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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2.2 구원의 성격

by 에스겔

인간 공멸 DNA는 죄성이다. 그 죄성의 근원은 탐욕이다. 탐욕은 거짓에서 시작된다. 즉 자신의 것이 아닌 것을 탐하는 탐심은 그 자체로 거짓에 기반을 둔 것이다. 남의 것을 자신의 것이라 하는 것은 바로 거짓이다. 그 거짓의 속임에서 시작되는 것이 인간의 탐심이다. 그리고 그 속임을 시작한 자 즉 거짓말을 시작한 자는 마귀다. 저는 처음부터 거짓말하는 자요 거짓의 아비다. 이것이 성경에서 제시하고 있는 죄의 근원이다. 죄는 결국 거짓의 탐욕에 기반을 둔 반역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공멸의 DNA다.

성경에서는 신적 결여가 죄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은 헬라인들의 개념이다. 바로 지혜의 근원 일자에게서 멀어진 존재들, 즉 일자 자체를 잊은 결여로 생겨난, 아래로 그 품질이 떨어진 존재들이 짓는 것이 죄라는 개념, 그것은 헬라인들의 개념이다. 둘은 비슷한 것 같지만 근원적으로 다르다. 그리고 그 비슷한 것을 붙들고 가면 결국 그 끝은 완전히 다른 이단(異端, 끝이 다름)이 된다. 그래서 헬라인들이 죄를 해결하는 길은 인간이 다시 일자로 화하는 것 즉 신이 되는 것(신화, 神化, Deification)이라 말한다. 이는 반역이다. 바로 신인 나를 향한 반역이다. 결국 그 끝은 반역이다. 이것이 헬라인들이 말하는 신학의 끝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단이다. 헬라인들이 만든 신학은 이단이다.

역사를 통해 정통교회에서 만들어진 신학 안에 가만히 숨어 들어온 헬라의 가라지들을 분별해야 한다. 그러나 그 신학을 통째로 태워버리는 것은 안된다. 왜냐하면 가라지를 태우려 하다, 알곡도 불살라지기 때문이다. 세상은 끝까지 있어야 하고 세상의 가라지는 그 결실이 맺어진 추수 때에나 분별이 가능하다. 왜냐하면 그 알곡과 가라지 모두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구원은 그 마지막까지 인간이 알 수 없다. 우리는 영원을 살고 모르는 것이 없지만 인간은 한계 안에 있다. 그러니 인간이 구원받지 못할 인간을 판단하여 세상에서 제거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에게 주어진 권리가 아니다. 심지어 우리도 그 인간을 위해 끝까지 참는다. 결국 가라지를 골라 뽑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세상이라는 밭 전체를 불태우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만약 밭 전체를 태우지 않고 가라지만 정확하게 뽑을 수 있다면 그것이 최선이다. 그러나 세상에서 구원받지 못할 자를 찾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내가 그것을 안다 해도 인간의 현재는 그 과정 중에 있기에 내가 그 과정 중에 있는 인간을 미리 심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그리고 그 구원받지 못할 인간들을 미리 죽인다고 해서 세상에서 악을 제거할 수는 없다. 그리고 구원받지 못할 인간들을 통해 태어날 아이들 중에서는 구원받을 자가 나온다. 그러니 내가 미리 죽여 버리면 그들의 후손들 중에 구원받을 자들을 같이 제거해 버리는 것이 된다. 인간들은 짧은 것을 내다보지만 우리는 아주 멀리 내다본다. 그러니 짧고 어리석은 생각으로 문제들을 바라보지 않아야 한다. 그것이 인간이 취해야 할 마땅한 겸손의 태도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가라지를 미리 뽑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그러나 신학은 그렇지 않다. 밭 전체를 태우지 않고 가라지만 뽑는 것이 가능하다. 그 끝이 다른 것은 이단이라 하여 분별할 수 있고 그것을 신학에서 골라내어 뽑아낼 수 있다. 그럼 자유주의 자들이 주장하는 참 복음을 찾는 길 즉 본문비평이 길이 될 수 있는가? 나는 그것은 인간 교만의 발로에서 나온 참으로 주제를 넘는 발상이라 생각한다. 인간이 그럴 자격이 있는가? 감히 인간이 나 예수의 참 복음을 분별할 수 있는 잣대(Canon)가 될 수 있는가? 그럴 수 없다. 오직 우리의 진리만이 그것을 판단하고 분별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 우리의 잣대(Canon)를 판단하여 그중에서 옥석을 가린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성경을 비평하는 자들의 하는 짓들은 이렇게 주제넘은 자들의 광대놀음에 불과하다. 스스로가 그럴 수 없는 어리석은 천치들임을 알지 못하는 코미디언들의 쇼에 불과하다. 그것은 연기로 하는 코미디와도 비교할 수 없는 진정한 코미디다. 그런 짓을 하는 자들이 자유주의자들이며 성경본문을 비평하는 자들이다. 역사비평이나 양식비평 등 모든 비평은 예외 없이 모두 코미디다.

신학은 성경에서 나온다. 그 신학을 판단하고 분별할 수는 있다. 그러나 성경을 논하고 판단하는 것은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물론 그 성경을 올바른 해석학으로 관찰, 해석하고 자신의 시대와 삶에 적용하는 것은 인간이 해야 할 마땅한 의무다. 그 행위 위에 우리가 성령을 기름 부어 영감을 줌으로 깨닫게 된다. 그러나 성경의 진위를 판단하고 성경을 구성하는 것은 우리의 권위에 속한다. 그것은 우리가 영감을 부어줌으로 성경이 기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정경의 범위나 우리가 영감 한 글들 안에 있는 통일성들을 관찰하고 그것이 성경의 메타내러티브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을 관찰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그러나 인간 자신들의 한계로 인해 이러한 탐구에서 함부로 결론을 내리는 것은 상당히 위험하다. 그러므로 정경의 범위에 대해 연구하고 싶은 자들은 평생을 걸쳐 이미 알려진 성경 안에서의 통일성을 연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현재 외경이나 위경으로 알려진 글들을 살펴야 할 것이다. 또한 그 글들에 대한 다른 이들의 연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런 후에도 여전히 자신의 결론을 내리는 것은 유보해야 할 것이다. 가장 안전한 것은 혹여 스스로 발견한 것이 옳은 것처럼 여겨지더라도 모든 것은 교회의 권위 안에서 분별되어야 할 것이다. 함께 논의되고 교회의 권위 아래서 인정된 것만을 받아들이는 것이 안전하다. 물론 새로운 것을 수용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함께 연구하고 토론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많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안전하다. 또한 지금 있는 성경 외에 다른 정경이 있는데 지금 인간들이 그 정경을 모르더라도 인간이 구원을 얻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그러니 실익이 별로 없는 일에 매달려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다. 기존 성경을 읽고 연구하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최소한 정경 안에는 신학적 통일성이 유지된다. 혹 그 통일성이 보이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성경 지식이 얕음을 인정하고 더 겸손히 시간과 노력을 들이고 기도하며 성경을 연구해야 할 것이다.

이 내용을 언급하는 것은 성경이 최종 잣대가 되어야 하고 구원을 말함에 있어서도 성경이 잣대가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미 내가 준 성경 안에 구원에 필요한 것이 기록되어 있다. 그래서 지금까지 내가 말하고 있는 내용들도 성경의 범주를 벗어나지 않고 설명을 하고 있다.

세상에 가라지가 있다. 바로 나를 떠난 죄인들이다. 그 가라지를 세상에 뿌린 자는 마귀다. 그로 인해 가라지 즉 공멸의 DNA를 가진 인간들이 세상에 있다. 그리고 그런 인간들이 있는 세상은 언제나 공멸을 향해 달리고 심판을 자초한다. 그러니 구원을 위해서는 이 문제들을 해결해야 한다. 문제를 선명하게 두 가지로 구분하고자 한다. 그래야 너희 인간들이 기억하기 쉽기 때문이다.

첫 번째 문제는 세상에 가라지를 뿌린 자 마귀다.

두 번째 문제는 세상에 뿌려진 가라지 즉 공멸의 DNA를 가진 죄인이다.

그런데 문제의 해결은 간단하다. 인간이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와 만유의 통치자가 되면 된다. 그렇게 되면 더 이상 타락한 천사인 마귀와 타락한 그의 추종자 천사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들도 회복된 인간의 권세 즉 만유의 통치자의 권세를 이기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이 문제들에 대해 논의해 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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