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과 천국(가나안) 입성
Matthew 6:22-24 바른
22"눈은 몸의 등불이다. 그러므로 네 눈이 좋으면 네 온몸이 밝을 것이다.
23그러나 네 눈이 나쁘면 네 온몸이 어두울 것이다. 그러므로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두우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심하겠느냐?"
24"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그가 한쪽을 미워하고 다른 쪽을 사랑하거나 한쪽을 중요하게 여기고 다른 쪽을 업신여길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
위의 문장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겠는가?
눈이 어두우면 왜 온몸이 어둡다는 것인가?
네 속에 있는 빛은 무엇인가?
또 네 속에 있는 빛이 어둡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 어두움이 얼마나 심하겠느냐는 또 무슨 듯인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한 주인을 섬겨야 하는데 그 한 주인은 누구인가?
이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이 글을 쓰고 있는 마태와 그리고 마태를 통해 말하고 있는 성령의 의도를 보아야 한다. 또한 원래 이 말을 했던 나 예수의 의도를 보아야 한다. 말이란 말의 문맥이 중요하다. 즉 누군가 말을 할 때 그 말의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그 사람이 그 문장 앞뒤에 한 말을 살펴야 한다. 그래야 듣는 사람이 들리는 대로 듣지 않고 말하는 사람의 의도대로 들을 수 있다.
Love. 대신 계명( 마 6:1~7:11)-완전한 우리(하나님) 사랑
6. 마 6:1 아버지께만 은밀히 의를 보이라
마 6:2~4 은밀히 도와줌(2절 외식자)
마 6:5~6 은밀히 기도(5절 외식자)
마 6:7~15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
마 6:16~18 은밀히 금식(16절 외식자)
7. 마 6:19~21 보화도 하늘 아버지께
8. 마 6:22~24 눈 초점도 아버지께
마 6:25~34 초점을 의식주보다 아버지께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
9. 마 7:1~5 스스로 판단하지 마라 판단도 아버지의 눈으로(5절 외식자)
마 7:6 판단력 없는 개, 돼지에게 지혜를 던지지 말라
10. 마 7:7~11 스스로 아닌 아버지의 성령님으로(성령님을 구하라)
마 6:22~34은 산상수훈의 대신 계명의 가운데 있는 계명이다. 위의 구조분석에서는 마 6:22~34의 제목을 눈의 초점도 아버지께라고 했다. 사실 이 구절들에서 눈에 관한 언급이 있지만 그것이 눈의 초점에 대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왜 눈의 초점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땅과 하늘, 그리고 세상과 천국, 그리고 세상 임금과 하늘 임금을 동시에 쳐다보고 그것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바로 초점을 흩트리지 말고 오직 한 초점을 정확하게 바라보아야 함을 말한 것이다.
산상수훈에서 대신 계명을 언급할 때에 핵심은 너희 하늘 아버지만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마 6:1 아버지께만 은밀히 의를 보이라
마 6:2~4 은밀히 도와줌(2절 외식자)
마 6:5~6 은밀히 기도(5절 외식자)
마 6:7~15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기도
마 6:16~18 은밀히 금식(16절 외식자)
처음 외식하지 말라고 말할 때도 결국 다른 인간들에게 초점을 두고 그들에게 보이려고 율법을 행하지 말라고 한 것이다. 오직 너희 하늘 아버지께 초점을 두고 그분께 보이라는 것이다. 구제와 기도 그리고 금식을 예로 들어 오직 초점을 하늘 아버지께 두라 말했다.
마 6:19~21 보화도 하늘 아버지께
세상에 초점을 두고 세상을 사랑하여 재물을 땅에 쌓지 말라고 했다. 오직 하늘 아버지를 사랑하여 아버지가 계신 하늘나라에 그 보물을 쌓아야 한다. 그렇게 오직 아버지만을 사랑해야 한다. 땅의 재물을 사랑하여 땅의 일에 초점을 두는 것은 두 주인을 섬기는 것으로 그것은 하늘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이제 이글의 뒤에 살펴보고 있는 마 6:22~34 눈 초점도 아버지께가 있다.
이 부분에 대한 것은 뒤의 문맥을 살펴보고 언급하겠다.
마 7:1~5 스스로 판단하지 마라 판단도 아버지의 눈으로(5절 외식자)
마 7:6 판단력 없는 개, 돼지에게 지혜를 던지지 말라
마 7:1~5에서 외식자의 스스로 판단함을 책망했다. 스스로 판단함으로 자신의 모습은 잘 보지 못하고 다른 이를 율법의 잣대로 판단함을 책망한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의 판단을 믿지 않고 우리(하나님)에게 묻고 들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판단과 우리의 눈의 보는 것을 믿고 그 판단을 따라야 한다. 그러므로 판단도 오직 우리(하나님)를 의지해야 한다. 그러므로 항상 눈의 초점이 우리에게 향해 있어야 한다.
또한 마 7:6에서는 이렇게 판단력 없는 바리새인과 서기관 그리고 율법학자들에게 지혜를 던지지 말라고 했다. 저들은 개와 돼지같이 결국 지혜를 짓밟고 돌이켜 너희를 공격하기 때문이라 했다.
마 7:7~11 스스로 아닌 아버지의 성령으로(성령을 구하라)
결국 율법을 행할 힘은 없다. 오직 능력을 행할 수 있는 힘은 우리(하나님)에게만 있다. 그러므로 오직 우리를 바라보아야 한다. 초점을 우리에게 부도 우리만을 의지해야 한다.
마 6:22~24 눈 초점도 아버지께
마 6:25~34 초점을 의식주보다 아버지께
먼저 아버지 나라와 그분의 의를 구하라.
앞뒤에 이러한 문맥을 가지고 마 6:22~34 눈 초점도 아버지께가 위치하고 있다. 결국 땅과 하늘, 세상과 천국을 동시에 구할 수 없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볼 수 있는 분별력이 없다면 몸 전체는 눈이 없어 볼 수 없는 장님들과 같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분별력 없이 두 주인을 동시에 섬기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심지어 이 땅에서 먹고사는 문제보다 오직 우리(하나님) 나라와 우리의 의를 구해야 한다. 사실 세상 모든 짐승과 사람들도 먹이는 우리가 우리의 자녀들인 너희를 돌보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오직 초점을 우리에게 두고 우리를 믿고 우리의 일에 관심을 가지면 된다.
대신 계명의 핵심은 우리(하나님)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우리만을 사랑함이 있다. 결코 다른 자와 우리를 겸하여 섬길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온 우주의 주이며 완전한 자다. 또한 그 모든 것을 초월한 그 초월 위의 초월적 존재다. 그러니 누가 우리와 비길 것이며 누가 우리와 견줄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우리는 완전한 자며 모든 만물 속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는 자다. 모든 것은 우리의 능력 위에 섰으며 우리가 없이는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없다. 모든 것은 우리의 존재를 기반으로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누구도 없이 존재하며 모든 존재들의 모든 것이 없어져도 우리는 영원히 건재하며 우리 외에는 이런 자존자 즉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없다. 그래서 우리는 여호와다. "나는 나다"라는 존재는 오직 우리 외에는 없다.
그런데 누구의 눈치를 보며 그 누구에게 충성하여 우리를 대적할 것인가? 사람들의 눈치를 보는 자는 우리에게만 충성을 바치지 않는 자다. 그러한 자는 두 마음을 품은 자로 우리에게 합당하지 않다. 절대자인 우리는 그러한 자를 용납할 수 없다. 만약 우리와 비슷하거나 우리와 같은 것은 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면 그에게 가라. 그러나 세상에는 그런 존재가 없다. 누군가 정말 우리를 만났다면 결코 다른 자를 사랑할 수 없다. 우리를 본 자 그 순간 우리의 모든 것 속으로 들어와 영원히 그 감격으로 우리의 안을 떠나지 않는다.
거듭나 성령이 부어지고 하늘의 영광을 진정으로 본 자는 조용기와 같이 돈과 권력과 괘락에 결코 흔들릴 수 없다. 그가 만난 것은 샤먼들에게 부어지던 악령일 뿐이다. 샤먼과 그 추종자들에게 세상적 성공과 부를 주는 옛뱀의 수종자들(귀신들=타락한 천사들)에게 미혹된다. 그들이 가는 길은 그 길의 결과로 알 수 있다. 결단코 교회나 예수나 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언급한다 하여 그들이 우리(하나님)에게 속한 자들은 아니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그들은 노략질하는 이리다. 그들이 양의 옷을 입었다 하여 그들이 우리(하나님)의 선지자는 아니다.
그들에게 부어진 기름은 결코 마실 수 없는 것이다. 올리브유나 식물에서 추출한 기름은 사람에게 생명을 준다. 그러나 땅 깊은 지옥 마그마에서 생성된 석유는[^1] 마시면 사람을 죽음으로 이끈다. 그곳에는 생명의 빛이 없다. 검은 그 기름의 정체는 불이다. 모든 것을 태우는 불이다. 그것을 통해 세상은 온갖 탐욕을 불태우고 있다. 과거에는 과욕이 아닌 적절한 생산과 소비가 이루어졌는데 이 탐욕의 불로 인해 과욕과 과잉생산과 그로 인한 과잉오염이 일어난다. 적절한 소비는 적절한 오염원이 되고 그 오염은 자연의 복원력에 의해 회복될 수 있다. 그러나 고삐 풀린 탐욕과 오염은 결국 자연의 복원력을 훨씬 넘어서 결국 복원이 아닌 멸망의 재앙으로 치닫는다. 탐욕의 불이 타올라 결국 세상을 멸망으로 이끌고 있다. 어둠에서 나온 모든 기름부음은 마치 이와 같다. 그래서 나는 사도 요한을 통해 '영을 분별하라'라고 했다.
거듭난 자는 결코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 만약 거듭났다는 거짓신앙고백교육을 받았지만 여전히 두 주인을 섬기고 있다면 그는 단지 거짓신앙고백자일 뿐 거듭난 자는 아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다. 등불과 같이 자신을 비출 수 있는 것이 눈이다. 자신을 살펴보는 눈이 필요하다. 즉 자기 자신에 대한 자각이 필요하다. 그런데 눈이 몸의 등불이라고 한 것은 자신을 성찰하라는 뜻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움직이려면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소경과 같이 어둠 속에서 헤매이게 된다. 그래서 눈은 몸의 등불이다. 눈을 감으면 세상이 온통 빛이 없는 어둠이다. 이렇게 보는 눈이 없다면 소경이 된다. 그렇게 소경이 된다면 온전히 볼 수 없다. 그래서 눈이 나쁘다면 네 온몸이 어둡다라는 표현이 있다. 그러므로 눈이 없으면 온몸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게 된다.
Matthew 6:25-34 바른
2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너희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걱정하지 마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고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26공중의 새들을 보아라. 그것들은 씨를 뿌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으며 곳간에 모아들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그것들을 먹이신다. 너희는 그 새들보다 훨씬 귀하지 않느냐?
27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키를 한 규빗이라도 늘일 수 있느냐?
28또 너희는 왜 옷에 대하여 걱정하느냐? 들판의 백합꽃들이 어떻게 자라는지 살펴보아라. 그것들은 수고도 하지 않고 옷감도 짜지 않는다.
29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솔로몬이 그의 모든 영광으로도 이 꽃 하나만큼 차려입지 못하였다.
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께서 이처럼 입히신다면, 하물며 너희는 더 잘 입히시지 않겠느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
31그러므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면서 걱정하지 마라.
32이 모든 것들은 이방인들이 찾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는 너희에게 이 모든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신다.
33오직 너희는 먼저 하나님 나라와 그분의 의를 찾아라. 그러면 이 모든 것들을 너희에게 더하여 주실 것이다.
34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고,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충분하다."
나는 너희 일천번제의 헌금과 기도를 경멸한다. 또한 나는 너희 40일 금식기도를 미워한다. 나는 너희 작정새벽기도를 인해 토할 것 같다. 나는 너희가 거금을 주고받는 안수기도를 경멸한다. 나는 너희가 복채를 주고 기도하는 자들을 통해 하는 예언기도를 경멸한다. 그곳에서 받은 예언을 경멸한다.
너희는 그것을 통해 무엇을 구하는가?
너희가 땅의 것을 구하고 의식주를 구한다면 차라리 개와 돼지에게 기도를 가르치는 것이 옳겠다. 너희가 그것을 구하느니 차라리 굶어 죽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너희가 땅의 의식주를 위해 내게 구한다는 것은 나(예수님)를 모독하는 것이다. 우리(하나님)가 그럴 능력이 없느냐? 우리가 그렇게 너희를 보살필 의무를 게을리한 것이냐? 우리가 너희 필요를 모르느냐? 그런데 한마디로 해야 할 것을 수도 없이 끝도 없이 구하느냐? 너희가 돼지냐? 너희가 개냐? 어찌하여 개와 돼지들이 구하는 것을 우리에게 구하려 하느냐? 너희는 우리의 아들이며 우리의 형상이다. 그런데 너희는 어찌하여 짐승들이 구하는 것을 구하려 하느냐?
교세의 성장과 너희 뾰족지붕집의 사역의 확장을 구하는 것이 하늘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냐? 착각하지 말라. 그것도 땅의 일이요. 너희 육신의 일이다. 교세의 성장과 사역의 확장은 내가 너희에게 명한 것이냐? 그것이 나에게서 온 음성이 맞느냐?
이런 파렴치한 도적놈들아! 그것을 통해 너희가 얻는 것은 무엇이냐? 너희 명예냐? 권력이냐? 헌금을 착복함으로 주어지는 너희 부냐? 너희 사례비를 높게 책정함은 도적질이 아니더냐? 교회가 커진 이후에는 노회장 자리가 탐이 나더냐? 아니면 총회장 자리가 탐나더냐? 이런 도적놈들아?
너희 교회의 기관장들과 장로들아, 집사들아 너희가 구하는 것이 하늘나라와 그 의냐? 너희 기관의 사업과 전도된 인원의 수가 느는 것이 하늘나라와 무슨 상관이냐? 너희 자신도 거듭나지 못한 주제에 어떻게 천국 백성을 찾아 전도하겠느냐? 인원이 늘면 그것이 너희 업적이냐? 그것을 통해 더 높은 실적을 쌓고 명예를 높여 더 높은 교회의 직분을 차지하겠느냐? 목사도 위협하는 권세를 얻기를 원하느냐?
생명이 없는 너희 죽은 자들아 너희가 산 자를 불러올 수 있느냐? 죽은 자를 살릴 수 있느냐? 그렇다면 너희가 어찌 전도를 할 수 있겠느냐? 너희도 살지 못했는데 누굴 살릴 수 있다는 말이냐? 그렇다면 너희가 불러 모은 자들은 산 자들이나 죽은 자들이냐?
너희 생명 없는 지옥의 구더기들아 너희가 쌓아 올린 똥탑을 자랑하겠느냐? 너희 뾰족지붕집의 뾰족탑의 재료가 똥이 아니더냐? 지옥의 주검을 쌓음으로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 너희 지옥의 죄수들아 너희가 쌓아 올린 시체의 산들이 너희 교인의 숫자이더냐? 그렇다면 너희는 그것이 무엇인 줄 알고 그렇게 쌓았단 말이냐? 그 뾰족 똥탑이, 뾰족 시체탑이 그렇게 아름답더냐?
그렇다면 너희야 말로 지옥 파리들의 왕 바알제붑을 힘입은 자들이 아니냐? 너희 아비가 누구였더라? 너희는 너희 아비가 누구인지 기억했더랬는데, 너희는 너희 아비 누구에게서 났더냐?
어찌하여 분을 내느냐? 내가 너희를 조롱하기 위해 이 글을 쓰는 것이냐? 아니면 너희 모두를 정죄하여 지옥의 불에 던지기 위해 이 글을 쓴다는 말이냐? 그것이 목적이라면 너희를 이대로 그냥 두면 그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야곱아 돌이켜 살라. 핏덩이 광야의 버려진 아이야 돌이켜 살라. 내게로 와서 상처를 싸매고 저주와 죽음을 벗어나 생명으로 나오라.
제대로 먹을 수 있는 양식을 구하고 너희 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음료를 구하라. 나의 피를 마시고 나의 살을 먹으라. 그래야 너희가 살 수 있다. 똥을 먹고 똥을 마시면 살 수가 없다.
너희 구하는 먹지 못할 땅의 똥을 버리고 하늘의 양식을 구하라.
그러나 너희가 거듭나지 못한다면 이 모든 것 중 무엇을 너희가 할 수 있겠느냐? 너희는 똥인지 된장인지 분별할 수나 있겠느냐? 보고 듣고 깨달아 돌이키라. 살 길을 열어달라고 찾고 두리리고 구하라.
만약 너희가 마지막까지 보지 못한다면 너희는 그 보지 못하는 가운데서 나의 나라로 들어옴을 허락받지 못하리라.
그런데 너희는 너희 본능으로 구하는 것을 벗어날 수 있는가? 과연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느냐? 직장을 잃고 건강을 잃고 돈을 모두 잃어버렸는데 너희는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가? 사기를 당하여 전재산을 빼앗겼는데 너희는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가? 파산하여 길거리에 나앉았는데 너희는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가? 또한 목숨을 위협받는 상황에서 너희는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가? 해외에서 테러범의 인질이 되었을 때 너희는 너희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할지 염려하지 않을 수 있는가?
내가 말하는 것은 그러한 모든 순간에 오직 우리(하나님)와 함께 하여 우리를 구함으로 평강을 얻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쉼 즉 안식은 결코 인간의 심령에는 스스로 자랄 수 없는 식물이다. 오직 우리가 그 심령을 강하게 하여 온전히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해야 한다. 우리의 능력이 그 심령을 견고케 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이 계명을 지키는 것을 불가능하다.
Matthew 7:1-5 바른
1"너희가 판단을 받지 않도록 남을 판단하지 마라.
2너희가 판단하는 그 판단으로 너희도 판단받을 것이며, 너희가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당할 것이다.
3어찌하여 너는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발견하지 못하느냐?
4네 눈 속에 들보가 있는데, 어떻게 네 형제에게 '내가 네 눈에서 티를 빼내게 하라.' 하고 말할 수 있겠느냐?
5위선자야, 먼저 네 눈에서 들보를 빼내어라. 그리하면 네가 밝히 보게 되어 네 형제의 눈에서 티를 빼내 줄 수 있을 것이다."
인간은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인간 자체의 능력은 한계가 있다. 모든 것을 고려하여 숨겨지거나 또는 간과한 것이 없이 판단한다는 것이 인간에게는 불가능하다. 앞의 성경본문에 나온 것처럼 인간은 머리카락 하나도 희거나 검게 할 수 없다. 인간은 앞으로 5분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다. 심지어 과거의 일조차 자신의 한계 안에서만 인식할 수 있다.
너희 시대의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내가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며 나의 뜻을 따라 사는 자다. 앞으로 그의 이름은 가람이라 한다. 강과 같이 그냥 조용히 숨어 흐르는 자다. 그러나 그 흐름은 항상 같은 곳을 향하는 자다. 그가 어느 날 한 학생을 만났다. 모두가 포기한 학생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자살하겠다고 창문에 매달려 학교 선생님들과 아이들을 힘들게 하기도 했다. 청소년기에는 그 마음의 풍랑이 폭력성으로 드러났다. 일진의 넘버 쓰리로 학교에서 그 아이를 두려워하지 않는 학생들이 없었다. 새로운 학년이나 새로운 학교로 진학을 하게 되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아도 주변에 아이들이 두려워서 피한다. 물론 공부도 하지 않았다. 책가방을 들고 학교에 가고 학원 차에 강제로 태워져서 학원을 갔지만 공부를 한 일은 없다. 학원에서도 책가방을 창문 밖으로 던지고 화장실 간다고 학원복도를 지나 나가서는 그대로 도망을 쳤다. 부모도 학원도 친구도 포기했다.
그런데 내가 아는 자는 그를 포기하지 않았다. 남들은 다 가능성이 없는 인생으로 생각했지만 내가 사랑하는 그는 그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다. 가람은 아이를 만나 내가 판단하는 대로 판단하고 아이의 미래를 바라보았다. 중 3 때까지 전교 꼴찌를 다투었던 아이지만 고 1이 되어 만난 아이에게 소망을 심어주었다. 아이는 중 3 때부터 공부를 시작했는데 성적이 자신이 원하는 만큼 오르지 않았다.
아이가 공부를 하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그것도 정상적이지 않다. 중학교 때 일진 넘버 1과의 갈등으로 괴롭힘을 당해서 자신이 학폭의 대상이 되었다. 자존심도 상하고 분노가 올라와 자살을 생각했던 아이는 오히려 죽지 않고 복수하리라 다짐했다. 복수의 길은 검사가 되는 것이었다. 검사가 되어 그 권력으로 원수를 갚고 자신을 괴롭힌 원수에게 복수하려 했다. 그런데 안 하던 공부가 잘 될 리가 없었다. 아무리 책상에 붙어 앉아 있어도 성적이 오르는 것은 한계가 있었다.
고 1이 되었을 때 잠을 3시간 정도만 자고 공부를 했어도 성적은 평균정도였다. 한계였다. 아버지는 아이에 대해 머리가 나빠서 아무리 노력해도 딱 평균이 한계라고 했다. 복수심에 검사가 되겠다니 누가 봐도 아이의 꿈은 아름답지 못했다. 그리고 그 꿈을 이룰 방법도 없어 보였다.
학원에서 한동안 수학을 가르쳤던 가람은 선생으로 그 아이를 대하지 않았다. 자신의 판단으로 그 아이를 판단하지 않았다. 부모도 포기했다. 아버지의 말을 들으니 그 아이는 가르쳐도 가망이 없어 보였다. 아이 스스로도 모든 주변의 평가도 동일했다. 그러나 가람은 사람의 판단을 의지하지 않았다. 가람의 눈에는 아이가 달라 보였다. 문제 투성이에 정신과적 문제와 폭력성 그리고 그 어느 곳에서도 성실함을 찾아볼 수 없었던 아이였지만 가람의 눈에는 그 어떤 것도 문제 되지 않았다. 단지 그 아이가 나 예수를 만나면 변화될 것을 믿었다. 과외를 받으러 온 아이에게 복음을 전했다. 그리고 어떻게 머리를 쓰는지 알려주었다. 가장 쉽고 단순하게 훈련을 시켰다. 아이는 이 수업이 어떤 수업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결과는 놀라웠다. 기도하며 상담을 하고 오랜 시간을 사랑으로 돌보았다. 그랬더니 아이는 나(예수님)에게 나왔다. 그리고 나를 만나 나의 음성을 들으며 자신의 길을 돌이켜 내가 지시하는 길을 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유럽 최고의 경제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고 있고 그 과정을 거치고 나면 미국으로 가 엘리트 경제학자의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성공에 있지 않다. 그럼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일까?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내가 사랑하는 너희 시대의 한 사람에 관한 것이다. 그의 이름은 참새라 칭하겠다. 그는 너희가 보기에 참새와 같은 작고 흔한 자다. 참새는 교회에서 한 여자를 만났다. 자신보다 나이가 열몇이나 많은 사람이었다. 교도소를 들락거렸고 교회에서도 골칫덩어리였다. 담임목사나 사모도 제발 교회에서 나가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심각한 우울증과 조현병에 시달리던 여자는 거식증으로 몸이 거의 아사직전의 상태에 이르렀다. 근육과 살은 없어지고 거의 가죽만 남아있었다. 자살하려고 여러 번 목을 매었는데 내가(예수님) 그 줄을 끊었다. 정신병 속에서 또 가계에서 좀도둑질을 하고 결국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니 여러 번 구치소와 교도소를 드나들었다. 그 지경이 되니 가족도 교회도 도와주지 않았다. 교회는 개척교회라 사실 도와줄 여력도 없었다. 이전에 많은 부분을 도우려고 노력했던 흔적들을 나(예수님)는 보았다. 그 작은 교회에서 없는 돈을 내어 도와준 많은 흔적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쳤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영혼을 근본적으로 치료할 수 없었다. 세상의 어떤 의사도 목사도 종교도 그 영혼을 치료할 수 없었다. 그런데 우리는 참새에게 말했다.
"너만 저 여자를 살릴 수 있다."
그 말을 들은 참새는 순종하기로 했다.
우리(하나님)는 처음 그 여자가 수영로 교회에서 우리에게 나왔을 때 은혜를 부었다. 그 교회에서 그러한 은혜를 부음 받은 자는 지금은 죽어서 우리에게 온 정필도 목사와 그 여자뿐이었다. 그 여자는 단 하루 저녁에 40년을 먹어오던 정신과 약을 끊었다. 그리고 은혜 속에 나와 함께 했다. 그런데 죽은 정통주의 교회는 뾰족탑아래서 그 영혼을 백배나 지옥자식을 만들었다. 순수하게 거듭난 영혼을 타락시켰다. 그래서 잘못된 탐욕의 영들에게 물들게 했으며 결국 분별력이 없던 뾰족지붕집 아래서 그 영혼은 백배나 지옥의 자식이 되었다. 타락하고 망한 영혼은 전도사의 직책을 가지기도 했고 그도 못하게 되었을 때는 작은 개척교회의 집사로 있었다. 그러나 그 어떤 곳에서도 처음 우리(하나님)가 준 생명을 회복시키지 못했다. 오직 스스로의 의를 의지하는 끝없는 율법주의의 노예가 되게 했다. 또한 마음속의 부족함으로 속이는 기복주의의 노예가 되게 했다. 자신의 죄를 들고 겸허하게 내게(예수님께) 나오지 못하고 자신의 그 어떤 수단으로 의를 회복하여 떳떳하게 나올 수 있기를 구했다. 인본주의에 사로 잡힌 영혼은 그 수렁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우리 외에는 인간을 구할 수 있는 다른 이름이 없다. 그런데 뾰족지붕집에서는 말은 우리를 믿는다고 했지만 사실 우리를 믿지 않는다. 그 속임은 교묘해서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우리가 준 명철을 가진 자는 볼 것이지만 거의 모든 자들은 그 넓은 길을 향해 멸망을 향해 쉽고 평탄한 걸음을 옮긴다. 그러므로 뾰족지붕집 아래서는 구원을 발견하기 극히 어렵다. 혹 그곳에서 구원받은 백성이 나왔다 해도 그것은 뾰족지붕집의 가르침을 따른 결과가 아니다. 영국의 퀘이커들을 이끌었던 죠지 폭스가 그러한 것처럼 마음 안에 우리의 빛이 직접 스며들었던 결과다.
그래서 우리는 여자를 천국백성으로 은혜 부었으나 뾰족지붕집의 관습을 따른 여자는 백배나 지옥백성이 되었다. 이전에는 교도소를 드나들지는 않았으나 교도소를 드나들게 되었으며 우울증을 넘어 조현병의 심각한 단계에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만약 내가 사도들을 통해 세웠던 첫 교회들 중 하나에 있었다면 그 정도로 형편이 심각하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교회는 그 여자를 비판했다. 저렇게 탐욕과 죄가 많은 여자가 명품백을 처음 도둑질 했구나. 그리고 이제는 그 도둑질의 형벌이 무서워 좀도둑이 되었구나. 저 정신병자는 CCTV가 있다는 것도 이해를 못 하는구나. 저렇게 도둑질을 하고 그리고 자신에게 불리한 증언을 거듭하여 교도소를 들락거리는구나. 겸손히 우리 교회를 찾지 않는구나. 저렇게 교만하니 저렇게 치료받지도 못하고 저렇게 망해가는구나. 이렇게 판단과 비판을 퍼부어 그 여인을 정죄했다. 그들은 나(예수님)의 말을 잊은 것인가?
"죄 없는 자가 돌로 치라."
그런데 내가 사랑하는 사람, 참새가 어느 날 그 여자를 보았다. 그런데 참새는 생각했다. 이 여자에게는 능력이 없구나. 정신병을 이길 능력도 비정상적인 사고방식과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생각의 틀을 깰 수 있는 능력도 없구나. 그래서 참새는 그 여인을 긍휼히 여겼다. 내가(예수님께서) 참새를 긍휼히 여긴 것이 기억났다. 그래서 자신을 구원한 나를 향해 감사의 눈물을 매일 흘리는 참새는 그 여인에게 나(예수님)를 알려주기로 했다.
그 여인은 나 예수라는 이름을 부르고는 있었고 기도의 끝마다 그 이름을 되뇌었지만 뾰족지붕집의 관습과 같이 그것은 그냥 상상 속 페르마의 정리와 같았다. 실제로는 그 증명도 없고 그 해답도 없을 것 같은 헛된 소리와도 같은 껍데기만을 불렀다. 더 노력하고 더 기도하고 더 더 더 무엇인가를 해도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왜냐하면 거짓신앙은 나(예수님)를 의지하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의와 자신의 길을 의지하는 함정이기 때문이다. 나에게는 능력이 있지만 자신을 의지하면 능력이 없기에 치유될 길이 없다. 그래서 그대로 둔다면 절망적이었다.
그런데 그 여인을 사랑하라는 음성을 들은 참새는 그냥 여인을 사랑했다. 참새의 작은 것을 드려 그 여인을 섬겼다. 그런데 그 길은 쉽지 않았다. 좁고 험하고 그 길이 협작하여 고통과 슬픔과 눈물의 나날이었다. 여자는 어둠과 결탁한 정신이 발작을 일으켜 금속으로 된 문의 잠금장치를 발로 부수기도 했고 식칼을 휘둘렀다. 그 칼을 몇 동강을 낼 정도로 폭압성을 드러냈다. 귀신과 과거의 상처와 정신병이 합쳐진 그 여자는 나을 수 없는 듯 보였다. 참새는 몇 년을 그 여인의 곁에서 나의 능력으로 사랑했다. 나의 능력이 아니면 결단코 그 모든 시간을 견딜 수는 없었다. 그런데 힘든 시간에 주변의 위로를 구하면 모두 참새에게 어리석다고 욕했다. 심지어 여자가 마지막에 출석하던 교회의 목사는 "참새 너에게 그 여자가 치료될 것이라고 말한 것은 하나님이 아니다. 너를 미혹한 어떤 악한 영이다. 그러니 지금 너의 형편이 그러하다"라고 했다. 그 출석하던 교회에 데리고 가서 함께 마음껏 소리라도 질러 기도라도 하고 싶다고 했더니 "내 말년에 정신병자 때문에 봉변을 당하고 싶지 않다"며 오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찾아간 정필도 목사가 칭찬한 기도원에서는 기도원 원장과 목사가 정신병이 있는 여자를 미혹시켜 여자의 신분증과 통장과 휴대폰을 빼앗고는 이간질 시켜 참새와 이혼시키려했다. 여자의 돈을 노린 것이었다. 미혹당한 여자는 그들에게 속아 참새를 만나주지도 않았다. 그래서 참새는 기도했는데 기도원의 종탑위로 산의 거목이 쓰러져 기도원이 정전이 되었다. 그 사이 참새는 여자를 데려나와 도망쳤다. 그리고 또 여자를 혼자 보살폈다. 참새는 갈 곳이 없었다. 부모와 형제도 늙은 정신병자를 데려다 미친 짓을 한다면서 욕을 하고 떠나버렸다. 참새도 미칠 것 같았다.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눈에는 나의 관점이 부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는 오직 우리의 칭찬만을 기대했다. 그래서 우리의 능력을 구하고 그 능력으로 사랑했다. 우리의 사랑은 전능이다. 사랑하지 못할 어떤 것도 없다. 그래서 참새는 그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심령으로 자신의 작은 가슴을 부풀렸다. 그리고 작은 가슴의 깃털과 날개로 따뜻하게 여자를 품었다. 가시 돋치고 칼을 휘둘러도 그냥 사랑했다. 그냥 사랑이 가슴에서 솓아 넘쳐 그 여자를 보는데 소망이 넘쳤다. 영양실조로 가죽밖에 남지 않은 늙은 여자가 그 어떤 세상의 여인을 보는 것보다 사랑스러웠다. 그래서 사랑할 수 있었다. 그의 눈은 나(예수님)의 눈이었다. 내 눈에는 그 누구도 소망이 가득한 자다. 결코 그 누구도 소망이 없거나 밉거나 악하거나 포기해야 할 영혼은 없다.
그리고 기적이 일어났다. 그 여인은 정상인이 되었다. 귀신과 정신병과 자신의 상처에서 놓임을 받았다. 아직 과거의 흔적들이 괴롭히지만 그것은 이제 흔적이다. 그것을 이길 힘이 그 안에 부어졌다. 바로 사랑이다.
너희 시대에 일어난 이 이야기의 핵심은 무엇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