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스겔 Nov 10. 2024

꽃들에 관하여 11

백일홍목

겨울 앙상한 숲을 생각하면 그리고 그 나무들에 드문드문 달린 앙상한 마른 잎을 보면 나의 마음도 말라온다. 만지면 바스라지는 잎의 건조함이 나의 마음도 바스라 들게 한다. 그래도 그 시절이 지나야 봄이 온다는 것을 안다. 협심증으로 심장이 아파와도 겨울 찬바람을 이기며 니트로글리세린의 약효에 기대어 기어코 밖을 나서는 이유는 결국 봄을 보고야 말겠다는 기대 때문이다. 푸름에 대한 기대로 겨울에도 푸른 상록수들의 잎을 찾아보지만 역시 도시의 공해에 찌들어 먼지가 쌓이고 겨울 추위에 시달리는 상록수는 겨울 외 3 계절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지는 못 한다. 그래서 뭔가 푸름을 보았음에도 실망감이 있다. 추운 겨울과 싸워 이겨내고 사투 중에 있는 나무에게는 미안하지만 나의 실망은 어찌할 수가 없다. 코를 간지럽히는 향기로 매혹하는 3 계절의 꽃들을 보고 싶다. 나무에 달리거나 식물의 줄기 꽃대 끝에 피어난 색의 다채로운 향연을 보고 싶다. 연노랑 빛 연두의 연한 색에서부터 진한 암녹의 광택을 띄는 그것들을 보고 싶다. 그 잎의 색이 어찌 그리도 아름답던지 그 자체로 꽃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잎의 그물맥과 무늬들도 다 달라서 그것으로도 하나의 예술품이 된다. 특히 햇빛에 투과된 나뭇잎의 색과 그물맥은 그 어떤 물감이나 디지털 그래픽으로도 따를 수 없는 환상적인 생명을 마음에 부어준다.  

봄의 청초함과 여름의 싱그러움과 가을의 풍성함과 겨울의 주검도 모두 사랑한다. 꽃을 기다려 봄이 오고 그 봄을 만끽하다 보면 거의 모든 꽃들이 사라진다. 열대와는 다르게 온대에 속해 있는 우리나라에 있는 꽃들의 대부분은 봄에 핀다. 봄에 펴서 열매를 맺고 그 열매를 여름 내내 길러서 가을이면 익어 땅에 떨어져 다음세대의 씨앗이 된다. 그래서 뜨거운 여름에는 꽃을 구경하기 어렵다. 여름에 피는 꽃은 무궁화, 능소화, 금계국, 맥문동, 백일홍 정도다. 물론 다른 꽃들도 있지만 흔하지는 않다. 사실 뜨거운 여름날에 에어컨을 떠나 꽃구경을 간다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여름날의 피서는 계곡에서 발을 담그고 수박을 먹거나 해수욕장이나 해외의 여행지들을 다니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 요즘은 호캉스를 가는 이들도 늘고 있다.

그러나 여름이 아무리 무더워도 꽃을 보는 것을 즐기는 것을 말릴 수는 없다. 최소한 나의 경우는 운전을 하면서도 지나치는 꽃들에 온통 마음이 빼앗겨 버린다. 여름과 봄의 경계인 5월에 피는 장미는 잊힐 수 없는 강렬함이 있다. 그 이후에는 가을까지 남은 작은 꽃들을 피우지만 이미 제 철이 아니고 꽃도 5월만큼 탐스럽지 않다. 그래도 지나치며 늦가을까지 드문드문 꽃을 피우는 장미를 보면 그 작고 볼품없어 시들어가는 꽃도 아름답다. 우리나라 정서상 남자는 꽃을 좋아하면 별로다. 조용하게 시를 읽거나 그릇들의 아름다움을 보거나 회화나 조각의 아름다움이나 사진을 사랑하는 정적인 것은 남성적이 아니라 생각한다. 특히 꽃을 좋아하는 것은 더욱 그렇다. 요즘은 그런 편견들이 많이 없어져가고 있지만 이런 편견들은 여전하다. 남성다움과 꽃을 사랑함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들을 한다. 그러나 남들이야 어떠하든 나는 꽃을 사랑한다. 어린 시절의 들판과 산에 지천으로 있던 꽃들을 보며 그 색감과 아름다움, 그 향기로 나의 감성은 충만해졌다. 그 감성이 아직도 살아 나는 꽃들을 사랑하며 나도 꽃과 같이 피어 늘 아름답고 싶다. 그런데 남의 눈치를 보고 남의 평가로 나의 마음의 환희를 빼앗기고 싶지는 않다. 나는 꽃을 보고 식물을 봄으로 마음에 감탄과 환희와 탄성이 가득하다. 그런데 그것을 누구에게 빼앗긴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나는 술도 즐기지 않으며 담배나 다른 중독적인 일들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이 그렇게 즐겁지도 않다. 내게는 꽃을 보는 것이 마약을 하는 것보다 좋다. 마약을 직접 체험해 보지는 않았지만 대학시절 교회 밀폐된 지하층을 칠하며 신나 냄새에 취해본 적이 있다. 기분은 좋았지만 그렇게 환상적이거나 마음을 빼앗길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나 꽃은 온몸에 통증이 덮이고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통증이 나를 괴롭혀도 그 괴로움 속에서도 보고 싶다. 지금 글을 쓰면서도 손가락과 몸의 관절들은 통증을 호소한다. 그래도 나는 식물을 생각하며 쓰는 이글이, 꽃을 떠올리는 이 행위가 너무 행복하다. 그래서 마약성 진통제보다 더 강력하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통증을 이기고 이 글을 쓰고 있겠는가? 식물의 싱그러움은 병실에 있을 때라도 몸을 일으켜 나가고 싶은 충동을 일으킨다. 걸을 힘이 없으면 차를 타고서라도 그 생명의 충만을 눈에 담고 싶다.

그렇게 꽃을 사랑하는 나에게 어느 날부터 눈에 들어오는 꽃이 있었다. 여름날이면 길가의 가로수로도 정원수로도 심어진 백일홍의 붉음이 나를 사로잡는다. 나는 능소화도 사랑하지만 그보다 백일홍을 더 사랑한다. 꽃의 이름은 어찌 다들 여인의 이름들인지, 봄의 진달래씨와 늦여름의 나라씨와 모란씨 그 모든 이름들도 아름답다. 그래서 여인들의 이름에는 꽃의 이름이 많은가 보다. 서양 여인들도 까멜리아나 릴리, 로즈라는 이름들이 많은 것을 보면 아름다운 꽃을 보는 눈은 동서 모두 동일한가 보다. 백일홍의 이름도 그러하다. 우리나라 전래동화에 나오는 백일홍 처녀의 이름도 꽃의 이름으로 참 아름답다. 지금 내가 말하고 있는 꽃은 사람들이 배롱나무라 부르는 나무의 꽃을 말한다. 멕시코 원산의 풀 백일홍도 여름에 꽃을 피우고 내가 사랑하는 꽃이다. 그러나 그 꽃이 아닌 나무 백일홍을 말하고 있다. 참고로 우리나라 백일홍 전설의 백일홍은 풀이 아닌 나무 백일홍이다. 그 발음이 오류가 일어나 변형되어 배롱나무로 부르는 사투리가 있기는 한데 원래 이름은 백일홍이다. 신대륙이 발견된 근대 이전에 우리나라에 백일홍이라 불리는 꽃은 나무 백일홍이 유일했다. 풀 백일홍은 우리나라가 개화기를 거친 이후에 들어왔으므로 전래동화 속의 백일홍과는 상관이 없는 꽃이다. 그런데 이 둘이 혼동을 주어 동화를 들으면 풀백일홍을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나도 어릴 적 백일홍의 전설을 들을 때 풀백일홍을 떠올렸다. 동화책 속에 등장하는 꽃도 풀백일홍이었다. 그러나 이는 풀 백일홍의 이름과 나무 백일홍의 이름이 같음으로 인해 생긴 혼동이다. 서양인들이 이 꽃을 신대륙에서 처음 채집한 것도 1789년이 되어서다. 그리고 그 야생 풀꽃이 개량되어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일제강점기에나 되어서일 것으로 추정된다. 우리나라에 전해 내려오는 백일홍 전설의 내용을 보면 그 내용이 일제강점기에 만들어진 내용은 아닌 것을 알 수 있다. 최소한 개화기 조선시대 이전에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그 내용을 보면 상당히 오래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나무 백일홍의 학명은 Crape myrtle이다. 한국 이름은 백일홍인데 사투리로는 배롱나무라고도 불린다. 배롱나무라는 말은 백일홍의 사투리라 할 수 있다. 이는 수백 년 전에 형성된 사투리다. 백일홍과 배롱나무 둘 중 어느 것이 원래의 이름인지에 대한 이견이 존재하지만 역사를 살펴보면 백일홍이 원래 꽃의 이름임을 알 수 있다. 동아시아 삼국에서 자생하고 있던 이 나무의 이름은 삼국 공통 백일홍(百日紅)이다. 또한 이 나무가 이 지역에 자생한 나무이므로 나무의 이름 또한 아주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나무의 원산지가 중국의 남부로 추정된다. 한국과 일본에는 중국 남부의 나무가 이식된 것으로 추정된다. 나무가 추위를 견디지 못한다는 것을 보았을 때 중국 남부가 원산지가 확실하다. 중국 남부에서 중부와 북부 서부로 퍼져나갔으며 그것이 한국으로 옮겨왔고 또 한국이 일본으로 가져다주었다. 이를 반증해 주는 것이 동아시아 삼국의 백일홍 이름이 일치한다는 것이다. 중국의 나무가 한국과 일본으로 전파되면서 이름도 중국식 이름이 전파된 것이다. 배롱나무는 사실 백일홍이라는 나무의 사투리로 추정된다. 중국식 백일홍의 발음을 빠이일호옹이다. 우리가 읽고 있는 동국정운식 한자 발음인 백일홍과는 차이가 있다. 이 외래어의 발음을 처음 들은 사람들은 정확한 발음을 하기도 어려울 수 있다. 빠이이을호옹의 발음이 단축하면 백일홍이겠는가 아니면 배롱이 가까운가 중국 발음의 처음과 끝만 발음하면 배롱이 훨씬 가깝다. 일호옹이 호롱과 비슷하게 발음되는 증상은 북경과 동북쪽 표준어에서는 더 강조된다. 중국식 표준어의 원조 사용자인 똥뻬이르언(東北人 동북인)들의 발음 특징 중 하나가 R발음이 강하게 나는 것인데 이 단어에서도 그런 특징이 보인다. 그래서 발음을 자세히 들어보면 마지막 빠이일홍의 발음이 홍이 아니라 로홍이라는 발음이 난다. 가운데에 R발음이 강하게 난다. 그래서 외국인들이 들으면 끝 발음이 홍이 아니라 롱으로 들릴 수도 있다. 처음 빠이 발음도 한국의 백일홍의 백과 동화를 일으켜 배가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첫 음인 배와 끝 음인 롱을 강조하면 배롱이 된다. 그래서 사투리인 배롱나무가 탄생한 것 같다. 제주어를 살펴본 어떤 이들은 제주도에 배롱나무라는 이름과 배롱배롱이라는 형용사가 존재함을 통해 배롱이 순수 한국어라 말하는데 이는 오해일 수도 있다. 이를 역으로 생각해 보면 백일홍의 꽃색이 밝고 명랑하며 붉으니 그 색의 특징을 형용사화한 것이 배롱이라 할 수도 있다. 그러니 배롱배롱이라는 제주어 사투리가 존재함이 배롱이 순우리말이라 확정 짓기는 어렵다. 또한 간지럼 나무라는 이름도 중국의 군방보에 나오는 간지럼을 탄다는 이야기에서 나온 말이다. 중국식으로는 간지럼을 타는 나무라는 뜻의 파양수라 부른다. 이를 이야기와 뜻만을 가져와 사용한 것이 간지럼 나무다. 이를 보아도 백일홍은 나무도 그 이름도 중국에서 기원한 것을 알 수 있다. 억지로 우리의 사투리를 원류라고 하면 좀 억지가 아닌가 한다. 아무튼 이렇게 하여 사투리들이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한자를 아는 선비들은 동국정운식 한국 한자어 발음인 백일홍을 표준어로 발음했을 것이다.

중국어로는 백일홍(百日紅)이라 부른다. 중국식 발음이 궁금하면 위에 미리 언급되어 있다. 또 다른 이름은 紫薇(zǐ wēi, 쯔웨이)이다. 동국정운식 한국발음으로는 자미(紫薇)라고 읽는다. 이는 당나라의 수도 장안에 있는 황궁의 이름이 자미궁인데 그 정원들에 백일홍이 많이 심어져 있어 이런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자미라는 말은 '모든 별들의 주인(萬星之主)'이라 불리는 북극성을 말한다. 그래서 황제를 상징하는데 그 황제가 있는 궁의 이름이 자미궁이었다. 그래서 백일홍도 황제를 상징하는 이름인 자미(紫薇)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대부분 이렇게 추측들을 하는데, 실제 역사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중국에서 자미(紫微)가 처음으로 문서에 등장하는 것은 동진(東晉) 왕가(王嘉 :?~390)가 저술한 잡기 습유기(拾遗记)이다. 서진 3대 회제(怀帝) 황제 말기에 변괴가 생겨 민가의 정원과 채마밭[^2]이 쑥대밭이 되어 여우와 토끼가 뛰놀자 천문을 보던 태사령이 형혹(荧惑) 즉 화성이 자미(紫微)를 범하여 생긴 일이므로 그냥 두면 낙양도 없어진다고 주청하자 궁성 안팎은 물론 민가에도 죄다 자미(紫微)를 심어 엽승(厌胜)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자 저절로 쑥과 가시덤불(蒿棘)이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있다. 여기서 화성의 침범을 받은 자미는 자미성(紫微星)을 말하고 엽승(厭勝)용으로 심은 자미는 자미화(紫微花) 즉 배롱나무를 말한다. 참고로 엽승(厭勝)은 풍수나 주술에서 부족함을 채워주는 비보(裨補)의 반대 개념으로 지나침을 누르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최소한 5~6세기에는 민가에서도 비록 관상 목적이 아닌 주술 목적이지만 자미화(紫微花) 즉 배롱나무를 심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일홍이라는 이름이 등장하는 것은 명대 문학가 양신(杨慎:1488~1599)이 지은 백일홍(百日红)이라는 시이다.*

*李径桃溪与杏丛(이경도계여행총)*
*春来二十四番风(춘래이십사번풍)*
*朝开暮落浑堪惜(조개모락혼감석)*
*何似雕阑百日红(하사조란백일홍)*

*의역하자면 이른 봄 소한부터 곡우까지 매 5일마다 봄바람에 실려오는 꽃소식의 자두 복사 살구꽃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아침에 피어 저녁에 지는 아쉬움이 있어*
*어찌 난간에 새겨진 듯 백일 동안 피는 백일홍 같을까?라는 뜻이다.*

*개화기간이 긴 백일홍을 칭송한 것이다.  감명이 깊은 것은 중국인들은 일찍이 이렇게 한겨울 1월 5일 경인 소한에 피는 매화와 동백 그리고 수선을 시작으로 5월 5일 경인 곡우에 피는 모란과 멀구슬나무까지 120일 동안 매 5일마다 피는 24종의 꽃 개화 순서를 미리 기록하여 二十四番花信风(24번화신풍)이라고 하며 꽃을 감상하였다는 사실이다. 내 정원에 있는 꽃의 개화시기도 잘 헤아리지 못하고 있는데 이렇게 온갖 봄꽃의 개화 정보를 놀랍게도 6세기 전반인 남북조시대 양나라 종름(宗懔)이라는 학자가 쓴 형초세시기(荆楚岁时记)에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그런데 정작 백일홍이라는 이름은 출전은 명대 양신이 아니라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송대 문학가 주변(朱弁 1085~1144)이 선한 곡유구문(曲洧旧闻)에 “红薇花(홍미화) 或曰便是不耐痒树也(혹왈편시불내양수야). 其花夏开秋犹不落(기화하개추유불락), 世呼百日红(세호백일홍)." 이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간지럼나무라는 이름의 근원이 되는 불내양수(不耐痒树) 즉 간지럼을 참지 못하는 나무라는 뜻의 이름과 여름에 시작하여 가을까지도 피어 있어 백일홍이라고 한다는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배롱나무는 수피를 손으로 긁으면 가지와 잎이 요동을 쳐 마치 간지럼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여 불내양수 또는 파양화(怕痒花)라고 하는 것이다. 이런 내용은 명대 왕상진(1561~1653)이 저술한 군방보(群芳谱)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 외에도 간지럼과 관련된 이명인 양양화(痒痒花)나 양양수(痒痒树)도 같은 맥락으로 보면 되겠다. 물론 실제로는 손으로 긁는다고 나무가 흔들리지는 않는다.*[^1]

일본어로는 猿滑(원활, サルスベリ 사루스베리, 원숭이가 미끄러짐)이다. 원숭이도 미끄러지는 나무라는 뜻인데 백일홍목의 목피가 벗겨져 매끈한데 그로 인해 원숭이들이 미끄러진다고 한다. 이와 같은 뜻의 이름을 미얀마에서도 사용한다. 백일홍이라는 동아시아 삼국 공통의 명칭도 일본에서 사용된다.


백일홍은 위에서 설명했던 것과 같이 풀과 나무 두 종이 있어 그 이름과 식물명에 혼동이 자주 일어나는 식물이다. 위에서 그 혼동의 이유 중 일부를 설명했다. 나무인 백일홍목은 원산지가 한중일과 동남아 지역이다. 그리고 풀인 백일홍초는 원산지가 남아메리카 멕시코다.

먼저 백일홍목(Lagerstroemia indica)은 부처꽃과의 낙엽소교목이다. 한 번에 꽃이 다 폈다 지지 않고 여름 내내 피는 꽃이라 꽃이 100일을 피어있다 하여 백일홍이라 한다. 18~19세기에 백일홍초가 들어오기 전까지는 이 꽃이 유일한 백일홍이었으나 두 꽃의 이름이 동일하여 혼동을 일으키므로 나무인 백일홍을 백일홍목이라 부른다. 이 나무의 사투리인 배롱나무가 있어 그 이름으로 부르는데 사투리로 표준어인 백일홍을 대체한다는 것도 말이 되지 않는다. 일본에서는 나무 백일홍을 백일홍(Lagerstroemia indica)이라 부르고 남미 산의 백일홍(Zinnia violacea, Zinnia elegans)은 백일초라 부른다. 이것도 구분하기에 좋은 방법인 것 같다. 이 글에서는 구분을 위해 백일홍나무는 백일홍목, 풀 백일홍은 백일홍초라고 부르겠다.

백일홍목의 원산지는 중국 남부다. 한국, 일본, 호주에 도 있으며 그 종류가 30여 종 정도 된다. 중국 남부의 기후는 따뜻하다. 해남이나 운남 지역과 광서성과 광동성 등 남부는 아열대기후다. 중국의 남부는 대부분 온화하며 백일홍의 분포는 중국 중부에까지 이어진다. 그러나 그 원산지는 남부다. 백일홍의 원산지가 따뜻한 남쪽인 것을 보면 짐작할 수 있겠지만 동백과 같이 한국에서는 북방지역에 자생지가 없다. 백일홍의 다른 이름 중에 양반나무라는 이름이 있는데 중부 이북에는 백일홍이 겨울을 견딜 수 없고 추위를 많이 타 봄에도 늦게 싹이 트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백일홍초(Zinnia violacea, Zinnia elegans)는 국화과의 한해살이 풀이다. 영명은 Common Zinnia dahlia Flowered이다. 원산지는 멕시코로, 관상용으로 전 세계에서 재배한다. 이 꽃은 멕시코에서 코트프리드진이 채집하여 계량을 거쳐 현재의 꽃이 되었다. 어릴 적 길가나 학교에 심어져 있던 백일홍은 이국적인 꽃이 아닌 우리의 꽃이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지 이미 200년이 넘는 꽃이라 그러한가 보다.

요즘은 기운이 조금 생길 때마다 인터넷 자료들을 찾아보는데 그것도 꽃을 탐구하는 작업이라 즐겁다. 그런데 그런 것들을 너무 많이 찾아보다 보면 쓰고 있는 글이 나의 글이 아닌 것 같다. 원래 내가 쓰고 싶었던 것은 식물 정보학적인 글이 아니다. 단지 내가 보고 느끼고 사랑한 꽃의 감성을 전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료 조사는 그만하고 내가 사랑한 백일홍에 대해 적고 싶다. 백일홍목은 백일홍초에 비해 우리나라에서 훨씬 오래전부터 자생해 왔다. 그런데 내가 어릴 적 본 백일홍은 백일홍초밖에 없다. 백일홍목을 본 적이 없다. 예전에 백일홍목을 볼 수 있던 곳은 오래된 사찰이나 아니면 정원을 가진 양반들의 커다란 고택이어서 그런가 보다.

내가 백일홍목이라는 나무를 알게 된 것은 성인이 되어서다. 길가의 가로수로 심어진 백일홍 꽃을 보았을 때다. 그러나 백일홍 꽃의 아름다움을 알게 된 것은 어느 교회 뒤편 절벽처럼 가파른 언덕에 이 백일홍목이 가득 심어진 광경을 보고 나서다. 언덕이라 하기보다는 절벽이라 해야 할 만큼 언덕의 경사가 심했다. 사람이 기어서 올라가기 어려울 정도의 경사였다. 한동안 그 교회에서 예배를 드렸는데 예배드리고 나와서 그 백일홍 꽃을 보고 있으면 그냥 그 진분홍에 물들어 그 장소를 떠나고 싶지 않을 정도였다. 특히 저녁에 오렌지 빛 가로등 불빛이 그 언덕을 비추면 온 세상이 붉었다. 얼마나 아름다운지 세상에 그렇게 아름다운 꽃은 본 적이 없다. 그렇게 나는 그 순간에 황홀함을 느꼈다. 오렌지색 가로등 아래 가득 핀 백일홍 꽃들은 붉은 저녁노을이 세상을 물들이는 것처럼 눈앞의 모든 곳을 가득 채웠다. 그래서 그 교회 계단이나 그 난간에 앉아 백일홍을 보는 것을 좋아했다. 내 성격이 남들 배려하느라 내 것을 챙길 시간이 없어, 내가 좋아하는 것도 시간을 내어하기 힘들어한다. 그런데 교회 예배 마치고 그냥 계단에서 사람들과 이야기하면서도 즐길 수 있으니 따로 시간을 낼 필요도 없었다. 지금도 저녁을 먹고 집에서 1~2분 거리에 있던 그 교회 계단 난간을 의자 삼아 앉아 백일홍을 보던 기억이 내 마음을 흥분케 한다. 다시 그 도시에 간다면 그 교회의 그 난간에 앉아 백일홍을 보고 싶은 것이 첫 번째 소망이다. 다른 장소나 다른 사람을 보고 싶은 어떤 마음보다, 그 꽃으로 가득한 절벽을 보고 싶다. 내가 보았던 어떤 여인보다 그 꽃이 아름답다. 한눈에 반해버린 여인의 그 어떤 얼굴보다 그 꽃이 사랑스럽다. 지금까지 누렸던 어떤 사랑보다 그 꽃이 주는 사랑이 훨씬 아름답고 가득했다. 사랑에 빠져 구름 위를 걸어 다니는 것 같고 온 세상이 아름답고 밥을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고 아무리 일해도 피곤하지 않은 며칠을 보낸 일들도 있었지만 그 꽃이 주는 아름다움, 기쁨과는 비교할 수 없다. 나를 사랑하는 여인이 이 글을 본다면 질투할 수도 있지만 어찌할 수 없다. 그 대상이 다른 여인이 아니니 이해하기를 바랄 뿐이다.

내가 자연을 사랑하고 꽃을 사랑하는 것은 단지 그것이 나에게 말할 수 없는 감동을 주고 나를 채우기 때문이다. 여름의 초입에서부터 늦가을까지 꽃을 피우는 백일홍은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답다. 그 마음속 하얀 속살에서 피를 내어 꽃을 피우는 것처럼 붉다. 그러나 그 붉음이 죽음의 진홍이 아닌 아름다운 진달래의 그것을 닮았다. 내 어릴 적 산천에 피어 봄이면 나를 산으로 부르던 그 진달래의 분홍은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답다. 철쭉이 많이 피면 온 산을 덮는 곳들이 있다. 그러나 그 산전체를 덮은 철쭉의 붉음보다 드문드문 피었으나 여리여리한 진달래가 아름답다. 봄의 이른 싹들 사이로 핀 이른 그 꽃이 아름답다. 가냘프고 바람에도 제 형태를 유지하지도 못하지만 서리를 맞아도 시들지 않는 그 강인한 조선 여인 같은 아름다움은 결코 시들지 않는 색을 지니고 있다. 봄의 한철에 피어 사라지는 진달래와는 달리 그 색을 여름과 가을의 끝까지 유지하는 백일홍 꽃은 무더운 여름에 꽃을 사랑하는 내 마음의 갈증을 채워준다. 그 꽃이 없었다면 여름 그 무더위의 목마름을 채울 수 없을 것이다. 꽃을 보기 힘든 여름은 온대의 계절을 견디기 힘들게 한다. 그러나 백일홍 꽃은 그 무더위의 갈증을 이기게 한다. 나는 그래서 이 꽃을 더 사랑한다. 무궁화나 능소화가 여름에 피기는 하고 그 꽃이 길게 피고 지고 하지만 그래도 이 꽃 백일홍만은 못하다.

백일홍은 그 꽃이 너무도 작다. 사실 우리가 보고 있는 백일홍이라는 꽃은 그 꽃잎 하나가 1mm도 안되는 가는 꽃잎 줄기 끝에 매달린 2~3mm의 꽃 잎들의 군집이다. 녹두처럼 작은 꽃봉오리에서 가는 꽃 잎 줄기가 뻗어나간다. 그 굻기가 일반 꽃들의 수술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그 끝에 주름이 진 부채꼴의 꽃잎이 매달려 있다. 그런 꽃잎이 6~8개 정도 달리는데 그 하나를 보면 꽃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볼품이 없다. 가운데에 끝이 노란 수술들이 올라오지만 그 수술들이 노란색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도 거의 없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보이지도 않는다. 그만큼 작다. 꽃이라는 것이 원래는 정상적인 꽃받침이 있어 그 위에 꽃잎이 든든히 안착을 하여 넓은 꽃잎을 피워야 하는데 백일홍은 아예 꽃받침이 없다. 처음 달리는 녹두 같은 봉오리에서 그냥 수술과 수술처럼 가는 줄기를 가진 꽃잎이 올라온다. 그리고 그 형태 그대로 가을에는 씨가 맺혀 씨방이 된다. 녹누만 한 둥근 봉오리가 벌어지지도 않고 그 사이를 뚫고 나온 가는 수술과 꽃잎 술이 피어보아야 얼마나 클 수 있겠는가? 3mm가 겨우 되는 꽃잎이 어떻게 사람의 눈을 만족시킬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꽃은 사람의 눈을 가득 채우고도 온 세상의 빛깔을 꽃잎의 색으로 물들인다. 작은 녹두보다 작은 봉오리가 한 가지에 포도와 같이 많이 달린다. 그것들이 한꺼번에 군집을 이루니 그 꽃송이가 10~25cm나 된다. 새로 생기는 가지 끝 전체에 꽃이 수십 개가 달린다. 그러한 군집이 또 더 큰 군집을 이루어 그 해의 새로 난 모든 가지 끝마다 꽃을 피운다. 그렇게 나무 전체가 꽃이 달리어 피는 것이 백일홍이다. 그래서 백일홍은 그 나무 전체의 모양은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하나의 꽃 모양은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꽃 하나만을 보면 그 모양도 그리고 그 듬성듬성한 꽃잎도 모두 꽃처럼 보이지 않느다. 어떻게 이런 모양의 이상한 꽃이 있는가 싶다.

그러나 그 볼품없는 것들이 뭉치면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답고 화려한 자태를 뽐낸다. 바로 내가 사랑하는 백일홍의 자태다. 그 나무가 군집을 이루면 그것이 장관이다. 그래서 백일홍은 나무 하나가 아니라 군집을 이루어야 아름답다. 그것도 거대한 군집이라야 아름답다. 절벽 같은 언덕 전체를 채웠던 그 교회 앞의 백일홍 정도는 되어야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 일단 그 볼 품 없는 꽃들의 군락이 이렇게 형성되면 그 어떤 꽃의 군락보다 아름답다. 들에 핀 양귀비의 선홍빛 군락이 아름답지만 백일홍 꽃의 군락을 따라올 수는 없다. 봄의 화왕인 벚꽃도 아름답다. 화사함과 한껏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꽃비는 벚나무 아래에 선 자의 하늘을 채워버린다. 그것도 아름답지만 그래도 백일홍 꽃의 군락만큼 아름답지는 않다. 특히나 벚꽃은 이른 봄에 잠시 피었다 지지만 백일홍은 여름과 가을 전체를 꽃으로 물들인다. 그 작은 꽃들이 서로 돌아가며 피어 그 붉음을 그렇게 길게 유지를 한다. 꽃 하나는 그 붉음을 유지하는 기간이 그렇게 길지 못하다. 그런 꽃들이 돌고 돌아 피어 그 붉음을 오래도록 유지한다. 그렇게 하여 그 무더운 여름을 이기고 꽃을 지속시킨다. 세상이 아무리 많은 따가운 시련의 빛으로 무자비하게 억압해도 여전히 그 붉음을 유지한다. 로마의 황제들이 그렇게 탄압하여 사멸시키려 했지만 결국에는 로마 전체를 점령해 버렸던 나사렛에서 시작된 예수님의 길이 그러했듯 이 꽃은 모든 박해를 이기고 이기고 이겨 피어난다. 가는 곳마다 피의 꽃을 피우며 그 찬란함을 이어간다. 그리고 하나가 그렇게 박해로 스러지면 더 많은 꽃들이 피어난다. 그 붉음을 뿌리며 나가는 꽃의 생명 빛은 결국 나무 전체를 점령하고 군락을 이루어 숲을 점령하며 정원을 점령한다. 그리고 그 작은 녹색의 꽃집이며 씨방인 그것이 붉어지며 결국에는 주검의 나목의 색을 비치며 그 속에 겨자씨와 같은 수많은 씨앗을 생산한다. 이렇게 꽃의 붉음은 전파되고 퍼져나간다. 날리고 날려서 주변에 떨어져 그 씨앗만큼이나 가냘픈 싹을 틔우고 그것이 자라 또 사방 6m의 나무로 성장한다.

추위를 잘 견디지 못하는 이나무는 외로이 벌거벗은 듯 서있다. 세상의 바람을 막아줄 외피가 없다. 그 외피가 있어도 새해가 오면 모두 벗겨내고 늘 새살을 돋운다. 그 사랑하는 자의 온풍이 없이는 견딜 수가 없다. 강인한 것 같아도 따사로운 목자의 사랑이 없이는 견딜 수 없다. 어떤 품종은 -23도에도 그 뿌리가 살아 다시 뿌리에서 새싹을 돋운다고 하지만 결국 겨울이 오면 그 해의 모든 가지와 심지어 나무의 줄기도 죽어버린다. 다음 봄에 올라오는 것은 땅속의 나무뿌리에서 새로운 나무줄기를 올리는 것이다. 빛이 없는 어둠의 땅에서는 살 수가 없다. 빛의 낮보다 긴 어둠의 밤이 점령하는 겨울의 지역에서는 살 수가 없다. 그 주인의 빛의 낮이 아니면 살 수 없는 이들의 북방 한계선은 한반도의 허리와 같다. 바로 남북을 가르는 군사분계선과 일치한다. 한반도의 중부인 이곳을 지나면 더 이상 백일홍을 보기 힘들다. 추운 겨울에 뿌리가 살아 월동을 한다지만 그렇게 되면 이 나무는 더 이상 나무가 아니다. 초목과 같다. 그래서 아메리카 북부의 원예가들은 이 나무를 나무가 아닌 초본으로 생각하여 정원에 심는다. 다음 해에 국화와 같이 다시 피는 여러 해 살이 풀 정도로 생각한다. 일본 원산의 적피 백일홍은 붉은 꽃이 아닌 흰꽃을 피우고 내한성이 강하다. 그러나 그 나무가 사할린이나 홋카이도의 겨울을 견딜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잠시 햇살을 비추어 낮의 주인이 함께 하는 그곳에만 피고 살 수 있다. 아무리 강한 박해가 와도 살아남을 수 있지만 그 스스로 주인을 잃어버리고 빛을 떠나면 살 수가 없다. 그가 빛을 떠나면 더 이상 빛의 몸이 아니니 스스로 주검이 되어 사멸한다. 그 주검이 되어 사멸한 것을 죽은 정통주의라 부른다. 언제나 그 주검이 역사의 주류가 되고 자신들의 기록을 남겼지만 천국의 찬란함은 그들에게는 없었다. 그들에게 박해를 당한 왈덴시안과 수많은 재세례파의 그룹들은 박해를 당했으나 그 힘없고 작은 꽃을 돋우어 순교의 피를 뿌렸다. 그들의 피는 글로 남지 않았지만 땅에 떨어져 그 의로움으로 세상을 붉게 물들였다. 그 피의 소리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의인의 호소로 오늘도 하늘을 향해 호소를 한다. 그 피의 호소가 지구를 돌아 퍼지고 그 호소로 인해 2000년 후의 나도 살았다. 그리고 그 모든 피 꽃의 주인 화왕 그 목수의 눈에 피었던 피꽃으로 인해 나도 영원을 산다. 벌거벗어 나무에 달리어 피를 쏟아내었던 그의 꽃이 벌거벗은 나무의 거죽을 뚫고 나와 그 떨리는 가지의 손끝에서 흘러 피어난다. 아름답다. 내가 사랑한 목수의 나무 그 손끝에 달린 피의 꽃이 아름답다. 모든 세상을 채우고도 남을 그 꽃이 오늘도 나의 가슴에 피고 수많은 순교자들의 가슴에 핀다. 그리고 그 꽃이 세상을 가득 채우는 날 그리워하는 님의 날 나는 두 눈으로 동에서 서로 번개가 침과 같이 임하시는 그를 볼 것이다. 오라 엘리야여 처음 임하였던 것처럼 다시 임하여 세상 끝의 모든 피를 거두어 새하늘과 새땅을 열어주소서. 이제 속히 오시어 하늘의 새예루살렘으로 우리를 이끌어 올리소서. 그래서 영원히 백일백일백일 영원히 피어나소서.




[^1]: https://tnknam.tistory.com/1206 retrieved in 23 September 2024


[^2]:  菜麻밭: 채소나 삼이나 대마를 기르는 밭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