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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스겔 Nov 30. 2024

01.3.2.3.10. 기업을 취한 아들 여호수아14

산상수훈과 가나안(천국) 입성

앞의 글들에서는 산상수훈을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감을 설명하고 있다. 십복(팔복)과 그에 대한 부가 설명과도 같은 하늘 버전의 10 계명에 대한 설명이 이어지고 있다. 앞의 대인 계명에 대한 설명이 지나고 이제는 대신 계명에 관한 설명이 이어지고 있다. 그중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 계명에 관한 설명이 이어진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항복하고(회개하고) 천국으로 들어올 것에 대한 항복권고문이다. 이러한 항복권고문은 항상 그 기저에 전쟁이 있다. 항복권고란 결국 항복하지 않으면 전쟁을 통해 멸망시키겠다는 협박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마지막은 결국 멸망에 대한 경고로 이어진다.

처음 팔복(십복)에서는 복을 말하고 마지막 마 7:13~27은 화와 심판에 관한 경고가 이어진다. 결국 항복하지 않으면 멸망당함을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선포가 이어지니 나(예수님)와 나의 천국에 순응하는 자들은 항복을 하고 내 앞에 나온다. 그러나 그에 반대하는 자들은 전쟁을 준비하고 어떻게 해서든지 나와 나의 나라를 멸망시키려 한다. 그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 그리고 사두개인과 대제사장 가문은 나를 죽이려 했다. 그리고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나를 죽였다. 심지어 그들이 나를 정죄한 모든 죄목들은 거짓에 의한 것이었다. 어떻게 우리(하나님)를 믿는 자들이 그러한 거짓증인을 내세우는 흉악한 수단을 사용했을까? 그 이유는 하나다. 이 전쟁은 보는 눈이 없는 자들에게는 보이지 않지만 국가와 자신의 생명을 건 필사적인 전쟁이다. 또한 이 전쟁에서 자신들의 행위가 그들의 정체성을 결정한다. 천국에 속한 자는 천국의 의로 싸운다. 그러나 아무리 자신들이 교회와 진리를 표방하고 있어도 어둠에 속한 자들은 결국 거짓과 어둠에 속한 무기를 사용하여 싸운다.

그러니 너희 정체성을 보려면 현재 너희 행위를 보면 알 수 있다. 너희 교회 안에 원수의 거짓말과 모함과 험담이 있다면 이는 너희가 어둠에 속하였음을 뜻한다. 또한 이에 대해 누구나 인간은 약하므로 죄를 짓는데 그럼 누가 천국에 갈 수 있냐고 묻는다면 너는 대부분의 뾰족지붕집에 있는 자들과 같이 성경의 맥락도 모르거나 아니면 스스로에 대한 나르시스적 교만으로 구원을 자신의 자존심으로 결정짓는 자다. 이러한 자들은 이미 심령 안에서 그 자신의 심령이 자신이 거듭나지 않았음을 증명한다. 그러나 진정 너희 안에 성령이 거한다면 너희는 죄를 지을 수 없다. 또한 너희가 우리와 사귐이 있고 빛 가운데 거한다면 죄를 지을 수 없다. 이 말도 무슨 말인지 알지 못한다면 먼저 성경해석학을 배우라 그리고 정상적으로 글을 읽을 수 있는 문해력을 가지라. 만약 이 문제에 관해 너의 교회 목사에게 묻기를 원한다면 나는 한 마디로 그 어리석음을 이렇게 표현하겠다. 만약 소경이 소경을 인도한다면 너희 형편이 어찌 되겠는가? 그들은 서기관이나 바리새인들보다도 성경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이 어찌 너희 스승이 되고 선생이 되겠는가?

그러므로 너희 행위를 돌이키라. 너희 죄악에서 떠나 살길을 찾으라. 그러나 너희 스스로 너희 죄악을 떠날 수 없으니 하늘의 능력을 구하라. 죄를 용서받고 죄에서 돌이킬(회개할) 능력을 구하라. 너희가 정직함으로 죄를 떠나려 노력해 보았다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너희에게는 죄를 이길 능력이 없음을.....

그러므로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의 예루살렘을 구하며 하늘의 다락방에서 능력이 입히우기를 구하라. 하늘을 찾으라. 하늘 문을 두드리라.


01.3.2.3.10.9.5.5.11. 땅을 향한 마음과 하늘을 향한 마음의 간극


Matthew 6:19-21 바른

19"너희를 위하여 보화를 땅에 쌓아두지 마라. 그곳에서는 좀먹고 녹슬며 도둑들이 침입하여 훔쳐 간다.

20오히려 너희를 위하여 보화를 하늘에 쌓아 두어라. 그곳에서는 좀먹거나 녹슬지 않으며, 도둑들이 침입하여 훔쳐 가지도 않는다.

21네 보화가 있는 그곳에 네 마음도 있을 것이다."


이 내용은 너희가 분명 잘 아는 내용이다. 그런데 그 참 뜻을 깊이 알고 있을까? 이를 살펴보기 위해 베드로를 예로 들어 설명하겠다.


01.3.2.3.10.9.5.5.11.1. 시몬의 세상 사랑과 하늘 사랑의 간극


대신 계명의 핵심은 우리(하나님)만을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요한복음의 마지막에 베드로에게 무엇을 물었는지 너희는 기억하는가? 바로 대신 계명이다. 나를 사랑하는가? 에 대한 질문이다.

John 21:15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가?"

그런데 원어를 살펴보거나 영어 성경을 살펴보면 그 뜻이 한국인들이 일반적으로 해석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01.3.2.3.10.9.5.5.11.2. 비교의 대상


위의 문장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되어지는 대상이 베드로라고 보는가? 아니면 나 예수라고 보는가?

즉 해석을 두 가지로 할 수 있다.

첫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너는 나를 더 사랑하는가?"인가?

아니면 둘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했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가?"인가?


01.3.2.3.10.9.5.5.11.3. 번역성경들


이에 대해서는 한글 번역 성경과 다른 번역들도 그 의견을 달리하는 것들이 있다.

01.3.2.3.10.9.5.5.11.3.1. 명확하지 않은 번역본들


먼저 그 뜻이 명확하지 않은 번역들은 다음과 같다. 다음의 번역본은 한글성경 자체로는 그 비교의 대상이 명확하지 않다.

John 21:15 개정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John 21:15 새번역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John 21:15 현대인
"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John 21:15 쉬운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모든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John 21:15 바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01.3.2.3.10.9.5.5.11.3.2. 다른 사람들과 베드로를 비교한 번역본들


첫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너는 나를 더 사랑하는가?"라는 해석을 지지하는 번역본들도 있다.

John 21:15  공동개정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John 21:15 가톨릭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이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01.3.2.3.10.9.5.5.11.3.3. 다른 사람들과 나 예수를 비교한 번역본들


둘째,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너는 다른 사람들과 나를 비교했을 때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가?"를 지지하는 번역본들은 다음과 같다. 영어권이나 유럽의 번역들은 거의 이 둘째 해석을 지지한다. 이는 이들의 어순이 그리스어의 어순과 유사하기에 그 해석에 혼동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원어(τούτων)도 그러하고 영어(these)도 동일하게 '이 사람들'로 해석될 수 있다. 그리고 '이것들로' 해석될 수 있다. 사람들로도 해석되고 사람이 아닌 다른 사물들로도 인식될 수 있는 것이다.

John 21:15 欽定倂用
요나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것들(these)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John 21:15 KJV
Simon, [son] of Jonas, lovest thou me more than these?

John 21:15 YLT
'Simon, [son] of Jonas, dost thou love me more than these?'

John 21:15 NIV
“Simon son of John, do you love me more than these?”

John 21:15 MSG(The Message)
“Simon, son of John, do you love me more than these?”

John 21:15 LSB
“Simon, _son_ of John, do you love Me more than these?”

John 21:15 ASV
"Simon, _son_ of John, lovest thou me more than these?"

John 21:15 NASB
“Simon, _son_ of John, do you love Me more than these?”

John 21:15 AMP
“Simon, _son_ of John, do you love Me more than these?"

01.3.2.3.10.9.5.5.11.4. 원어성경


John 21:15 WHNU
"σιμων ιωαννου αγαπας με πλεον τουτων"

John 21:15 BIB
“ ΣίμωνSimōn[^2] Ἰωάννου,Iōannou ἀγαπᾷςagapas μεme πλέονpleon τούτων"

John 21:15 UBS5
Σίμων Ἰωάννου, ἀγαπᾷς με πλέον τούτων

John 21:15 TRa+
ΣίμωνSIMON [SON] ἸωνᾶOF JONAH,, ἀγαπᾷςLOVEST THOU μεME πλεῖόνMORE τούτωνTHAN THESE?

마지막 헬라어 공인본(TR, Textus Receptus)의 옆에는 순서를 파악할 수 있도록 각 단어마다 영어 번역을 붙였다. 원어의 어순은 영어와 같음을 알 수 있다. 즉 그 비교의 대상이 다른 사람들(또는 다른 것들)과 나 예수라는 것이다.


01.3.2.3.10.9.5.5.11.5. 다른 사람들과 다른 것들


이 구절을 해석함에 있어 또 다른 문제점이 있다. 영어의 these가 이 사람들과 이것들을 나타내듯 원어의  τούτων(투톤)도 이 사람들과 이것들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우리말로 옮길 때에 이를 어떻게 옮겨야 할 것인가?

한글성경은 대부분 '다른 사람들'로 번역하고 있다. 즉 이 사람들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 사람들이라 되어있으므로 요 21:15의 현장에 있던 사람들이다. 한글 성경의 대부분은 τούτων(투톤, these)을 베드로 외의 다른 여섯 제자, 디두모라는 도마와 갈릴리 가나 사람 나다나엘과 세베대의 아들들(야고보와 요한)과 예수님의 제자들 중 다른 두 사람(요 21:2)으로 보고 있다.

한글흠정역은 τούτων(투톤, these)을 다른 것들로 번역하고 있다.

영어나 원어는 위의 두 가지 모두로 해석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문제들에 대한 답을 할 수 있을까?




01.3.2.3.10.9.5.5.11.6. 요 21:15절의 문맥과 해석



사실 영어나 원어를 찾아보지 않고도 본문 자체의 대화의 맥락(좁은 문맥)을 살피면 이를 알 수 있다.


01.3.2.3.10.9.5.5.11.6.1. 좁은 문맥


나의 질문에 바로 이어지는 베드로와 나의 대화이다. 기록된 성경 본문을 보자.

John 21:15 바른
15그들이 아침을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가 예수께 말하였다.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 어린양들을 먹여라."

내가 다른 사람들(이것들)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을 때 베드로는 그냥 나를 사랑한다고 했다. '그것을 내가 안다'라고 답했다. 다른 사람(이 사람들, 이것들)에 대한 언급이 없다.

그리고 베드로의 답에 대한 나의 답은 그에게 "내 어린양들을 먹여라"였다.

애초에 나의 질문에는 다른 사람들 즉 그 자리에 있었던 다른 제자들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랬다면 위와 같은 베드로의 대답이 있을 수 없다. 만약 다른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더 나를 사랑하느냐하고 물었다면 베드로의 대답은 이러했어야 한다.
"예 이들보다 더 주님을 사랑합니다."

그런데 베드로의 대답은 그렇지 않았다.

단지 나를 사랑하느냐에 대한 답을 하고 있다. 즉 나를 사랑한다는 것이다.

이 답이 나오려면 "너 나를 사랑하느냐?" "너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냐?" "너 나를 사랑하기나 했냐?" "그리고 지금도 사랑하는 것이 맞느냐?" "그렇게 나를 배신하고 지금 이곳 고향에서 고기나 잡고 있는데 너는 네 삶을 사랑하느냐? 아니면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이 있어야 한다.

다른 경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만약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했다면 그 답은 "제가 더 사랑합니다." 여야 한다.

둘째, "다른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질문했다면 그 답은 "주님을 더 사랑합니다." 여야 한다.

그러나 본문의 답은 "주님을 사랑합니다" "주님도 아시지 않습니까?"

이는 "나를 사랑하느냐?"에 대한 답이다.

그런데 본문에는 '이 사람들(또는 이것들)보다'라는 말이 첨가되어있다. 만약 '이 사람들보다'라는 의미였으면 위의 첫째나 둘째의 답이 나와야 한다.

그런데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하면 그냥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대답해도 된다. 이 질문은 '돈을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하느냐?', 또는 '네 삶을 사랑하느냐? 나를 사랑하느냐?'에 대한 답과 같다. 이 질문들에는 '주님을 사랑합니다'라고 답하면 된다.

본문에서 베드로는 고향과 친척과 아비집으로 돌아가 가문의 가업을 잇고 있다. 나의 질문에 그는 처음 나 예수를 만나 버렸던 그것을 다시 버렸다. 그리고 나를 사랑하여 나를 따르기를 선택했다.

이것을 더 선명히 볼 수 있는 더 넓은 문맥을 살펴보자.


01.3.2.3.10.9.5.5.11.6.2. 넓은 문맥


십자가와 부활에 관한 사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A. 십자가
a. 체포
b. 안나스 앞에 선 나(예수님)
c. 가야바 앞에 선 나(예수님)  
d. 베드로의 부인(否認)
e. 산헤드린공회 앞에 선 나(예수님)  
f. 가룟 유다의 자살
g. 빌라도 앞에 선 나(예수님)  
h. 헤롯 앞에 선 나(예수님)  
i. 빌라도 앞에 선 나(예수님)  
j. 로마 병정들의 희롱을 당함
k. 골고다로 끌려가는 도중에서
l. 십자가 처형
m. 백 부장의 고백
n. 내(예수님)가 창에 찔림


B. 무덤에 장사됨

a. 나(예수님)를 장사 지냄
b. 토요일 :무덤에 파수꾼을 세움


C. 부활 이후의 사건들
 1. 두 여인(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이 무덤에 찾아옴
 2. 지진이 일어남
 3. 막달라 마리아의 슬픔
 4. 여인들에게 천사가 나타남
 5.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으로 옴
 6. 내(예수님)가 마리아에게 나타남
 7. 내(예수님)가 여인들에게 나타남
 8. 파수꾼의 보고
 9.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
 10. 열 제자에게 나타남
 11. 열 한 제자에게 나타남
 12. 일곱 제자에게 나타남(요 21:1~25) 
 13. 지상 대명
 14. 나(예수님)의 승천  

이 사건( 12. 일곱 제자에게 나타남)은 내가 부활한 후 마리아에게 나타나고 여인들에게 나타났으며 그 이후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에게도 나타났으며 의심 많은 도마를 제외한 10명의 제자들에게 나타난 일들과 그 후에 도마를 포함한 11명의 제자들에게 보인 이후에 일어난 일이다. 10명과 11명에게 나타났을 때 베드로는 그들 중에 분명 포함되어 있었다.

베드로는 이 일들 즉 십자가와 부활 이후의 일련의 사건들이 있기 전 요 18:25~27에서 나(예수님)를 배신했다. 그런데 그 바로 앞에는 나(예수님)를 위하여 칼을 빼들고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잘랐다. 그때에는 아직 내(예수님)가 잡히기 전이었다. 그가 믿던 나(예수님)는 결코 힘이 없는 자가 아니었다. 메시야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리고 베드로가 고백했듯이 베드로는 내(예수님)가 하나님의 아들과 그리스도로서 어떤 적들도 물리치고 승리할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것은 자신의 기대일 뿐 나(예수님)는 무력하게 잡혀갔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베드로는 알 수 없었다. 베드로는 그때 정신없는 가운데 대제사장 가야바의 저택 재판정 바깥에 앉아 있었다. 그때 여종의 질문에 세 번이나 나(예수님)를 부인하게 된다. 나(예수님)는 십자가에 달렸다. 그리고 부활했다. 부활한 나(예수님)는 베드로가 있는 곳에 여러 번 방문했다. 그런데 베드로의 반응은 나를 떠나 물고기 잡으러 간다는 것이다. 왜 그랬을까?  
가능한 추측들이 있다.
1. 나(예수님)를 부인하여 더 이상 자신은 나에게 인정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여 물고기 잡으러 갔다.
2. 나(예수님)는 실패한 자로 더 이상 따라다녀도 이익이 없다고 생각하여 고향 갈릴리로 돌아갔다.

그런데 둘 모두 자신에게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자기중심적인 생각으로 움직인 것이다. 과연 베드로에게 나(예수님)의 부활은 기쁨이었을까? 아마 베드로는 부활하신 나(예수님)를 보는 것이 고통이었을 것이다. 또한 내(예수님)가 왜 십자가에 죽었는지 또한 부활한 내(예수님)가 무엇을 할 것인지 알지 못했다. 또한 자기가 기대하던 천국이 도래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었을 것이다. 유대인의 세계정복과 그곳에서 다스릴 것을 상상했던 베드로였는데 그런 것이 없다면 이제 무엇을 해야 했을까? 나(예수님)는 바로 십자가를 지기에 앞서 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는 상관이 없다(요 18:6)고 했다. 또한 검을 쓰지 않겠다고 했고 아버지께서 12군단의 천사를 보내주실 수 있지만 성경에 예언된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위해 그렇게 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기대는 완전히 무너진 것이다. 베드로가 나를 처음 따라왔던 모든 목적이 사라진 것이다.

나를 부인하여 나에게 인정을 받지 못하든 아니면 내가 자신이 바라는 유대세계제국 즉 천국을 건설하지 않든 어찌 되었든 자신의 목적은 사라진 것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나를 떠나 다시 고향 바닷가로 갔다. 그런데 너희는 이상하지 않은가? 베드로와 같이 배신하지 않은 다른 6명의 제자가 베드로와 같이 갈릴리 호수로 가서 물고기를 잡고 있었다. 어찌 된 것인가? 이들도 나를 배신하고 갈릴리로 간 것인가?

물론 내가 부활한 후에 천사들과 여자들에게 내가 갈릴리로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고 말했다. 그래서 그들이 갈릴리로 갔다는 말인가? 이상하지 않은가? 그들이 나를 기다리기 위해 갈릴리로 갔다면 그리고 나의 나라 즉 천국을 구하러 갔다면 그들이 물고기나 잡고 있었겠는가?

베드로는 나(예수님)를 부인하여 모든 것을 포기하여 갈릴리 호수에서 자기 집안 가업인 어부일이나 할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제자들은 베드로와 같이 부인하지도 않았는데 왜 그렇게 다시 본래의 일로 돌아가 호수의 고기를 잡고 있었다는 말인가?

사실 다른 제자들도 베드로와 사정이 별다르지 않았다. 그들은 나(예수님)를 세 번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모두 내가 잡혀서 심문을 당하고 십자가에 달릴 때 한 번씩은 두려워 도망을 쳤다. 그러니 모두 나를 배신한 것이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이 베드로였지 다른 제자들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내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하는 것은 모두 마찬가지였다. 물론 십자가 앞에 나왔던 요한은 좀 나은 편이었다. 그러나 요한도 처음 내가 잡혀갈 때에는 도망을 갔었다. 그러니 요한도 내게 죄를 지은 것은 마찬가지다.

또한 베드로 외의 다른 제자들도 자신들이 기대했던 유대세계제국이 실현되지 않을 것에 대한 실망감이 있었다. 무언가 자신들의 기대와는 십자가와 부활 사건의 방향이 달랐던 것이다. 그래서 그냥 모든 것을 포기하고 갈릴리로 갔던 것이다. 죄책감과 실패의 허무감이 그들의 마음을 동시에 장악하여 결국 고향으로 낙향하는 자포자기의 선택을 만들어냈다.

나(예수님)는 이렇게 죄책과 낙망으로 고향으로 간 그들을 다시 부르러 갔다. 나는 이들을 부르러 가서 그들과의 처음 만난 사건과 그리고 마지막 이별의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처음 만남은 지금 그들이 있는 갈릴리 호수에서였다. 특히 베드로와 안드레, 야고보, 요한은 물고기를 잡는 현장에서 만났다. 성경의 기록을 보자.

Matthew 4:18-22 바른
18예수께서 갈릴리 바닷가를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있는 것을 보셨는데 그들은 어부였다.

19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하시니,

20그들이 즉시 그물을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21거기서 더 가시다가 예수께서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을 보셨다. 그들이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을 수선하고 있었는데, 예수께서 그들을 부르시니,

22그들이 즉시 배와 자신들의 아버지를 버려두고 그분을 따랐다.


요 21장의 사건에 등장하는 제자들은 대부분 갈릴리 바다 출신의 어부들이다. 너희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자들이 베드로와 안드레, 그리고 알패오의 아들들인 야고보와 요한이다. 요한복음을 기록한 자가 바로 알패오의 아들 요한이다. 그들은 처음 나를 만나 자신들의 배와 그물을 버리고 아버지와 친척과 고향을 버렸다. 그들이 나를 따라다녔던 약 3년의 기간 동안 그들은 나와 함께 하였고 내게 듣고 보고 배운 것을 기억했다.

그들이 나를 처음 만났던 사건을 기억하는 것은 아래와 같다.

Luke 5:1-11 바른
1무리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예수께로 몰려들었을 때에 예수께서는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시다가,

2호숫가에 대어 있는 배 두 척을 보셨는데, 어부들은 배에서 내려 그물을 씻고 있었다.

3예수께서 그 배들 중 하나인 시몬의 배에 오르시어, 육지에서 조금 떼어 놓도록 하시고 배에 앉아 무리들을 가르치셨다.

4예수께서 말씀을 마치시고 시몬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깊은 데로 나가라. 그리고 너희는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 하시니,

5시몬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선생님, 저희가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으나 선생님의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리겠습니다." 하고,

6그대로 하니, 많은 고기 떼가 잡혀서 그들의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다.

7그들은 다른 배에 있던 동료들에게 손짓하여, 와서 자기들을 도와 달라고 하였고 그들이 와서 두 배에 고기를 가득 채웠는데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었다.

8시몬 베드로가 이것을 보고 예수님의 무릎 앞에 엎드려 말하기를 "주님, 제게서 떠나소서. 저는 죄인입니다." 하였으니,

9이는 베드로와 그와 함께 있던 모든 이들이 고기 잡은 것에 놀랐기 때문이며,

10또, 세베대의 아들들로서 시몬의 동료인 야고보와 요한도 역시 놀랐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말씀하시기를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하시니,

11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나서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 아닌가? 바로 요 21장에 나오는 사건과 거의 유사하다. 단지 그물을 깊은 곳으로 던지라고 했던 것과 다르게 오른쪽으로 던지라고 했을 뿐이다. 또한 처음 사건에서는 그물이 찢어졌는데 그래서 야고보와 요한이 다가가서 도왔다.

이때 베드로는 놀라 자신은 죄인이므로 자신을 떠나 달라고 했다. 또한 그 옆에 있던 안드레와 야고보 요한도 놀랐다.

그때 나의 말이 이러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제부터 너는 사람들을 낚을 것이다."

마태도 이 사건을 위에 기록했지만 좀 축약해서 기록했다. 그러나 그의 기록에도 나의 초청과 약속의 말은 동일하게 기록되어 있다.

바로 "나를 따라오너라. 그러면 내가 너희를 사람들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이다.

이 사건을 오버랩시키며 다시 베드로와 제자들을 부른 나는 다시 베드로에게 사명을 주었다. 바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라는 말과 동일한 말이지만 다른 표현이었다.

바로 "내 양들을 먹여라." "내 양들을 쳐라."  "내 양들을 먹여라."였다.

이것을 보면 베드로에게 내가 물었던 첫 번째 질문에서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의 의미를 알 수 있다. 이것들은 처음 버리고 떠나왔던 것들이다. 바로 베드로가 다시 돌아간 고향과 친척과 아비집이다.

처음 나의 초청을 받았던 그들은 이것들을 버리고 나를 따랐다. 그물과 배를 버리고 그 자리에서 나를 선택했다. 그물과 배를 버리는 것은 자신의 생업과 가정을 버리는 것이었다.

그들은 그 버렸던 자리로 다시 돌아갔다. 그래서 내가 물은 것이다.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여기서 나는 왜 세 번 사랑하느냐고 물었을까?

위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에서도 가장 그들에게 슬픈 기억으로 남는 것은 배신의 기억이다. 그 배신 중에서도 베드로의 닭 울기전 세 번의 부인이 가장 극악했다.

그래서 나는 베드로에게 세 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었다.

또한 베드로에게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도록 하는 장치들도 미리 마련했다. 바로 숯불을 피우고 생선을 구웠던 것이다.

나는  숯불을 피웠다. 내가 잡히던 그 밤에 베드로는 대제사장 가야바의 재판정 밖에서 하인들과 불을 쬐고 있었다.(막 14:54,67, 눅 22:55, 요 18:18) 그리고 내가 정죄되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두려움에 떨고 있었다. 그가 재판 정 근처에 까지 나오지 못한 것은 그도 잡힐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알고 있었다. 그대로라면 나는 사형에 처해질 것이라는 것을... 그 자리에서 어린 계집종이 세 번 질문을 했다. 그리고 베드로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세 번 나를 부인했다.

내가 숯불을 피우고 올라온 베드로를 맞았을 때 그는 벌써 그날 밤의 일을 떠올렸다. 그래서 나와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 상황에 나는 구운 생선과 빵을 주어 아침을 먹게 했다. 과연 그 빵과 생선을 베드로는 제대로 씹어서 넘길 수 있었겠는가? 아마 너희가 베드로와 같은 입장이었다면 밥을 먹고 채하여 고생을 하였을 것이다.

그렇게 죄스러움에 곤혹스러워하는 베드로에게 나는 결정타를 날렸다. 바로 세 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물은 것이다. 그 세 번의 질문에 베드로는 세 번의 배신을 떠올렸다. 그리고 그날의 통곡도 기억했다. 그럼에도 베드로는 나를 사랑한다고 고백했다.

나는 그에게 용서한다는 말은 안 했지만 내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는 세 번의 반복된 말을 통해 그를 용서했다. 동시에 그가 자신이 버리고 떠났던 그 현장에 있던 것들(τούτων, 이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니 내가 명하는 사명을 감당하라고 했다. 이제 생선을 잡는 어부가 아닌 사람을 잡는 어부가 되라고 처음 명했던 것처럼 양을 먹이고 치는 자가 되라고 했다.

처음 베드로가 나를 만나 자신은 죄인이라고 떠나 달라고 했을 때도 나는 그의 죄를 용서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의 말의 핵심은 죄 용서에 있지 않았다. 나를 따르고 싶다는 것에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도 죄용서를 언급한 것이 아니라 "나를 따르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했다.

지금도 처음 만남의 사건과 동일한 상황이 연출된 것이다. 이렇게 처음 만남과 마지막 배신의 사건을 동시에 오버랩하면서 나는 베드로를 다시 불렀다.

옆에서 보던 다른 제자들에게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들에게도 용서와 다시 부름의 초청을 하였다. 그들은 자신들 중에 가장 심각한 베드로를 용서하고 다시 사명을 주는 것을 보고서 자신들도 당연히 용서받았음을 알았다.


01.3.2.3.10.9.5.5.11.7. 처참한 인간의 본성


그런데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렇게 용서받고 나서도 사실 잘 깨닫지 못했다. 여전히 나의 나라인 천국에서 한자리 차지할 것에 관심이 있었다.

그 증거가 바로 뒤에 나온다. 요한은 어떻게 되느냐는 베드로의 질문에 있다. 제자들 중 그나마 십자가 사건에서 가장 작은 배신을 하고 십자가 앞에까지 나와서 내게 내 어머니 마리아를 부탁받은 요한에 대한 시기에서 나온 질문이었다. 요한이 가장 큰 자리를 차지하지 않을까를 질투한 베드로를 보라. 이것이 인간의 상태다.

나의 12 제자라 하여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이 땅의 것을 구한다. 심지어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겪고 자신들이 모두 배신한 후에 용서받고서도 여전히 이 땅의 것을 구하는 인간들이다.


01.3.2.3.10.9.5.5.11.8. 불가능의 계명


이러한데 감히 누가 땅의 것이 아닌 하늘의 것을 구하겠는가? 나와 함께 3년을 했고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을 모두 지켜본 자들도 동일했는데 누가 감히 자신이 하늘의 것만을 구한다고 할 수 있겠는가? 볼 수 있는 눈이 없는 자들은 자신들이 그러한 상태인지 깨닫지도 못한다. 오직 하나님을 위해 했다고 하는 그들의 말은 그들이 깨닫지 못해서 하는 말들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베드로를 보라. 방금 그 추악한 죄를 용서받고서 바로 탐욕을 일으켜 요한을 질시하는 그의 모습을 보라. 이러한데도 사람에게 발견할 의가 있는가? 누가 감히 내가 명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보다 나은 의를 가지고 자신을 증명하여 나의 나라에 들어올 수 있겠는가? 죄악을 깨닫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죄에서 돌이켜 어둠에서 빛으로 돌이키겠는가?

그래서 오순절 이후의 제자들과 오순절 이전의 제자들의 상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간은 의를 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 상태가 오염되어 자신들은 선이라고 믿고 행하는 것도 악으로 더럽혀진 걸레와 같다. 오직 나의 의와 성령 아니고서는 그 누구도 천국에 합당한 행실로 얻는 완전한 의를 얻을 수 없다.

이러한데도 너희 탐욕에 가득한 사제와 목사들아 너희 육신의 일에 착념하며 나의 일을 한다고 위선을 떨겠는가? 너희가 목회하는 것이 과연 나를 위한 것인가? 아니면 너희 육신의 명예와 부를 위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면 너희는 어찌하여 큰 교회와 많은 성도의 수와 사례비와 복지제공을 따라 너희 마음대로 내게 허락도 받지 않고 교회를 옮기는가? 어찌하여 내가 아닌 다른 임금인 교황을 섬기며 그의 명에 따라 움직이는가? 그의 말이 성경의 권위를 넘어선다는 말들에 대해 현대에도 떠들고 있는데 그것에 대해 너희는 어찌 생각하는가?

그리고 신사참배자들과 모든 배교자들의 후예인 너희 교회여 너희는 다르겠는가? 이 소경들아 깨닫고 돌이켜 살 길을 달라, 엎드려 구하라.






[^1]: 석유의 생성 기원설은 두 가지가 있다. 유기 기원설과 무기 기원설이 있다. 유기 기원설은 고생대의 지층들에서 유기물질인  생물의 사체에서 만들어진다는 가설이다. 무기 기원설은 근대에 이르러 그 과학적 입증들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멘틀아래 마그마의  열에 의해 생성되는 메탄이 응축되어 석유가 되고 그것이 암석층에 고인 것이라는 가설이다. 여기서는 무기기원설을 기반으로 비유를  하고 있다.


[^2]: 원어를 영어로 음역한 것이다. 원어를 모르는 사람도 영어로 적힌 것을 읽으면 원어의 음이 어떠한가를 알 수 있도록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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