그 영혼의 순수성과 가능성을 보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살인자의 영혼에서도 그의 아기적 순수함을 보게 해 준다. 사랑은 믿어준다. 사랑은 용납한다. 사랑은 감싸준다. 사랑은 가치 없는듯한 상대가 가치를 가지게 한다. 사랑은 위대하여 보잘것없는 촌부와 시골 아가씨를 세상의 가장 귀중한 보석과 같게 한다. 사랑의 콩깍지는 모든 것을 충만하게 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심지어 상대의 생김새나 상대의 성품의 우아함과도 별개로 상대를 가장 아름답고 매력적인 존재로 만든다. 사랑하면 상대의 무식한 사투리나 심지어 욕설도 매력적으로 보인다. 상대의 까칠하고 반항적인 성격도 매력적으로 보인다. 거칠고 와일드한 외모도 사랑스럽게 보인다. 사랑은 뚱뚱한 여인을 세상 최고의 매력적 몸매를 가진 마돈나로 둔갑시킨다.

사랑은 상대를 위해 모든 것을 내어놓는다. 이기적 자기 중심성을 벗어난다. 사랑은 모든 것의 중심이 상대로 이동하는 것이다. 우주의 모든 중심이 상대가 된다. 가치판단의 기준이 상대가 된다. 내가 원하는 것이 아닌 상대가 원하는 것이 내가 기뻐하는 것이 된다. 음식도 내가 원하는 것보다 상대가 먹고 즐거워야 나도 먹고 기쁘다. 내가 입는 옷도 상대가 마음에 들어야 나도 마음에 든다. 나의 직업도 내가 기뻐함도 있어야 하지만 궁극적으로 상대가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모든 삶의 궁극적 회전축이 상대로 전환된다. 사랑은 모든 것을 굴복하게 만들며 자신의 모든 존재를 팔아서라도 상대의 마음 한 조각을 얻기를 원한다. 사랑은 노예가 되는 것이다. 사랑하는 자는 상대의 아래에 존재하게 된다. 바로 자발적 노예가 되기를 꿈꾼다. 자신의 모든 것, 평생도 내어주고 결국에는 상대를 위해 목숨도 내어놓는다. 사랑은 위대하여 전능자도 자신을 버려 사랑하는 죄인을 위해 죽게 만든다. 그래서 나는, 우리는 사랑이다. 사랑은 가장 위대한 우리의 가치이자, 너희 인간들을 우리가 만든 동기이기도 하다.

그런데 너희의 사랑은 어떠한가? 너희의 사랑은 상대의 재정과 권력과 명예 그리고 안력(眼力) 즉 얼굴의 힘인 아름다움을 가늠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을 빙자하여 상대의 이용가치를 가늠하는 것이다. 사랑은 상대를 위하여 자신을 내어주는 노예가 되는 것인데 너희의 사랑은 상대를 노예로 만들어 착취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너희는 가장 위대한 가치인 사랑도 오염시켜 역한 냄새를 풍기는 폐수가 되게 한다.


01.3.2.2.2.1.2.3. 자아실현: 자기 중심성의 다른 이름


이렇듯 자기 중심성은 자신이 우주의 중심이 되게 한다. 모든 목적이 자신이다. 자기를 위해 모든 것이 존재해야 한다고 믿는다. 모든 우주의 움직임이 자신의 이기적 쾌락을 위해 작동하기를 바란다. 사랑도 친구도 형제도 모든 것은 자신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소위 자아실현은 가장 사악한 자기 중심성을 거짓으로 아름답게 포장한 속임수에 불과하다. 사랑은 자아 즉 자기를 실현하지 않는다. 상대를 사랑하여 상대가 원하는 것이 이루어지게 한다. 사랑은 자신을 위한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사랑하는 이의 행복을 위한 계획을 세운다. 가장 순박한 인간의 본성을 따른 사랑은 이와 같다. 그래서 순박한 시대의 사람들은 사랑하는 이를 위해 평생을 바쳐 일하며 그 사랑하는 이와 함께 맺은 결신인 자신들의 아이들을 위해 헌신한다. 그리고 그 희생과 헌신에서 보람을 얻고 그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을 보며 자신도 행복해한다.

자아실현은 자기의 만족을 구한다. 그러니 그런 가치를 주입받게 되면 자기를 위한 계획을 세운다. 자기의 행복과 자기의 가치를 추구한다. 그것을 위해서는 다른 모든 것은 방해물로 전락한다. 사랑하는 상대를 위해 일을 하고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자기를 즐겁게 하지 못함으로 싫어한다. 내가 상대를 위해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나를 위해 희생하기를 원한다. 심지어 옆에 자신이 아닌 타자가 있는 자체가 불편을 감수해야 하므로 결국 타자와의 결혼 자체도 거부한다. 사랑의 결실인 자녀도 희생을 요구함으로 자아의 만족 즉 자아실현에는 방해가 된다. 그래서 출산도 거부한다. 가장 아름다운 가치인 사랑의 행위에서 둘의 하나 됨 즉 마음의 하나 됨도 거부한다. 자신의 마음의 중심성만을 고집한다. 그 이기심은 결국 하나 됨을 깨뜨려 이혼에 이르게 한다. 자신을 다듬어 상대에게 맞는 배우자가 되기보다 상대가 자신에게 맞추어주기를 바란다. 또한 사랑하여 몸이 하나가 되고 상대와 몸을 통해 하나 됨의 즐거움을 누리는 성도 자기 쾌락을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상대를 통해 자신의 쾌락을 추구한다. 상대를 성적으로 매력 있게 보이게 하는 호르몬의 효과가 떨어지는 6개월이 지나면 상대의 성적 매력이 느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상대를 버리고 다른 상대를 찾아 또 떠난다. 또는 결혼 관계 안에서 외도를 하여 상대의 마음을 찢어놓는다. 결국 그런 배우자는 여러 번의 외도의 죄를 짓게 되고 가정을 깨뜨리는 경우가 많다. 그러한 자들은 성을 게임화하여 즐기며 상대를 유희의 도구로 만든다.


01.3.2.2.2.1.2.4. 자기중심적 탐욕


자아 중심성은 존재적 타락이요 궁극적 타락이다. 그 이기심은 모든 것을 집어삼킨다. 자신의 탐욕을 위해 가족을 희생시킨다. 그리고 타인의 밭과 집을 삼킨다. 밭에 밭을 덧대고 집에 집을 덧대는 탐심을 질타한 예레미야를 기억하는가? 그 탐심은 자신의 마을을 집어삼킨다. 마을을 지배하게 된 탐심은 다른 마을을 삼킨다. 그리고 자신의 부족을 삼키고 다른 부족도 삼킨다. 그 탐심의 축적을 위해 집적된 도시를 만든다. 그리고 자신의 탐심을 만족시킬 제국을 꿈꾼다. 그 모든 것은 자신의 이기적 자아가 중심이 되어 만드는 것이다. 제국을 이룬 자들은 결국 자신이 신이 되기를 꿈꾼다. 그래서 세상의 대부분의 황제라는 자들이 자신들을 천자 즉 하늘의 아들, 신의 아들로 칭하거나 자신의 이름을 신의 이름으로 둔갑시키려 노력했다. 중국의 황제들이 그러했고 로마의 황제들이 그러했다. 또한 앗시리아나 바벨론, 페르시아의 황제들이 그러했다. 이집트의 바로는 자신이 신이었다. 인간의 자기 중심성은 모든 우주의 중심이 자기에게 몰입되기를 바란다. 그래서 자신이 우주의 중심 즉 신이 되기를 갈망하는 반역에 이르게 된다. 자아 중심성은 모든 것을 자신의 중심으로 자기의 소유로 만들기를 원한다. 현대에 있는 모든 국가의 제도들은 이러한 뿌리에서 출발했다. 만약 이런 탐욕이 없었다면 국가는 발생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원래 개인과 가정의 삶을 사는 데에는 국가의 제도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타락한 욕심과 그에 따른 폭력성이 없었다면 보호라는 것이 필요치 않기 때문에 공권력이란 존재할 이유가 없다. 세금을 착취하고 노동력을 징발하고 아들과 딸을 빼앗아가는 국가라는 존재는 사실 인간의 타락과 함께 등장한 것이다. 그것도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악한 권력자들 즉 폭력의 착취자들에 의해 고안되었다. 심지어 민족이나 국가의 개념을 강조하게 된 것도 사람들을 효과적으로 속여 착취하려는 자들이 고안한 지배 이데올로기에 불과하다. 아시아는 보다 빨리 민족적 국가 또는 제국적 국가들이 전제 정권을 수립했다. 유럽에서 절대왕정이라 부르는 제도가 아시아에 이미 일찍 자리 잡은 것이다. 이렇게 절대적 왕권이 존재하는 곳에서는 민족이나 나라의 개념이 일찍 자리 잡았다. 그 이유는 국가나 제국을 통치하려면 그 국가 내의 백성들을 하나로 뭉치기 위한 세뇌 수단이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너희는 같은 민족 또는 같은 제국에 속한 자라고 말하는 공동체 의식이다. 그런데 이 공동체 의식이라는 것이 알고 보면 참 공동체를 위한 이념(이데올로기)이 아니다. 집단적 이기주의를 부추기는 수단일 뿐이다.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하고 이를 위해 다른 집단의 것을 도둑질하고 빼앗고 결국에는 다른 집단을 집어삼켜 멸망시킨다. 마치 우는 사자가 두루 삼킬 자를 찾는 것과 같이 포악한 집단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국가 또는 민족에 충성하는 일의 실상이다. 사실 전 인류는 하나의 공동체요 서로가 서로를 사랑으로 돌봐야 하는 가족이다. 그런데 그 안에서 분열을 조장하고 서로가 서로를 적대시하고 공격하며 모든 타자들이 죽거나 힘을 잃어 피지배를 당할 때까지 괴롭히는 것은 참으로 비참한 일이다. 이런 일을 부추기기 위해 수많은 지배 이념(이데올로기)들이 사용되었다. 지금도 우리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지배 이념(이데올로기)에 의해 세뇌당해 조종당하고 있다. 실제로 절대적 전제정이 늦게 등장한 유럽에서 민족과 국가의 개념은 근대에서야 등장을 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맺어진 결실이 1, 2차 세계대전이라는 전대미문의 대학살극이었다. 결국 민족의 개념을 강조하여 결집된 국가들은 서로가 서로를 잡아먹기 위해 끝없이 싸우는 비참한 학살극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왜일까? 그것은 그 고안한 목적이 탐욕에 젖은 사자가 온 세상을 삼키기 위해 사람들을 세뇌한 개념이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의 이기적 탐욕과 국가적 탐욕은 항상 죽음의 피비린내를 온 세상에 가득하게 한다.

나는 지금 타락한 너희 인간들이 타락한 세상에서 국가를 이루어 최소한의 자기 방어를 하는 것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이 모든 제도를 해체하면 바로 옆에 있는 탐욕에 젖은 짐승들이 너희를 집어삼킬 것이다. 나는 단지 국가나 민족의 개념이 어떻게 너희 인간들을 착취하고 결국에는 온 세상을 분열케 하고 타자들을 착취하고 전쟁의 폭력으로 포로 삼고 타자의 국가를 멸망시키는지에 대한 근간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국가나 민족도 단지 역사의 세월에 있었던 수많은 착취자들의 다양한 세뇌 수단들 중 일부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이려는 것이다. 이렇게 근원적 시각으로 보면 인간의 역사는 자기중심적 탐욕이 만들어 낸 비극적 서사다.


01.3.2.2.2.1.2.5. 자기중심적 나태


탐심이 없는 것 같은 자들도 다양한 형태의 병듦으로 자아 중심성을 나타낸다. 한 없이 게으른 자들은 자기의 편함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한다. 생각도 하지 않으며 일하지도 않는다. 심지어 다른 사람과 갈등하기 싫어서 다른 이와의 대화도 단절한다. 또는 귀찮게 구는 사람과 갈등하기 싫어 그냥 '네'라고 대답해 버린다. 그리고 그 일이 힘들면 그냥 하지 않는다. 그리고 상대가 '왜 안 했느냐?'라고 따질까 봐 미리 상대를 피해 버린다. 상대가 전화해도 받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모든 상황을 자신이 감당하는 것이 귀찮고 싫다. 그의 삶은 모든 것이 포기며 모든 것은 귀찮음으로 결론 난다. 심지어 생각을 하는 것도 귀찮아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 반면 좀 잘하게 되어 쉬운 것은 열심히 한다. 쉽게 결과를 내고 쉽게 칭찬을 받는 것은 기뻐한다. 이런 사람들은 옆에 있는 모든 사람들을 힘들게 한다. 노력하지 않는 삶의 결과는 언제나 옆에 있는 사람들이 감당해야 한다. 모두에게 짐만 되는 삶을 살아간다. 현실생활에 적응을 못하고 게임에 빠져들기도 한다. 그 결과 세상에서 도태되어 가장 힘든 막노동 현장으로 내몰린다. 그곳에서도 일을 나오고 싶으면 나오고 나오기 싫으면 안 나와 버린다. 모든 신뢰는 바닥으로 떨어지고 그곳에서도 도태된다. 결국 방구석에서 히키코모리가 된다. 이들의 자아 중심성은 자기를 편하게 하는 것으로 집중된다. 그 편함을 위해 모든 것은 존재해야 한다. 결국 자신이 자신의 삶을 책임지지 않는다. 그것도 자기를 불편하게 하기 때문이다. 힘든 것은 무엇이든 포기한다. 그러면 타인이 그것을 감당해야 한다. 은행일도 핸드폰 사용도 힘들어한다. 그 모든 일상의 기본적인 일들을 처리하는 것도 모두 옆에 있는 가족이 감당해야 한다. 장애인도 아닌데 장애인과 같이 보살펴야 한다. 그러니 옆의 사람들은 속이 터진다. 결국 속이 썩어나가 화병이 든다. 그래도 자신만 편하면 되는 것이 이런 사람들의 자기 중심성이다. 가족이 점점 많은 화를 내기 시작하면 드디어 방문을 잠가버린다. 가족들의 충고의 말도 듣기 싫어서 대화를 중단해 버린다. 그리고 게임중독이나 알코올중독에 빠진다. 게임해서 돈을 좀 벌면 마약에 까지 손을 댄다. 결국은 가족들도 포기한다. 그러면 길거리의 노숙자가 되고 잠재적 범죄자가 된다. 쉽게 돈을 얻을 수 있는 길을 택하는데 강력범죄부터 좀도둑질까지 자신의 기질과 형편에 따라 그 범죄의 형태도 다양하다. 가장 악한 것은 같이 살던 가족들의 집에 들어가 몰래 돈을 들고 나오거나 폭력을 행사해 돈을 빼앗는 것이다. 다른 불특정 범죄 피해자들은 한번 당하면 끝이지만 가족들은 지은 죄도 없이 평생을 당해야 한다.


01.3.2.2.2.1.2.6. 자기중심적 옳음(의)


어떤 이들은 스스로 옳기를 구하는 탐욕에 빠져 있다. 이들은 바른생활 모범생들이다. 그런데 이들의 옳음의 기저의 동기를 살펴보면 그것은 이기적 탐욕에서 출발한다. 이들은 남들보다 항상 옳기를 원하다. 그래야 자신의 옳음으로 다른 사람들의 기를 죽이고 심지어 그 옳음을 따르라고 다른 사람들을 세뇌하여 자신의 지배하에 두고 충성을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은 옳으며 그러니 너희는 나의 말을 지키고 따라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들은 사람을 조종하고 자신의 말을 따라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게 만드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

사회적 집단이나 민족적 집단이 이런 지배 유형을 가지기도 한다. 종교나 법으로 옳음을 내세우고 너희를 속여 지배한다. 유교나 대부분의 종교적 이념들이 이런 유형의 지배 이념에 속한다. 자신들은 진리이고 그러므로 자신들의 진리에 따라 너희는 순종하고 충성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그 목적은 언제나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착취에 있다. 그것이 진리라고 세뇌당하면 너희 인간들은 돈을 빼앗긴다. 또한 너희 모든 삶의 영역에서 그 진리라는 것은 너희의 지배자가 된다. 보이는 곳과 보이지 않는 모든 곳에서 너희는 스스로 노예가 되어 지배를 당한다. 그 종교와 법을 집행하는 최상위의 인간들의 목적을 위해 너희는 그들이 전파하는 것을 믿고 따르고 충성을 다한다. 그것이 옳다고 해서 그것을 따르지만 결국 악한 인간들이 시키는 것을 하고 그들이 원하는 것을 이루는 도구가 된다.

유교는 사실 공자가 만들어낸 공교한 속임수다. 공자는 백성들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 천자 즉 황제는 하늘의 아들이며 하늘을 섬기듯 그를 섬겨야 한다고 강조한다. 부모에 대한 섬김과 스승에 대한 섬김을 강조하는데 그 결국은 부모와 스승 위에 있는 왕에 대한 충성을 강요하기 위한 것이다. 또 여자는 남자를 섬겨야 한다. 종은 주인을 섬겨야 한다. 또한 천민은 일반 백성 앞에서 개나 돼지 취급을 당하며 그래도 그들은 자신의 본분을 다하며 자신이 맡은 생산 분야에서 군말 없이 최선을 다해야 한다. 이것을 신분질서화 해서 그것을 법으로 만든다. 이것이 유교의 기본적인 골격인데 그 목적은 오직 천자가 백성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것을 합리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백성이 맹목적으로 희생을 강요당하며 왕에게 충성을 다하도록 세뇌하기 위한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 공자는 역사조작도 서슴지 않았다. 과거에 있었던 은과 주 나라의 역사도 날조를 한다. 그 목적은 오직 하나다. 천자를 신격화하기 위한 것이다. 그 역사를 통해 천자들의 통치는 태평성대였으며 마치 지상낙원과 같이 묘사되기도 한다. 그리고 악한 황제들은 거의 없는데 그 악한 황제를 폐위시키고 새롭게 세워지는 황제들은 항상 지상낙원을 가져온다. 이것을 통해 현재 자신들을 지배하고 있는 황제가 권력을 유지한다는 것은 그 황제의 통치가 옳으며 완전하다는 것을 반증하는 증거로 삼는다. 하늘이 있으니 하늘이 황제의 통치가 계속되도록 하는 것은 그 황제가 옳은 황제임을 하늘이 보증하는 것이라 속인다. 황제가 지배하는 신분질서가 있는 제도 안에서 고대의 유토피아 건설이 가능함을 보증하는 종교 체계는 자신이 당하고 있는 착취와 지배가 옳은 것이며 그것을 통해 지상낙원 건설이 가능하다는 것을 암시한다. 그 암시를 통해 세뇌된 인간들은 감히 자유라는 것을 꿈꾸지 않는다. 자유는 악한 것이며 자신이 노예 상태를 벗어나려는 것은 유교의 진리에 어긋나는 악한 것이라 생각하게 만든다. 결국 신분질서 상 상위에 있는 소수의 무리와 그 정점에 있는 황제만을 위한 제도다. 심지어 어리석은 인간들은 유교의 덕목을 따라 자신들을 착취하는 가장 악한 자인 왕을 위해 충성을 다하며 전쟁터에서 목숨을 내어놓는다. 그렇게 자식을 잃은 부모도 세뇌를 당해서 자식을 전쟁에 내보내 죽인 황제에게 충성을 다한다. 그리고 유교의 세뇌를 당해 억울하게 전쟁에서 죽은 아들의 충성이라는 행위를 자랑스럽게 여긴다. 사실 그들의 아들들은 사기를 당해 전 인생을 도둑질당하고 목숨까지 빼앗긴 것이다. 이런 끔찍한 종교적 메커니즘은 바로 황제의 자기중심적 옳음에 그 근본을 두고 있다. 이 종교적 진리가 옳으니 이것을 따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거짓 진리를 위해 목숨까지도 걸고 순종하고 충성을 다하라는 것이다. 지금은 지배 이념이 바뀌었기에 너희 중 누구도 왕을 우해 목숨을 버리려 하지 않는다. 왕이라는 자의 지배와 신분질서의 지배를 통해 누군가 너희를 억압하려 하면 너희는 목숨을 걸고 저항할 것이다. 그런데 그 시대에 그곳에 살았던 자들은 세뇌를 당하여 그것이 법이고 진리요 삶의 진정한 이치라 믿었다.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그 세뇌당하는 지배 원리는 달라져도 항상 세뇌당하여 사기꾼들에게 이용당하는 어리석은 역사들을 기록해 왔다.

유럽의 중세는 나의 이름을 표방하는 거짓 기독교가 이런 메커니즘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이런 자기중심적 옳음으로 타인을 착취하고 지배하는 자들은 그에 마땅한 벌을 받을 것이다. 심판의 날에 그들이 받아야 할 형벌은 그들이 타자들을 착취하고 괴롭힌 것에 비해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들은 살아 있는 사람들에게 지옥도를 경험케 하는 죄를 지었다. 주인에게 아내가 겁간을 당하고 그 일을 따졌다가 남편은 멍석말이를 당해 죽는다. 그리고 아내는 계속 주인에게 겁간을 당하고 이를 견디지 못하고 우물에 몸을 던진다. 그럼에도 그 종의 아들은 부모를 죽인 원수를 주인으로 섬겨야 하며 충성을 다해야 한다. 그것이 법이요 윤리라고 강요당한다. 그러다 억울함에 부모의 원수를 갚으려다, 신분사회질서라는 거짓 메커니즘에 막혀 종의 아들은 결국 맞아 죽는다. 이렇게 사람이 셋이나 죽어도 주인은 신분질서라는 거짓법에 의해 보호를 받으며 아무 처벌도 받지 않는다. 이것이 지옥도가 아니겠는가? 그 일을 당한 일가족의 삶은 지옥이며 그들의 마음은 지옥의 고통으로 가득하다. 이 죄를 어찌 감당하려고 인간들은 이런 죄들을 양심의 가책도 없이 짓는지 이해할 수 없다.

현대에는 신분질서나 지배구조가 다원화되어 이런 신분제나 지배구조가 사라진 듯 보인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더욱 교묘하고 더욱 정교하게 너희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여전히 돈과 권력의 메커니즘을 따라 사회의 귀족층들이 존재하고 그 귀족의 최종 권력자가 존재한다. 더 많은 자유를 주고 더 많은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는 것 같다. 하지만 알고 보면 과거보다 많이 받는 대신 과거보다 수십 배의 노동력을 더 착취를 당한다. 임금으로 받은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착취자들이 생산한 주택이나 전자제품들을 사는데 소비한다. 결국 빚까지 내어 그런 것들을 산다. 결국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다시 착취를 당하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들은 그것이 착취인지 알지도 못한다. 재료비 몇 만 원이면 만들 수 있는 전자기기들을 수백만 원씩 주고 구매를 한다. 과거에 몇 년 일하면 살 수 있었던 집을 평생을 일해도 살 수 없어 빚을 지고 그 빚에 대한 이자와 원금을 평생 갚는 노예 생활을 하면서도 자신의 비싼 집을 보며 자신은 좋은 자산을 얻었다며 기뻐한다. 사실 이것은 착취를 당하는 노예 생활이다. 그런데 너희는 속아서 그 사회 메커니즘의 유혹을 받아들이고 그 제도가 옳다고 믿는다. 경제의 지배 구조뿐 아니라 법의 지배 구조도 너희를 착취하고 지배한다. 모든 사회의 착취와 지배 구조는 법이라는 거짓 진리의 메커니즘에 의해 보호되고 활성화된다. 그 궁극적 목적은 항상 탐욕에 젖은 인간들이 서로서로를 착취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그리고 최상위의 포식자가 모든 것을 독점하도록 만드는 데 있다. 황제와 같이 혼자 독식할 수 없으면 최고 단위의 소수의 그룹이 그것을 독식한다. 황제가 없으므로 이런 구조는 민주적이라 하여 인간들을 속여 더 극심하게 종속시키고 노예화한다. 사실 황제가 없는 것이 아니다. 단지 다원화된 메커니즘에서 여러 황제들이 각자 자신들의 제국을 세우고 금융의 제국에서는 금융의 황제가 사람들을 착취한다. 그리고 권력의 메커니즘에서는 권력의 황제가 황제라는 이름 없이 공동체의 대표라는 직함을 걸고 사람들을 착취한다. 세상의 각 분야와 각 영역에는 이런 메커니즘들이 작동하고 그 안에서 지배와 착취의 구도가 형성된다. 이렇게 너희 시대에는 다원화되고 다양화된 다층적 지배와 착취의 구도가 있다. 그런데 너희 시대 안에 있는 대부분의 인간들은 자신들의 시대가 어떠한지 분별할 수 있는 눈이 없다. 단지 너희 시대에 너희를 세뇌시킨 신흥 종교의 법(메커니즘, 이데올로기, 이념)이 옳은 줄 알고 그것을 따라 충성을 다할 뿐이다. 그리고 착취와 억압과 지배를 당하면서도 거짓 메커니즘에 세뇌되어 자신은 자유이며 평등을 누리고 있다고 착각하는 착시 현상을 경험한다. 조삼모사와 같은 상황에서 오늘은 어제보다 현재는 과거보다 낫다고 착각하며 산다. 그렇다면 왜 자살률은 점점 더 그 수치를 높여 세계 1위가 되고 너희 대한 민국이라는 나라는 우울증 공화국이 되어가고 있겠는가?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겠는가? 너희의 정신은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지만 이미 너희 마음은 그 일들을 당하고 그래서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으며 이미 병들었다. 마음이 병드는 것은 그만한 고통을 당한 반증이라 할 수 있다. 너희는 점점 좋아지고 있는 세상에 살고 있는데 왜 마음만은 그 반대로 느껴 더 큰 병이 드는 걸까? 생각해 보라. 과연 점점 좋아지고 있고 사회보장은 점점 발전하고 있는 것이 사실일까? 조금 더 주고 그 몇 배를 착취한다면, 조삼모사로 속임을 당하고 있다면 너희 마음의 병듦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01.3.2.2.2.2. 필멸자(必滅者) 죄인의 길


탐욕을 가진 자들은 일반적이고 다수에 속하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나태함을 가진 자들은 소수일 수도 있다. 또는 한 사람 안에 두 가지 모두를 가지기도 한다. 위에 든 예들은 일부에 불과하다. 인간들의 상태들은 다양하다. 그것을 모두 나열하려면 한 사람에 대한 분석도 책 수십 권에 달하는 분량이 될 것이다. 또한 각 개인 모두를 분석하는 것은 우리 하나님만 하면 되는 일이다. 너희는 사실 너희 각자의 것만 우리를 통해 듣는데도 인생의 시간이 모자란다. 어찌 되었든 인간의 자기 중심성은 다양한 형태와 근본 동기, 그리고 겉으로 드러난 페르소나를 가지지만 결국 모두 절망적이다. 이러한 인간 개인의 망할 속성들이 모여 공멸의 DNA를 형성한다. 그 공멸은 결국 인간 타락의 본성에 기인한 것이다. 그 본성이 회복되지 않으면 인간은 소망이 없다. 너희는 각자의 이기적 본성과 그것이 모여 이루는 공멸의 DNA로 인해 멸망할 것이다. 이런 인간의 죄성을 과연 너희 인간은 극복하고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인간은 필멸자(必滅者)이며 그 죄인의 길은 공멸로 종결된다. 그러니 어찌하랴. 너희를 어찌하랴.


01.3.2.2.2.3. 스스로 된 구원자


너희는 너희의 상태가 이러한데도 구원자를 구하지 않는다. 구원자가 필요하다는 것도 자각하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나 스스로 구원자가 되었다. 머리에는 구원의 투구를 가슴에는 의의 흉배를 붙이고 진리의 검으로 무장하고 너희의 원수 사탄과 죄와 그 죄의 세상 메커니즘을 대항해 싸우는 전신이 되었다. 나는 스스로 인간이 되어 너희를 대신하여 죄를 이겼다. 그리고 죄의 세상 메커니즘에 종속되지 않고 그것을 이겼다. 그리고 사탄은 이미 내가 두 번째 아담으로 탄생함으로 이겼다. 탄생 이후의 모든 삶에서도 사탄의 유혹을 이겼다. 또한 그 이김을 너희에게 주었다.

또 너희는 죽지 않는 한 그 죄성을 버리지 못함으로 나는 너희를 대신하여 죽어 너희 죄의 육신을 멸하고 그 안에 있는 이기적 자아중심성을 멸했다. 그리고 새로운 피조물로 부활하여 너희를 대신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을 받았다(롬 1:3) 그러니 이제 너희는 나를 믿으라 그러면 너희는 생명이 전환되는 경험을 할 것이다. 나의 능력이 성령을 통해 너희에게 전달되어 너희는 옛 몸이 죽지는 않았지만 이제 그 낡은 몸에서 새 피조물로 거듭날 것이다. 그리고 우리 신의 아들의 본성으로 회복되어 신(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갈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너희는 너희 죄성의 노예가 아니며 너희 이기적 자기 중심성의 종이 아니다. 이렇게 나는 너희가 죄를 이기는 길을 열었다. 그 죄를 이김 자체가 구원이며 그것이 최종적 승리다.

지금까지는 죄와 인간의 상태에 대해 많은 부분을 설명하고 구원에 관한 부분은 압축하여 설명했다. 그래서 이해가 쉽지 않을 수 있다. 뒤에 나오는 장들에서는 구원에 관한 것을 점점 더 자세히 구체적으로 설명하여 이해에 이르도록 하겠다. 이런 설명 방식을 택한 이유는 너희가 구원의 필요성을 먼저 깨달아야 했기 때문이다. 구원이 필요하다고 느끼지 못하면 구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증도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원에 대해 설명해도 들으려는 마음이 생기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먼저 구원의 필요성을 자세히 설명한 것이다. 이후로는 구원 자체에 좀 더 설명의 무게를 더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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