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들에 관하여 10

지나는 바람에 흔들리며 빛을 반사하는 식물들의 빛깔에 관하여

by 에스겔

올 겨울은 극심한 추위와 겨울 같지 않은 더위도 함께 했다. 유난히 추운 날씨들이 있었다. 그때는 미국에 한파가 불어 많은 사람들이 얼어 죽기도 했다. 그러다 따듯해졌다. 갑자기 따뜻해지니 덥다는 느낌마저 들었다. 물론 차 안에서 느낀 것이다. 한참 햇살이 따사로운 오후가 되면 히터를 틀지 않아도 두꺼운 겨울 옷의 지퍼를 열어야 할 만큼 따뜻해졌다. 부산은 한낮의 기온이 18도까지 올라갔다. 길가의 철쭉 종류들은 한두 개씩 꽃망울을 터트렸다. 그것도 설에 그랬다. 이렇게 따뜻해도 되나 싶을 정도였다. 지구 온난화가 이렇게 무서운가 하는 생각도 스쳐갔다. 그리고 이번 여름은 얼마나 더울려나 하는 생각도 있었다. 그런 생각은 잠깐이고 꽃을 볼 수 있어 좋았다. 아내와 함께 시골장이 서던 골목에서 어릴 적 먹던 찹쌀 도너스를 사기도 했다. 기분 좋은 산책을 했다.


엄동설한 속 봄


설이 지나자마자 금세 봄이 와버렸다. 매화들이 다 피어버렸다. 그리고 겨울 가지들에 움이 트려고 했다. 장미도 하나둘 보였다. 이상했다. 심지어 추운 겨울인데도 얼어 죽지 않은 장미의 잎들이 있었고 국화가 드문드문 피어있는 화단도 있었다. 아무리 남쪽 부산이라지만 부산이 따뜻했던 시절은 이미 10년도 더 된 옛일이었다. 기상이변으로 부산의 날씨는 이전에 비해 많이 추워졌다. 겨울에도 영하로 자주 내려갔고 추우면 영하 6도까지 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예전의 부산은 겨울엔 얼음도 얼지 않았던 따듯한 도시였다. 그래서 내가 학교 다닐 때만 해도 겨울에도 난방을 따로 하지 않았다. 추운 강원도와 경북에 살았던 나에게는 낮설은 경험이었다. 강원도에서는 톱밥난로가 교실 중앙에 있고 그 난로 위에 겨울이면 노란 양은 도시락을 데우려고 올리곤 했었다. 그런데 부산 학교에는 오직 밖에 비추는 태양이 전부였고 그 햇살이면 따뜻한 온기가 느껴졌다. 부산은 그렇게 따뜻했다. 강원도에 살다가 중학교 2학년인 80년대 중반에 이사 온 부산은 언제나 봄날 같은 도시였다. 한겨울인 2월에 이사를 왔는데 그때 나의 기억으로 부산은 강원도의 봄날보다 더 따뜻했다. 그래서 봄 잠바도 입지 않고 얇은 남방을 하나 걸치고 다녔던 기억이 있다. 1월 말~2월 초면 한겨울인데 그 시절 부산은 그렇게 따뜻했다. 그래서 없는 이들이 살아가기에 좋은 곳이라고들 했다. 물가도 싸고 섬유나, 신발, 여러 산업단지들이 있었던 수출항 부산은 가난한 공돌이, 공순이들의 보금자리가 되었었다.


은행 새싹 봉오리


그 옛 시절 부산의 봄이 다시 찾아온 것일까? 이제 봄이 곧 올 것만 같았다. 나무들이 물이 오르고 새싹을 내려고 하는 그 특유의 생명의 빛깔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가로수로 심어져 있는 은행나무들에는 새로운 싹을 틔우기 위해 크면 손가락만 하고 작으면 새끼손가락 반만 한 몽우리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이 정도 새 몽우리들이 생기려면 나무가 최소 사오십 년은 넘어야 한다. 일반적인 가지들과는 다르게 나뭇가지의 색을 하고 있으나 망울이 여러 개 층을 이뤄 돌탑을 쌓은 듯 짧은 가지가 되었다. 망울 가지는 일반적인 나무들과 다르게 90도 가까운 각도로 꺾인 것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식물들은 가지를 뻗을 때 가지가 줄기의 끝쪽으로 기울어져 자란다. 그런데 은행나무의 망울 가지는 원 줄기에서 90도에 가까운 각도로 자라는 것들이 많다. 물론 나중에 자라서는 일반적인 나무들처럼 가지의 끝쪽으로 기울어져 자란다. 아마도 봉오리 가지는 처음부터 은행나무의 나무 색으로 자라나지만 일반적인 식물들의 잎이나 꽃의 봉오리와 같은 역할을 하는 것 같다. 그렇게 봉오리 역할을 하다가 잎이 자라나면서 다시 가지의 역할을 하기 위해 자신의 각도를 조정하는 것 같다. 은행나무는 돌과 같은 망울마디가 길어져 가지가 된다. 망울은 길어져 가지가 되고 그 마디마디마다 새싹이 난다. 싹이 나면서 그것이 다시 길어지며 굵어져 거대한 은행나무의 가지들로 자라난다. 물론 돌탑과 같은 망울들이 그렇게 거대한 가지로 자라려면 많은 세월이 걸린다. 몽올 돌탑의 끝에 난 몽올은 주 가지가 되어 뻗어나간다. 그리고 중간에 있던 몽올들은 자라서 곁가지가 된다. 주 가지는 일직선으로 길게 뻗어가고 나머지 곁가지들은 가지 끝으로 기울어진 채 자라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가지 끝마다 수많은 잎들을 낸다. 잎의 싹은 작은데 뭉쳐진 망울들에서 펼쳐지기 시작하면서 여러 개의 은행잎으로 자라난다. 은행잎이 가지의 끝에 달린 것을 관찰해 보면 잎의 꼭지가 되는 부분들이 가지 끝에 모여 고정되어 있는 것이 보인다. 돌 모양의 몽오리 속에 말려있던 잎들이 꽃봉오리가 펼쳐지듯 펼쳐진다. 가지의 끝에 있는 몽오리에서는 작게는 두세 개에서 많으면 열 개 정도의 잎들이 나온다. 그리고 잎의 꼭지들이 모여 있는 가지 끝의 색은 잎의 색과 같이 푸르다. 그리고 그 푸른 것을 꽃받침과 같은 것이 받치고 있다. 이런 잎의 형태는 상당히 특이한데 나는 은행나무를 제외하고는 이런 형태의 받침이 있고 꽃과 같이 잎이 자라는 식물을 본 적이 없다. 놀라운 것은 은행의 꽃도 이곳에서 피고 수꽃과 암술이 암수나무에 분리해서 피는 것이다. 수꽃에는 수술만 있다. 그리고 암술에는 암술만 있다. 이 모든 곳의 위치가 가지의 끝 즉, 잎이 있는 자리다. 그곳에 꽃이 피고 그곳에 잎도 있고 그 잎과 꽃이 위치한 곳에 꽃받침이 감싸고 있다. 꽃받침이 잎을 감싸고 있는 이유가 아마 꽃 때문인 것 같다.


은행 잎


은행 잎은 모양도 색도 특이하다. 모양은 일반적인 나뭇잎의 모양이 아니다. 어찌 보면 꽃잎과 같은데 그것이 나뭇잎과 같은 꼭지에 달려있는 것 같다. 내가 아는 나뭇잎의 종류 중 은행잎과 비슷하게 생긴 나뭇잎은 없다. 난의 종류나 여러 특이한 식물들 중에도 그런 모양으로 생긴 것은 드물다. 잎의 색도 단청색에 가깝다. 식물의 잎이 단청색을 띠는 경우도 흔하지 않다. 그 단청색이 여름이면 한층 진해지고 잎들이 풍성해진다. 그래서 잎이 자라면 은행은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하늘색과 어울리는 단청색을 뿜어 내며 커다란 그늘을 만들어낸다. 은행은 오래된 것은 수천 년을 살았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수명이 길다.

은행 잎이나 은행의 열매는 또 약성을 가지고 있다. 은행 잎에서 추출한 성분은 일본어 은행에서 와전된 서양의 징코라는 말로 된 징코나 징코민이라는 약으로 판매가 되었다. 혈관을 깨끗하게 하여 혈액순환을 돕고 막힌 혈관을 뚫어주는 성분을 가졌다. 푸른 은행 잎은 살충효과와 살균효과도 높다. 그래서 은행은 농약 사용이 필요 없다. 이러한 은행은 스스로 자신이 가진 독을 벌레나 짐승들이 먹지 않도록 보호하는 성분들을 같이 가진다. 은행 잎의 살충 성분으로 인해 곤충들이 죽는 일은 거의 없다. 실제로 사용될 때는 곤충을 죽이는 용도가 아니라 경고용으로 쓰이는 것으로 보인다.


은행꽃


은행은 꽃이 피는데 그 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나도 은행의 꽃을 직접 본 적은 없다. 단지 사진으로 확인했을 뿐이다. 가로수로 은행이 많이 심어져 있어도 은행꽃은 거의 볼 수가 없다. 꽃받침 위에 수술과 암술이 있고 꽃은 없다. 그 꽃잎의 역할이 은행잎인 것 같다. 물론 수술에 꽃과 같은 형태를 지닌 흰 것이 있지만 그것은 눈에 거의 보이지도 않는다. 그래서 꽃잎의 역할과 잎의 역할 둘을 모두 겸한 것이 은행잎인 것만 같다. 가로수로 심어져 있는 은행나무는 거의 100% 숫나무다. 숫나무에서 꽃이 핀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그 은행의 꽃을 확인하여 본 사람들은 거의 없다. 그 꽃 안에 정자가 있다. 일반적인 꽃들은 꽃가루로 수분을 하는데 알려져 있기로 은행나무는 정자가 직접 암술을 찾아가 수정한다고 알려져 있다. 꽃가루의 형태인지 줄기를 타고 내려가 땅을 이동하여 암나무들을 찾아가는지 알 수가 없다. 어떻든 일반적이지 않은 특징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나무라 할 수 있다.


은행의 이름


은행(銀杏)은 한자의 뜻으로 보면 은행은 은빛 살구라는 뜻이다. 살구라는 것은 은행의 과실이 익으면 노란빛을 가지는 살구의 열매와 비슷해지기 때문이다. 은행이 좀 큰 것들은 살구보다 살짝 작다. 살구가 야생 살구라고 가정한다면 일반적인 살구보다 크기가 작기에 그 크기가 비슷하다. 또 은빛(銀) 살구라 한 것은 열매에 흰색을 띠는 은빛이 묻어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은빛 살구라 이름했다. 어렸을 때 학교 옆에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가을이면 그 은행을 먹기 위해 은행나무의 똥냄새에도 불과하고 익지도 않은 은행의 과실을 맨손으로 벗겨냈던 기억이 있다. 친구들은 돌에 은행의 과실을 문질러 벗겨내면서도 그 똥냄새에 인상을 찌푸리지도 않았다. 사실 똥냄새는 과실이 익으면 익을수록 더 심해진다. 오히려 잘 벗겨지지 않을 때의 은행 냄새가 좀 더 덜 독하다. 시골에서 간식이 없던 아이들이 모여 한나절 은행을 모으면 한주머니 정도를 채울 수 있다. 그것을 불에 구우면 맛있는 은행 맛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잘 몰라 은행 씨앗의 외피를 깨뜨리지 않고 불에 넣어 외피가 터지면서 내는 폭음에 놀라 도망을 치기도 했다. 그 모든 것이 어린 시절의 추억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은행의 과실에는 독이 있어 가려움과 피부염을 유발하는 경우도 있다는데 다행히 우리 동네 아이들에게 그런 일은 없었다. 과학자들 중에는 은행의 과실이 공룡의 먹이였다고 한다. 독성이 있어도 그것을 중화하고 그 냄새에도 열매를 먹는 동물이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마치 어린 시절 동네 개구쟁이들이 그랬던 것처럼. 우리에게 은행의 독성도 은행의 냄새도 아무 문제가 아니었다. 단지 그 은행을 가지고 놀고 그 씨앗인 은행을 먹는 것이 기뻤다. 그 시절 공룡보다 은행에게 더 무서운 존재는 꼬맹이들이었다.

그 씨앗의 모양은 피스타치오와 상당히 유사한데 맛은 차이가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피스타치오보다 은행을 더 좋아한다. 이렇게 단단하고 두꺼운 씨앗의 껍질을 벗겨 먹는 것들이 있는데 피스타치오와 은행 그리고 아몬드가 있다. 잣이나 호두보다 껍질이 조금 부드럽지만 호박씨도 있다. 잣, 호두, 은행, 호박씨는 어린 시절 개구쟁이들의 겨울간식이 되어주었다. 도토리도 주워 묵으로 만들어 먹기도 했는데 다람쥐들과 그 먹이를 같이 한 것이다. 요즘은 다람쥐와 산의 생물들의 먹이가 되는 도토리를 줍는 것을 법으로 금하고 있는데 옛날에는 그 도토리가 없으면 굶어 죽는 사람들도 있었다. 도토리는 특이하여 그 해에 곡식들이 흉년이 들면 많이 달리고 풍년이 되면 적게 달린다. 그리고 그 맛도 떫어서 사람들이 선호할 맛은 아니다. 그래도 흉년이 든 겨울을 버틸 수 있는 아주 고단백의 열매다. 풍년이 들면 인간들은 먹을 것이 많으므로 굳이 떫은 도토리 열매를 먹지는 않는다. 그러면 도토리도 알아서 산의 동물들에게 맞는 양으로 작게 열린다. 그리고 그 도토리가 유지될 수 있도록 다람 쥐가 땅에 묻어둔 열매의 대부분을 잊어버리는 것도 자연의 동물들을 먹이는 시스템에 한몫을 한다. 다람쥐는 도토리를 심는데 그것도 도토리 열매가 부화하여 땅에 뿌리를 내리고 자라게 할 수 있는 정확한 방법으로 심는다. 부엽토 아래의 유효토에 닿을 수 있도록 도토리를 묻어 도토리 열매를 심어 도토리를 자라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인간과 산속의 모든 것을 먹일 수 있도록 풍성한 양식을 준비한 조물주의 안배를 도토리의 생태를 통해서도 관찰할 수 있다. 어릴 때는 그렇게 은행이 없어 줍기도 어려웠는데 이제는 길가에 채이는 것이 은행이니 세월의 무상함를 느끼기도 한다. 그리고 그렇게 어두움밖에 없었던 가난하고 힘이 없던 이 민족에게 경제의 부흥과 선교의 부흥을 주신 분께 감격할 수밖에 없다.

원래 한자를 만든 상나라의 동이족들은 은행(銀杏)의 발음을 은행이라 했다. 중국은 은행이라는 발음을 할 수 없어 그것을 자기들 식으로 변형해 인씽(银杏, 銀杏, yínxìng)이라 발음했다. 일본도 중국과 같이 발음할 수 없는 음들이 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자기들 식으로 한자를 발음했는데 이초(イチョウ, 銀杏)다. 열매는 긴난(銀杏, ぎんなん) 또는 긴쿄(銀杏, ぎんきょう)다. 한자를 잘 관찰한 사람들은 알 수 있는데 이 모든 발음의 한자는 동일하다. 이렇게 원발음인 은행이란 발음을 따라 할 수 없는 민족들은 원음을 따라 자기들이 할 수 있는 음으로 표현을 했던 것이다. 은행나무의 학명이 Ginkgo인 것은 일본어 은행 긴쿄의 철자를 잘못 적은 것이다. 그 실수가 그대로 학명으로 굳어졌다.

은행의 이름을 살펴보다, 너무 먼 곳까지 와버렸다. 은빛 살구라는 은행의 이름은 내게 몽환적인 느낌을 준다. 마치 이 세상에 있지 않은 과일의 이름인 것만 같다. 금빛 사과를 말하는 것처럼 그렇게 신화에나 등장할 것 같은 느낌의 이름이다. 은행의 익은 열매에서 나는 빛깔을 어떻게 저렇게 아름답게 묘사했는지 그 이름을 붙인 사람의 마음이 참으로 아름답다는 생각을 해본다. 내가 기억하는 은행의 열매는 그 모양보다 그 냄새로 기억되는데 그 냄새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이름인 은빛 살구라니 작명자의 마음의 너그러움과 아름다움에 감탄할 뿐이다.


은행 열매


그 냄새만 아니면 은행 과실은 아마 식용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냄새 외에도 은행 열매는 독을 품고 있다. 피부염을 일으킬 정도이니 그것을 먹었을 때는 반드시 문제가 된다. 또한 은행씨에도 독이 있다. 단단한 껍질 안에 가득 찬 연두색 씨앗은 익혀도 파괴되지 않는 독인 징코톡신이 있다. 한 번에 15알을 먹고도 죽은 사례가 있을 정도다. 보통은 그 정도로는 죽지 않는데 사람에 따라 징코톡신에 과한 반응을 보이면 15알에도 죽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15~574 알 정도의 섭취로 치사 반응이 사람마다 다르게 나타난다. 15알을 먹고 죽은 자도 있고 574알 이상을 먹고도 죽지 않은 경우도 있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너무 많이 먹는 것은 좋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은행을 적당하게 먹으면 혈관이 깨끗해져 심장질환이나 뇌질환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된다. 또한 일반적으로 수명을 연장하는 기능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년 이상을 사는 은행이 수명을 연장하는 성분을 가졌다는 것이 이상할 것은 없을 것 같다. 혈관을 깨끗하게 하고 순환기 장기인 심장이나 동맥, 정맥, 그리고 모세혈관들을 건강하게 유지해 인간의 수명을 연장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그 쫀득한 맛도 일품이다. 그래도 너무 많이 먹으면 탈이 나니 은행은 사람들을 보호하려고 사람들이 싫어하는 냄새와 잎의 독성들과 단단한 껍질을 가졌나 보다. 어릴 때 나의 동네 친구들만 해도 그 은행의 냄새와 씨에 단단히 붙어 떨어지지 않는 과실과 그 단단한 껍질 때문에 치사량에 이르도록 은행을 먹지 않았던 것 같다. 또한 은행은 인간이 심지 않으면 거의 이동이 없이 어미 나무에서 떨어진 곳에서만 씨가 떨어져 발아할 수 있다. 그런데 이는 어린 은행이 자라는데 별로 좋은 환경은 못된다. 어미 나무의 그늘 아래서 잘 자라 기는 어렵다. 또 땅에 떨어진 씨앗이 발아가 되려면 단단한 껍질이 깨지거나 새싹이 그것을 벌리고 나와야 하는데 그것도 쉽지 않다. 또 열매가 맺히는 나무는 암나무밖에 없다. 수나무는 정자를 생산하지만 열매를 스스로 맺지는 못한다. 보통 나무는 암술과 수술이 같이 있어 모든 나무가 열매를 맺는다. 이와 다르게 암나무만 열매를 맺는 은행은 번식에 불리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은행은 씨앗을 통한 자연적인 번식이 어렵다. 만약 은행이 자연번식이 잘되는 나무라면 은행 열매가 많이 맺혔을 것이고 많은 은행을 먹은 사람들이 은행의 독성을 인해 많은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동물이나 사람도 먹고 죽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그런데 은행의 냄새와 잎과 열매가 가지고 있는 독성으로 인해 그리고 은행 자체의 번식의 저조함을 인해 동물들과 사람이 보호를 받는 것이다. 그래서 은행의 악취나 독성으로 인해 은행을 악평하는 일은 옳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독이 있음을 경고해 자신은 더럽게 취급받고 경멸의 대상이 되더라도 다른 이들을 구해주기 원하는 미덕을 가진 순전한 마음으로 여겨야겠다.



은행의 색


은행은 다른 나무들에 비해 흰색의 껍질을 가진다. 물론 시간이 지나면 그 껍질이 두꺼워지고 그 색이 진해지지만 그래도 은백색이 강한 연한 빛을 띤다. 그 속에 나무색이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그냥 그 빛이 어른 거릴 뿐 나무의 갈색은 아니다.

껍질과 비슷한 색을 지니는 것이 은행열매다. 은행열매의 은백색은 그 껍질의 색과 비슷하다. 특히 어린 가지의 껍질의 색은 은행열매보다 약간 진할 뿐 거의 비슷한 색을 가진다. 은행의 흰색은 언제나 은빛을 띤다. 그 은행의 단단한 껍질을 벗겨내면 은행 씨앗이 나온다. 은행 씨앗은 얇은 막으로 둘러 싸여있다. 그 색은 은갈색이다. 은빛 광택을 가진 막은 겉은 은백색에 속에 있는 갈색이 비치는 색이다. 은빛 비단천 안에 갈색포를 입으면 나타나는 색이다. 막의 안쪽은 광택은 유지되지만 갈색이다. 갈색이 일반적으로 나무에서 볼 수 없는 색이다. 그런 갈색은 내가 살면서 자연에서 관찰한 적이 없는 색이다. 소나무 껍질의 속살의 색보다 더 파스텔톤인데 광택이 있어 비단을 보는 듯하다. 그리고 그 안에는 연두색의 반투명한 보석 같은 씨앗이 있다. 은행의 투명함은 익지 않았을 때는 보이지 않는다. 은행이 익으면 나타나는 색은 반투명한 진한 옥의 색이다. 그 모양도 갸름하여 마치 반지에 세공되어 장식되는 보석처럼 보인다. 익지 않았을 때는 색이 연두색인데 불투명하다. 그 색이 풀색에 흰 물감을 섞어 희석하면 나오는 색인데 그런 색감도 자연에서 흔하지 않은 특이한 색이다. 그러면서도 그 색은 파스텔톤을 가진다. 그 연둣빛이 은행의 전체적인 색의 베이스가 되는 것 같다.

은행 잎은 열매의 색과 같은 계열인데 그 색이 더 선명하고 진하다. 처음 싹이 날 때의 색도 동일한 색이다. 보통의 싹은 잎이 다 자라고 난다음의 색보다 연한데 은행은 처음 날 때부터 그 색이 다 자란 잎의 색과 같다. 은행 잎의 색은 연두와 초록의 중간쯤 되는 색인데 언제나 빛을 투과시키면 따뜻한 노란빛이 살짝 도는 색이다. 마치 어린 새싹이 돋아날 때 초록의 둘레에 살짝 노랑이 보이는데 그런 색이 보일 듯 말 듯 한다. 빛이 투과될 때 잎의 잎맥을 보면 은행은 다른 나무와는 다르게 잎의 자루에서부터 잎의 끝으로 일자로 이어진 맥이 있다. 그것도 잎맥이 선명하게 보이는 것이 아니라 마치 천에 그런 결이 있는 것처럼 일자로 이어진 맥이 병렬로 무수히 얇게 그려져 있다. 일반적인 잎과 다르다. 마치 꽃 잎과도 같은 것 같은데 꽃 잎의 형태도 아니다. 하여튼 특이하다. 다른 식물의 잎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그 모양도 하트모양에서 양 옆이 삼분의 일 쯤 잘린 모양과 비슷하다. 나는 잎이라기보다는 꽃의 모양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꽃의 수술과 암술이 올라오는 자리에 그 잎이 같이 난다. 은행의 수술은 흰색의 작은 꽃들이 무수히 피는 형태다. 암술은 또 다른 빛과 형태를 가진다. 그런데 그 수술과 암술은 잠시 나타났다. 없어지는데 그때도 잎은 마치 꽃잎과 같이 그곳에 있다.

그리고 가을이 되면 은행의 가장 아름다운 시절이 찾아온다. 바로 은행 잎이 꽃잎이 되어 노랗게 피어나는 것이다. 은행의 노랑은 온 세상을 노랑으로 물들이는데 위에 달려 단풍으로 노랗고 나무의 아래에 떨어져 나무아래도 온통 노랑으로 물들인다. 나무의 형태가 둥근 형태라 떨어진 잎의 집합들도 원형이다. 노란 단풍을 단 은행나무의 아래에 그 나무보다 살짝 큰 노란 원이 하나 더 그려진다. 너무 발랄하고 사랑스러운 은행의 색은 언제나 보는 사람의 마음을 따듯하게 하는 노란 병아리의 색보다 더 진한고 밝은 미소와 같다. 비 오는 날 노란 비옷을 입고 그 위에 노란 우산을 쓴 유치원 아이들과 같이 마냥 밝다. 그러면서도 다소곳하고 순한 색이다. 여름 하늘을 배경으로 하여 녹음으로 가득하다가, 가을이면 떨어지기 전에 마지막 꽃의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은행의 낙엽은 낙화한 꽃보다 아름답다. 어떤 꽃잎도 떨어져서도 그렇게 아름다운 색을 유지하기 힘들다. 밟혀도 그 색은 잘 퇴색되지 않는다. 그리고 무수히 겹쳐 쌓여서 땅을 다 덮어버리고 노랑의 채색을 한다.

"아름답다"

가을의 은행나무를 보면 입에서 이 말이 그냥 흘러나온다. 언제나 그 아름다움은 주검의 겨울을 향하는 나의 마음에 즐겁고 명랑하게 마지막 위로의 인사를 건넨다. 그 잎들은 겨울 눈이 올 때까지 색을 유지하며 기쁨을 준다. 겨울 눈이 덮이고 잎들이 마르기 시작하면 노랑이 퇴색되지만 그래도 그 여운을 남긴 낙엽들이 그 자리에 쌓여 있다.

그 노랑을 닮은 티셔츠를 어릴 때 입었다. 시골 전방(편의점)의 예쁜 누나가 전방에 갈 때마다 '노란 샤스 입은 말 없는 그 사람이 나는 좋아'이라는 노래를 부르며 나를 놀렸던 기억이 나는데 나는 그 놀림도 싫지 않았다. 국민(초등) 학교 저학년이 보아도 20대의 누나가 참 예뻤기 때문이다. 그 미소가 마치 은행의 발랄한 노랑을 닮은 누나였다. 웃음엔 악의가 없었고 내가 마냥 귀엽다는 표정이었다. 그래서 그 장난에 말없이 배시시 웃었다. 그 전방 옆 언덕 비탈에는 개나리 빛이 나는 노란 괴불주머니 꽃들이 지천으로 피었었는데 그 꽃의 색도 그 누나를 닮았었다. 은행의 노랑은 봄에 피는 개나리와도 닮았고 들에 피는 노랑 야생 백합인 나리와도 닮았다. 그래서 나는 그 은행의 단풍이 꼭 꽃처럼 느껴진다. 가을에 마지막 화려한 꽃을 피우는 아름다운 나무가 은행이다. 그 전체를 꽃송이로 변화시켜 수만의 낙화로 땅을 덮어 땅에 꽃의 원을 노랗게 물들이는 그렇게 화려하고 크고 아름다운 꽃이다. 은행나무는 몇백 년을 넘게 사는 나무라 그 크기도 엄청나다. 동구밖에서 보아도 마을 전체에 우뚝 솟아나 있어 그 노란 단풍 꽃을 가을 내내 어느 방향에서나 볼 수 있다. 그리고 언제나 봄 병아리 같은 따사로운 미소로 나를 반겨준다. 오래된 은행 나무일 수록 가을에 작은 언덕정도의 크기로 마을을 감싸 노란빛으로 물들인다. 그 잎이 떨어지는 범위는 마당정도이지만 그 빛깔이 온 마을을 감싸고 온 마음을 감싼다. 가을에 피어오르는 다른 낙엽들의 색과 함께 어우러져 계절을 아름답게 채색한다. 그리고 은행의 씨앗을 감싸고 있는 은빛 살구를 내어 다음 세대를 준비한다. 그 은빛 살구의 색도 은행 잎의 색과 같은 노랑이다. 공룡의 먹이였던 이 나무는 천년을 넘게 산다. 그 오랜 세월 동안 아지랑이처럼 피었다가 사라지는 덧없는 인생들을 보아왔을 것이다. 그 흘러가는 세월의 물결을 따라 천년을 넘어와 도착한 현대에도 여전히 그 시작했던 시절과 같이 은행잎을 피우고 있다.


은행 독의 양면성


이 세상에 항상 유순한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명량하고 또 돌변하여 독을 품은 듯 강한 성격을 보여주는 사람도 있다. 인간적으로는 그 독하고 악취를 풍기는 성품을 지닌 사람들을 꺼려하게 된다. 그런데 대부분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약함이나 트라우마를 보호하기 위해 상대를 까칠하게 대할 때가 많다. 심지어 공격하고 과격하게 밀어내기도 한다. 그런데 그들의 독은 항상 해만 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상대에게 경고를 주어 상대를 대할 때 조심하고 그로 인해 서로서로 피해를 입지 않게 해 준다. 그렇다 하더라도 독을 품고 상대를 죽일 듯 공격하는 성격은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런 상처로 인한 독이 가득 찬 사람들은 치료가 필요하다. 그 시체 썩는듯한 똥냄새와 독성도 용납하고 품어줄 사랑이 필요하다. 그들의 열매가 썩어도 그들을 맡아 그 악취를 씻어 내줄 시간을 견딜 인내자가 필요하다. 그들이 그렇게 독한 악취와 공격성으로 퍼부어댈 때도 결코 받은 대로 갚지 않고 사랑만으로 감싸고 기다려줄 카운셀러가 필요하다. 그런 존재를 만나면 이들은 변화되어 수많은 사람을 살릴 치료자가 될 것이다. 상대의 심장을 고쳐주고 뇌혈관의 질환을 고쳐줄 아름다운 자가 될 것이다. 아파본 사람이 남의 아픔을 알고 자신이 치료받아 본 사람이 다른 이를 치료할 수 있다. 스스로 치료해 줄 수 없어도 최소한 어느 의사를 만나면 치료받을 수 있는지 알려 줄 수 있다.

젊은 시절 나는 켐벨 몰간의 위대한 의사 예수 그리스도라는 책을 읽었다. 설교집이었는데 그것을 재구성해 출간한 듯한 느낌을 주는 책이었다. 켐벨 몰간의 필체를 통해 만난 의사는 참으로 따듯한 분이었다. 그 누구의 아픔도 만져줄 수 있는 고귀하고 사랑이 가득한 손을 가진 분이었다. 어느 날 만난 혈루증 여인을 구해주는 그는 내 영혼의 모든 것을 단번에 사로잡아버렸다. 나는 나를 치료해 줄 위대한 의사를 만난 것이다. 내가 만난 거대한 광명은 눈물로 나를 덮었고 그 눈물은 나를 씻어 치유했고 내 안에 있던 아픔과 상처와 세상을 향한 거부와 단절을 모두 풀어 내게 자유를 주었다. 나는 오늘도 그를 찾아 내 세상 눈물과 입을 열어 말할 수조차 없는 고통의 응어리를 그에게 보인다. 말조차 나오지 않고 말할 기력을 잃을 때가 대부분이다. 그것을 어찌 감당할 것인가? 때론 가슴에 말뚝이 박혀 그것을 뺄 수가 없을 때도 있다. 그것은 치료될 수가 없다. 그것을 뽑으면 그대로 절명이다. 그대로 죽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을 감사해야 하나, 그대로 사는 것은 죽음 같은 고통이다. 세상엔 그런 고통들이 가득하다. 그러나 그것은 그 고통을 당하는 자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다른 이들은 그 고통을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위대한 카운셀러 그는 나의 심장과 신경이 연결되어 있다. 그러니 나의 고통을 그대로 느끼고 나의 심장의 말뚝을 그대로 느낀다. 그것을 뽑으면 내 심장에서 피가 터져 나와 내가 즉시 절명할 것도 안다. 그렇다고 그것이 치유될 수 없음도 안다. 치유는 그것을 품고 그대로 감내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고통을 이기고 자기와 같은 고통을 당한 자들을 긍휼히 여기는 것이다. 마치 나무가 자신에게 못이 박혀도 그것도 품고 자신의 하나로 만들어 그 상처와 함께 살듯이 그런 고통을 겪은 목자를 만나 그에게 배우는 것이다. 상처는 치유되어도 그 흔적은 남는다. 그 기억은 남아 마음에 아픔을 준다. 그러나 그 눈물은 언제나 눈물의 주, 십자가의 왕 앞에 떨어지면 된다. 그러면 그 눈물이 모여 그를 향한 사랑이 되고 그를 향한 고백이 된다. 수많은 자들의 그 눈물의 시와 고백이 모여 시내를 이루고 강을 이루고 그것이 바다를 이룰 때가 되면 수많은 영혼들을 살릴 생수의 강이 터지고 여호와를 아는 것이 편만하여 바다를 이룬다. 그것이 부흥이다. 예루살렘의 오순절은 그냥 있지 않았다. 아벨로부터 선지자들과 온전한 마지막 피를 흘리신 예수님까지 모든 흘린 눈물과 피가 모여 생수의 강을 이루고 바다를 이룬 것이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눈물로 씨앗을 뿌리고 어떤 이들은 자신의 수고가 없이 그것을 거두는 것이다.

나는 오늘도 그분의 방식을 받아들인다. 그 고귀한 희생으로 자신을 우리에게 주신 사랑의 방식을 찬양한다. 그래서 그분이 요구하는 고통과 슬픔도 감사한다. 그분의 방식은 완전하며 그 방식으로만 사람은 치유될 수 있음을 안다. 죽을 생명을 살리려면 응당 대가를 치러야 한다. 그들 스스로가 치를 수 없다면 그것을 줄 수 있는 자들이 그것을 치르면 된다.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님의 남은 고난을 지고 십자가의 길을 간다. 그러면 마을마다 거대한 아름드리 은행의 노랑꽃이 가득가득 피는 것을 볼 것이다. 그 잎이 떨어져 온 세상을 기쁨으로 노랗게 물들이는 것을 볼 것이다. 그곳에는 사악함의 해충도 죽음의 세균도 없을 것이다. 그 기쁨의 잎들이 그 모든 것을 치유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


악취 나는 우리의 행위의 열매를 받아 우리를 씻어 희게 만든 영광의 왕, 십자가의 왕을 보라. 그는 붉음으로 흰 자로다. 그 붉음으로 우리를 씻어 흰 자가 되게 하는구나. 우리는 진정 은백의 씨앗으로 거듭났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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