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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3.2.3.10. 기업을 취한 아들 여호수아16

산상수훈과 천국(가나안) 입성

by 에스겔

01.3.2.3.10.9.5.5.13.2. 눈의 중요성


보는 관점이 중요하다. 누구의 관점으로 보고 누구의 시선으로 보는가가 중요하다. 너희 관점은 너희 아비, 마귀의 관점이다. 결코 사랑의 관점이 아니다. 나 예수의 관점으로 보지 않는 자는 모두 비판하는 자다. 왜냐하면 사랑이 아니면 모두 비판으로 나가게 되어있다. 사랑하면 그 어떤 것도 사랑스럽게 보인다. 그런데 사랑이 식으면 모든 것이 미워 보인다. 그래서 사랑의 열병으로 함께 하던 연인과 부부가 그 열병의 온도가 내려가면 헤어지게 된다.

내 관점으로 보려면 우리(하나님)의 영이 가득해야 한다. 우리와 함께 하여 성령이 그 속에 함께 함으로 완전히 우리의 마음과 함께 해야 한다. 우리와 함께 하고 우리와 대화하고 우리의 사랑에 감복하면 그 마음은 우리로 가득 찬다. 그러면 그 눈은 사랑의 눈이 된다. 그 귀는 사랑의 귀가 된다. 모든 감각은 사랑의 감각이 된다.


지금 형제를 판단하는 것에 대해 말하고 있는데 앞의 구조분석에서 이것이 대신 계명 속에 포함되어 있다. 이것은 형제를 스스로의 관점으로 비판하지 말라는 것인데 이것이 왜 우리(하나님)를 섬기는 계명에 포함된 것인가? 이는 판단을 할 때에도 자기 홀로 판단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 함이 우리를 섬기는 예이기 때문이다. 판단도 스스로 하지 않고 우리를 전적으로 의지해야 한다. 이렇게 우리의 판단으로 우리와 동행하는 자가 우리의 진리의 눈으로 사랑을 행하게 된다. 진리는 결코 무서운 칼날이 아니다. 진리는 사랑이다. 진리는 비판하지 않는다. 진리는 사랑한다. 진리는 결코 정죄하지 않는다. 진리는 사랑한다. 모든 것을 보고 악의 모든 근원과 모든 거짓을 파헤치지만 진리는 결국 그 모든 것을 품고 사랑하고 용서한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드려 그 악에서 형제를 건져낸다. 자기의 생명을 형제를 위해 버린다. 형제의 악의 짐을 대신지고 십자가를 진다. 그리고 자신의 생명을 형제를 대신하여 내놓아 형제를 살린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것은 인생이 우리(하나님)와 함께 함으로 가능하다. 그 외에는 인간에게는 어떤 가능성도 없다. 오직 우리만이 인간의 어둠에서 인간을 구하여 빛가운데 거하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를 사랑하여 우리와 언제나 함께 해야 한다. 심지어 모든 사고와 판단의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하여 우리에게 물어야 한다. 그래야 자의적 비판에 빠지 않는다. 그래야 우리의 사랑을 가득 머금고 하늘의 긍휼로 형제를 보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관점이 아니라 우리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우리를 경외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관점과 우리의 음성을 존중하는 것이 우리를 존중하고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래서 비판하지 말라는 계명이 우리를 섬기는 계명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우리를 경외하여 모든 판단에 까지 우리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마귀의 관점으로 비판하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를 섬기는 자만이 사랑할 수 있다. 우리를 섬기는 자가 아니면 어둠에 속하고 어둠에 속한 자는 사랑이 없으며 형제를 미워하여 비판한다. 그러므로 비판하는 자는 어둠을 섬기는 자요. 마귀에게 속한 자다. 내가 너희를 대신하여 죽기 위하여 육신을 입은 것은 완전한 사랑이다. 그것을 부정하는 어떤 이유가 있더라고 그것은 적그리도의 영이다. 그러니 너희는 우리를 의지하고 오직 우리를 신뢰하여 우리의 관점으로 사랑하라. 그래야 너희는 우리에게 복종하는 우리나라의 백성이다.


01.3.2.3.10.9.5.5.13.3. 개, 돼지와 사람의 간극


Matthew 7:6 바른
6"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그것을 발로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지 못하게 하라."

말을 알아듣는 인간에게 말해야 한다. 개나 돼지에게 말해 보아야 알아듣지 못한다. 개와 돼지와 인간의 차이가 무엇인지 알겠는가? 바로 말을 알아듣는 것이다. 그런데 말을 못 알아들으면 개와 돼지와 같이 자기 본능대로 함부로 행동한다.

우리와 함께 하여 우리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개, 돼지와 같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의 관점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오직 판단은 우리와 함께 하여 우리의 말을 듣고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아야 할 수 있다. 그 판단은 사랑이다. 오직 사랑이다. 그것이 아닌 모든 것은 비판이며 짐승적 본능이다. 오직 도적질 하는 자의 이기적 비웃음이다.

그래서 우리의 빛 가운데서 우리가 비추는 대로 보지 않는 자들은 모두 짐승이다. 짐승과 같이 지각이 없으며 그 본능대로 형제를 짓밟고 돌이켜 물어뜯는다.

성경을 통하여 비추어 볼 수 있으나 그것은 과거의 거울에 비춤이다. 마치 홍길동전을 보고 홍길동의 뜻대로 산다는 것과 같다. 그런데 책을 보고 자기 마음대로 판단하여 행한 것이 과연 홍길도의 뜻이겠는가? 심지어 모세 오경의 집필을 옆에서 지켜보았던 여호수아도 모세오경이 있음에도 가나안을 정복할 때에 실시간으로 우리에게 나아와 만남의 텐트(회막)에서 우리의 뜻을 들었다. 그렇게 실시간으로 우리의 뜻을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우리의 의도와 뜻을 아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들은 음성이 온전히 우리의 것인지 분별하는데 쓰이는 과거의 기록으로 된 시금석이다. 바로 과거의 거울이다. 성경은 그러한 역할이다. 결코 현재적 우리의 뜻은 될 수 없다. 만약 우리가 죽었다면 우리의 뜻을 듣지 않고 글로 기록된 것을 붙들고 그것으로 뜻을 짐작하여 추정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명확하게 계명으로 기록된 것도 사실 정확한 현재적 우리의 뜻은 아니다. 심지어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도 모든 세부사항을 글로 기록할 수 없으므로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 배고픈 자를 굶기고 또 배가 고파 들판의 이삭을 먹은 자를 정죄했다. 또한 안식일에 병을 고친 하나님인 나 예수조차 정죄했다. 그러므로 과거의 거울을 들고 있다 하여 그들이 개와 돼지가 아닌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현재 너희가 몰라서 어리석은 일들을 하고 있음을 나 예수는 안다. 성경만을 읽고 나의 뜻대로 행한다고 하는 대부분의 교회는 개요, 행악자와 같이 되었다. 자신들도 알지 못한다. 또한 신내림을 받은 무당과 같은 직통계시를 주장하는 자들도 그 행위가 경에 기록된 완전한 하늘의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그들은 성령이 아닌 다른 영에 의해 조종될 가능성이 높다. 그러므로 음성을 듣지 않는 자들도 나의 양이 아니다. 또한 음성을 온전히 분별치 않는 자들도 나의 양이 아니다. 또한 나의 음성대로 행하지 않는 자들도 나의 양이 아니다. 그러므로 내게 와 배우라. 나의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볍다. 나는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후히 주는 자다.


그러므로 지혜를 배우라. 결코 사람의 형상 즉 양의 옷을 입었다 하여 믿지 말라. 오직 말을 알아들을 수 있는 거듭난 자에게 진리를 말하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를 대적하여 핍박할 것이다

01.3.2.3.10.9.5.5.13.4. 불가능의 계명


그런데 과연 누가 우리의 눈으로 형제를 볼 수 있을 것인가? 이 악한 세상을 만든 악한 인간들을 보면 어떻게 그들을 사랑의 눈으로 볼 수 있는가? 그 속의 악을 보라. 자신의 아이조차 마귀의 관점으로 비판하는 저 악마의 새끼들을 어찌 사랑할 것인가? 너 또한 악마의 새끼이니 과연 네 안에 사랑이 피어날 수 있겠는가? 과연 너희는 사랑은 할 수 있는가? 너희 사랑은 무엇인가? 너희 집착을 근거로 한 것이 아닌가? 너희가 아름다움에 집착하면 그 아름다운 상대를 원함이 사랑인가? 그 추구는 사랑인가? 아니면 너희 탐욕을 채우는 이기적 약탈인가? 그러므로 너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은 사랑이 아니다. 오직 우리의 눈으로 우리의 심령으로 느끼는 것을 그대로 느껴 그것의 싱크로율이 100%가 되어야 사랑이다.

그러므로 우리 없이 우리의 사랑의 관점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너는 우리를 선택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우리만을 사랑할 준비가 되었는가? 그러한 자가 아니면 우리와 함께 할 수 없다. 우리와 함께 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관점을 가질 수는 없다. 자기 집과 부모와 형제와 자식을 버리고 모든 소유를 버리고 자기 목숨까지 버리는 자만이 나를 사랑하는 자다. 너희는 나 예수가 그러한 가치가 있는 것을 알고 나만을 원하기 전에는 결코 나와 함께 할 수 없다. 결코 나를 온전히 사랑하지 않는 자에게 우리는 우리를 나타내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예수님)를 나타내 나와 함께 하는 자가 아니면 육신적 관점으로 우리(하나님)의 일을 판단한다. 그러니 너희는 어찌해야 할 것인가?

너희 스스로는 불가능한 이것을 너희는 통과하여 천국에 들어올 수 있겠는가?

답은 이미 앞에 있지 않았는가? 그러면 너는 말세에 믿음을 보이라. 구하라, 두드리라, 찾으라.



01.3.2.3.10.9.5.5.14. 자기 능력과 하늘 능력의 간극


Matthew 7:7-11 바른

7"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고,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발견할 것이며,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8구하는 이마다 받고, 찾는 이는 발견하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9너희 중에 자기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주고,

10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자가 어디 있겠느냐?

11너희가 악하더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들을 줄 줄 안다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분을 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 들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Luke 11:9-13 바른

9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고, 찾아라, 그러면 너희가 발견할 것이며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구하는 이마다 받고, 찾는 이는 발견하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11너희 중에 누가 아버지로서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고,

12또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들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분을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01.3.2.3.10.9.5.5.14.1. 마태와 누가의 눈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나의 말을 기록한 기록을 비교하여 보라. 각자 자신의 어투와 자신의 사고방식을 따라 내가 한 말을 기억하여 기록했다.

다른 부분은 일치하는데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물론 나의 말들 중 서로 기호에 따른 취사선택이 있었을 뿐이다. 마태는 마 7:9의 '너희 중에 자기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주고'라는 부분을 누가와는 다르게 취사 선택했다. 누가는 마태가 기록하지 않은 눅 11:12의 또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를 추가하여 기록했다.

또한 마지막 문구인 마 7:11에 마태는 좋은 것이라는 말을 기록했다.

Matthew 7:11 바른

너희가 악하더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들을 줄 줄 안다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분을 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들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그런데 누가는 같은 자리에 성령이라는 말을 기록했다.

Luke 11:13 바른

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들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분을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왜 둘은 다르게 기록을 했을까? 혹시 기억의 왜곡이 있었을까? 그렇지 않다. 성령이 함께 하여 기억나게 하고 기록하게 하였으니 그럴 수 없다. 사실 둘이 각자 기록한 것도 당시에 내가 한 말들이었다. 그러나 각자의 성향에 따라 기억한 말과 기록된 것이 달랐다. 단지 내 말의 일부를 취사선택하여 기록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의 모든 행함과 말들을 다 기록하려면 이 세상이라도 부족할 것이다. 그러므로 저자의 의도에 따라 취사선택하여 기록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01.3.2.3.10.9.5.5.14.2. 다른 눈의 의도


그렇다면 취사선택의 의도는 무엇일까? 마태의 의도는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은혜들을 강조함이었다. 누가의 의도는 은혜들을 선물로 주는 성령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므로 둘의 말은 동일한데 그 강조점이 차이가 있다. 또한 이를 통해 마태가 말한 좋은 것은 당연한 것이기는 하지만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은혜들이다.


01.3.2.3.10.9.5.5.14.3. 성령[^1]


그러므로 정말 구하여야 할 것은 성령이다. 그래서 내가(예수님께서) 부활하여 승천할 때에 제자들에게 성령을 구하라고 했다. 성령을 기다리고 성령이 주는 능력으로 나의 증인이 되라고 했다. 나와 3년을 동행했던 제자들은 나를 보고 나를 만졌으며 나의 말들을 들었다. 나의 모든 행함들을 보았다. 그런데 그들이 나의 증인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러나 그들에게 성령이 없다면 그들은 나의 증인이 될 수 없다. 성령이 그들과 함께 함으로 그들을 깨닫게 하고 그들 속에 우리(하나님)의 마음을 붓는다. 성령이 충만한 능력을 붓지 않으면 우리의 증인은 될 수 없다.

01.3.2.3.10.9.5.5.14.3.1. 거짓의 영과 성령의 간극


성령이 충만한 것은 우리로 충만한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우리의 성품으로 충만한 것이다. 사실 그것이 진정한 능력이다. 죄를 이기지 못한다면 아무리 대단한 성령의 다른 능력을 얻어 기적을 행한다고 해도 그것은 오히려 파괴적인 도구가 될 뿐이다. 사람들을 기적으로 꾀어 사로잡아 자신의 이기적인 목적을 따르게 하는 미끼가 은사가 되기도 한다. 은사를 행하는 자가 사랑하지 않는 자라면 사실 그 은사까지도 근원을 의심하여야 한다. 요한의 말과 같이 영을 분별하여야 한다. 영을 다 믿지 말고 성령인지 다른 영인지 구분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그 사람의 열매를 보고 그를 분별하고 그 사람 안에 임한 영을 분별하여야 한다. 거짓선지자를 조심하라고 한 이유를 알겠는가? 거짓선지자를 조심하라고 말하기 전 내가 무엇을 말하였는지 알겠는가? 바로 지금 말하고 있는 성령을 구하라는 말이다. 왜 이 말의 바로 뒤에 거짓선지자들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겠는가? 바로 거짓영이 임한 거짓선지자들이 세상에 가득하고 그들이 다수이며 그들이 넓고 평탄하고 쉬운 길을 제시하여 많은 다수의 사람들이 그곳으로 가기 때문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듯 기록된 대부분의 교회사에 등장하는 자들은 중세교회가 그러했듯 대부분 거짓영을 받은 거짓선지자들이다. 그들은 거짓신앙고백을 교리문답을 통해 하게 한다. 진실로 진리를 믿는 자를 교회에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학습을 하여 그것을 입으로 답하기만 하면 교인이 되는 넓은 길을 제시한다. 이러한 전통은 개신교회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전통들은 현대의 선교단체들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그래서 입으로 신앙을 고백하고 영접한다고 말하기만 하면 교인이 되는 것으로 간주한다. 값싼 거짓복음을 전파하여 사람들에게 넓은 길을 제시한다. 물론 그들이 그 거짓복음의 의도를 알고 그 일을 행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은 거짓복음 속에서 거짓교회에 들어와 그곳에서 익숙한 그것을 그대로 행하고 있다. 그들이 몰랐다 하여 그들의 길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내가 왜 산상수훈에서 거짓선지자들의 길이 넓고 평탄하다고 했는지 너희는 알겠는가? 분명 나는 나의 이름을 부르지 않는 이방인들에 관련하여 넓은 문과 넓은 길과 평탄한 길을 말한 것이 아니다. 분명 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임을 언급하였다. 그들이 단순히 너희가 알고 있는 이단이라 생각하였는가? 그런데 생각하여 보라, 너희들이 알고 있는 모든 이단들을 합하여도 그들이 너희가 정상적인 교회라고 알고 있는 것의 숫자를 넘어 비교불가할 정도로 압도적로 그 수가 많은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다면 넓은 문으로 들어가는 자들은 분명 이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그들이 좁은 길을 가는 자들에 비해 너무도 많음을 말하였다. 사실 너희 중 지혜 있는 자들은 이미 넓은 길로 가는 자들이 대부분의 교회를 다니는 자들임을 알고 그 글을 읽고 있다. 교회 속에서 오직 아주 소수만이 좁은 길로 들어가 생명이 이름을 너희는 알고 그 본문을 읽고 있다. 그렇다면 세상에 편만하게 있는 교회라는 이름을 가진 뾰족지붕집들은 나의 교회가 아니라는 말인가? 너희 주변의 모든 교회는 이단적인 교회라는 말인가? 아니다. 그들은 교리적으로 이단이 아니다. 그런데 형태와 교리는 같지만 그 형태와 교리를 통해 그들이 말하는 실체는 전혀 다르다. 그들이 예배함으로 우리(하나님)를 만난다는 것은 정말 우리(하나님)를 만나는 것이다. 그들은 단지 우리가 있다고 생각하여 상상하며 예배를 드린다. 상상임신이 임신이 아니듯 상상의 만남은 만남이 아니다. 물론 처음 우리를 믿는다는 것도 믿는 것이 아니다. 믿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또한 우리를 영접한다는 것도 우리를 만나 기쁨으로 우리를 환영하여 받아들인다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렇게 하기를 원하거나 아니면 그것을 상상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물론 그 과정 중에 참으로 우리를 만나거나 우리의 기적을 체험하는 자들도 있다. 그런데 거짓선지자들이 이끄는 그곳에서 그들은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우리나라 즉 천국(가나안)에 들어오기 전에 그들은 광야에서 죽는다. 그들은 우리의 참된 통치 안에 들어오지 못하고 결국 죽는다. 그 증거가 이것이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누가 어떻게 완벽하게 성경대로 살 수 있어? 그래서 예수님의 보혈을 통한 용서가 필요한 거야. 우리 모두 죄인이니 어쩔 수 없어 누가 어떻게 죄의 유혹을 이긴다고 할 수 있겠어? 교회에서도 어쩔 수 없는 거야. 사람 사는 곳이니 사람의 욕심이 있는 거야. 누구나 그것을 벗어날 수는 없어. 목사님도 헌금을 많이 하고 권력이 있고 힘이 있어 교회에 기여하는 자들을 더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거야. 교회도 세상 사는 이치는 그대로 적용되는 거야. 바로 이 말이 그들이 교회가 아닌 세상에 속한 자들임을 증명한다. 사람이 어떻게 우리(하나님)의 말을 모두 지킬 수 있냐?는 그들의 질문이 그들은 우리의 통치에 복종하는 자들이 아님을 증명한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심지어 자신은 우리를 믿는다고 말하면서도 죄를 이기지 못하는 이유가 이곳에 있다. 거짓신앙은 모양은 참복음처럼 보이지만 그 자체는 거짓이므로 참복음의 능력은 없다.

이것이 죽은 정통주의의 실체다. 여러 번 너희가 이해하기 쉽도록 예를 들 수 있는 것이 바로 중세교회다. 유럽과 그들에게 기독교를 전파받은 다른 세계들에 있던 수많은 교회들은 사실 교회가 아니었다. 너희는 역사를 통하여 그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아는가? 죽은 정통주의는 화석화된 신앙을 가지는데 그것이 꼭 과거의 카톨릭만 그러한 것이 아니다. 언제나 부흥이 오고 나서 시간이 지나면 그 조직만이 남고 생명이 떠난다. 그러면 생명 없는 남은 그것은 교회인가? 아니면 교회의 화석인가? 생명이 없다면 죽어 화석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땅에 있는 교회라는 조직은 언제나 화석화가 되는 수순을 반복하여 걷는다.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이 땅에 임한 생명은 한 조직에 지속하여 머물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한 조직이 화석화되면 그중 일부나 또는 그 조직의 밖에 또 다른 생명을 붓는다. 그래서 이를 부흥(Revival)이라 한다. 문자 그대로 다시 살리는 것이다. 다시 살린다는 것은 죽었었다는 것이다. 즉 죽어 화석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마틴 로이드 존즈는 죽은 정통주의라 하였다.

그러니 성령을 구한다는 것은 좋은 것 즉 선한 것을 구하는 것이고 그 선한 것들은 모두 우리의 거룩과 사랑으로 가득 채워진 우리 자체를 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능력인 성령의 듀나미스로 오직 완전한 우리와 같이 완전하게 된 그곳이 교회가 된다.

그러므로 자기 능력과 하늘 능력의 간극을 분별하여 하늘의 능력을 구하고 찾고 하늘의 문을 두드리라.

01.3.2.3.10.9.5.5.14.3.2. 제3위의 호칭: 성령


사람의 속에 그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있어 그것이 바로 영혼이듯 성령을 거룩한 영이라 표현한 것은 사람의 마음과 생각과 같이 또한 그 속에 임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라 성령이라 한 것이다. 사람과의 관계에서 성부가 아버지이며 성자인 나는 그들과 동일한 인간 아들이다. 이 모든 것은 인간과의 관계 안에서 정의된 호칭인 것이다. 성령도 마찬가지다. 성령이 호칭이 아니라고 하는 자들이 있는데 사실 성령은 호칭이다. 성령의 본질적 이름은 없다. 비교 불가한 유일한 자는 이름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성령은 인간들과의 관계에서 영적 존재로서 사람의 영혼에 임하는 역할을 함으로 성령인 것이다. 그것도 역할에 부여된 호칭이다. 선생의 역할을 하는 자에게 선생이란 호칭이 부여되듯 사람의 영혼 속에 역할하는 존재로 드러나므로 그 역할에 맞게 성령(거룩한 영혼)이라 한 것이다. 혹시 거룩한 영혼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느끼고 거룩한 영이 맞다고 느끼는 자가 있다면 그는 헬라적 이원론에 뼈가 사무치도록 중독된 신학의 노예다. 이에 대한 설명은 이 책의 앞부분을 살피면 충분한 답을 얻을 수 있다. 우리의 존재 자체가 영(靈)인데 왜 삼위 중 성령(聖靈)만 영(靈)이라 칭하는 것일까? 그것은 인간들에게 나타나는 모습 자체가 영으로 나타나기 때문이다. 나 예수가 인간 이름을 가진 것은 인간들에게 인간의 육체를 입고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는 양태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 호칭이 부여된 연유를 말하고자 함이다. 성령은 인간의 속에 임하여 인간의 마음과 교통 하며 인간의 마음속에 선함을 부여하여 그것이 충만하도록 한다. 이는 단순히 풍선에 바람을 넣는 형태가 아니라 인격적 교제와 인격적 동의로 말미암아 행해지는 동행에 의해 가능한 충만이다. 성령의 역할은 즉 그 호칭이 부여된 근원이 된 역할은 영이다. 바로 사람의 영혼에 임하여 함께 하는 것이다. 내가 육체로 임한 것과 성령이 영으로 임하는 것은 그 역할에 기인한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능력을 의지하는 자들은 산상수훈 중 본문의 앞에 언급한 계명들을 결코 이룰 수 없다. 오직 하늘 아버지의 능력을 구하고 그 능력으로 사는 자만이 계명을 성취할 수 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해야만 너희가 능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의 끝까지 이르러 증인이 될 수 있다.



01.3.2.3.10.9.5.5.14.4. 불가능의 계명


Luke 11:5-13 바른

5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 어떤 이에게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가 한밤중에 그 친구에게 가서 말하기를 '친구여, 빵 세 덩어리만 꾸어주게.

6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내게 왔는데, 그 앞에 내놓을 것이 없네.' 하면

7그가 안에서 대답하기를 '나를 귀찮게 하지 말게. 문이 이미 닫혔고 내 아이들과 내가 잠자리에 들었으니, 일어나서 자네에게 줄 수 없네.'라고 말하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비록 그가 친구라는 이유만으로는 일어나서 주지 않더라도, 그가 끈질기게 간청하면 일어나서 그에게 필요한 만큼 줄 것이다.

9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어질 것이고, 찾아라, 그러면 너희가 발견할 것이며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10구하는 이마다 받고, 찾는 이는 발견하고, 문을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다.

11너희 중에 누가 아버지로서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고,

12또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너희가 악할지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들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그분을 구하는 자들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그런데 이것이 쉬울까? 과연 나는 왜 이 말들 앞에 악한 친구의 비유를 붙였을까? 또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 것에 대해 비유로 다음과 같은 말을 했을까?


Luke 18:1-8 바른

1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2"어떤 성읍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어떤 재판관이 있었다.

3그 성읍에 한 과부가 있었는데, 그 여자가 그에게 줄곧 찾아가서 말하기를 '저의 대적에게서 저의 억울함을 풀어 주십시오.' 하였으나,

4그가 한동안 들어주려고 하지 않다가 그 후에 속으로 말하였다. '내가 비록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존중하지 않으나,

5이 과부가 나를 귀찮게 하니, 내가 그 여자의 억울함을 풀어 주어야겠다. 그렇지 않으면 그 여자가 끝까지 와서 나를 괴롭힐 것이다.' "

6주께서 말씀하셨다. "그 불의한 재판관이 말한 것을 들어 보아라.

7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억울함을 풀어 주지 않고 그들을 오래 버려두시겠느냐?

8내가 너희에게 말하니, 하나님께서 그들의 억울함을 속히 풀어 주실 것이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보겠느냐?"


과연 너희는 이 말세에 믿음으로 기도하겠는가?

우리(하나님)는 악한 자가 아니다. 그런데 너희가 기도할 때에 우리가 응답하지 않는 악한 자와 같이 느껴질 것이다.

그 이유는 너희가 우리의 영인 성령을 받기까지 너희 속에 준비되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너희는 인격적으로 우리를 원해야 한다. 세상을 사랑하면서 우리를 구할 수는 없다. 그래서 우리는 너희가 그것을 깨닫도록 너희에게 마치 이집트에서 부름을 받고 기적들을 체험하고 홍해를 거쳐 광야에서 너희 옛사람의 행실을 회개하고 옛사람이 주고 거듭나는 과정을 거치게 할 것이다. 그 과정은 죽음의 과정이다. 그 과정의 끝은 절대절망이다. 절대절망을 경험하고 자신의 처참함을 경험해야만 인간은 인격적으로 진실하게 우리를 구한다. 그때에야 진정으로 찾고 두드리게 된다.

그렇게 너희가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우리가 응답할 수 있다. 그전에 하는 모든 것은 진실한 구함도 찾음도 두드림도 아니다. 진실로 심령이 원하지 않는 것을 입술로 구한다고 해서 그것이 진정으로 구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으로 구하지 않으니 우리는 응답할 수 없다. 이것은 너희 심령이 세상에서 태어나 악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응답에 시간이 걸리는 모든 원인은 너희 심령에 있다. 그런데 너희는 응답이 늦어지면 우리가 과부의 억울함을 풀어주지 않는 악한 재판장과 친구의 배고픔을 외면하는 악한 친구와 같이 느껴질 것이다. 떡을 달라고 하면 돌을 주고 생선을 달라고 하면 뱀을 주는 아비가 아닌 자와 같이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러한 자가 아니다. 우리는 선한 자다. 그래서 선한 것을 준다. 우리는 속히 주기를 원하지만 너희 본능이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 그래서 너희 속에 괴로움과 삶에 슬픔이 임하고 결국 절망이 임하여 깨닫게 되기를 기다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선한 것을 주는 선한 아버지다.

Matthew 7:11 바른

11너희가 악하더라도 너희 자녀들에게 좋은 선물들을 줄 줄 안다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분을 구하는 자들에게 좋은 것들을 얼마나 더 잘 주시겠느냐?"

위에서 좋은 것에서 좋은 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아가으소스(ἀγαθός)다. 이 단어는 선한 이라고 여러 곳에서 번역되는 단어다. 다음 본문들은 모두 아가으소스(ἀγαθός)를 선한 이라고 번역한 본문들이다.

Matt 19:16; Mark 10:17; Luke 18:18; Luke 23:50; Acts 9:36; Acts 11:24; Acts 23:1; Rom 2:10; Rom 3:8; Rom 7:12; Rom 7:13(2); Rom 7:19; Rom 8:28; Rom 9:11; Rom 12:2; Rom 12:9; Rom 12:21; Rom 13:3(2); Rom 13:4; Rom 14:16; Rom 15:2; Rom 16:19; 2Cor 5:10; 2Cor 9:8; Gal 6:10; Eph 2:10; Eph 4:28; Eph 4:29; Phil 1:6; Col 1:10; 1Thess 3:6; 1Thess 5:15; 2Thess 2:16; 2Thess 2:17; 1Tim 1:5; 1Tim 1:19; 1Tim 2:10; 1Tim 5:10; 2Tim 2:21; 2Tim 3:17; Titus 1:16; Titus 2:5; Titus 2:10; Titus 3:1; Heb 13:21; Jas 1:17; Jas 3:17; 1Pet 2:18; 1Pet 3:10; 1Pet 3:11; 1Pet 3:13; 1Pet 3:16(2); 1Pet 3:21; 3John 1:11

이는 너희 선한 행실들을 세상에 보이라고 한 산상수훈의 앞에 나온 다음구절과도 연관되어 있다.

Matthew 5:16 바른

16이와 같이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서 그들이 너희 선한 행실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라."

물론 이곳에 사용된 단어는 카을로스(καλός)다. 그러나 내적인 뜻은 서로 선함으로 같은 뜻이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는 선한 것들을 받고 너희 안에 선한 행실을 보일 것이다. 선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과연 성령이 임하도록 끝까지 기도하고 낙심하지 않는 믿음을 보일 것인가?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이 모든 말들이 너희에게 무슨 소용이겠는가? 이 모든 약속들이 너희의 것이 되려면 너희 자신의 마가 다락방에서 성령이 임할 때까지 기도하라는 음성을 듣고 그곳을 떠나지 말고 전심으로 기도해야 한다. 만약 너희 심령이 마가 다락방에 이르기까지 준비되지 못했다 해도 기도하라 그러면 너희 인생을 이끌어 그곳으로 우리가 이끌 것이다. 그러니 너희 안에 어떤 문제를 보던지 너희 외부의 어떤 일을 보던지 상관없이 기도하라. 그리하면 우리가 너희를 이끌어 너희 안의 모든 장애물들을 제거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떤 일을 만나든 이상히 여기지 말라. 그 모든 것이 과정이다. 그리고 결국 마가의 다락방으로 이끌며 또한 오순절을 경험케 하고 두려워 떨던 저 갈릴리의 어부가 산헤드린에서 선포한 것처럼 너희도 선포할 믿음을 얻게 하겠다.

Acts 4:1-22 바른

1사도들이 백성들에게 말하고 있을 때에 제사장들과 성전 경비대장과 사두개인들이 다가와서

2사도들이 백성을 가르치는 것과 예수님의 부활을 내세워 죽은 자의 부활이 있음을 전도하는 것 때문에 그들이 격분하여,

3그들을 붙잡았으나, 이미 저녁이 되었으므로 이튿날까지 가두어 두었다.

4그러나 말씀을 들은 자들 가운데 많은 사람들이 믿었으니, 남자의 수가 오천 명쯤 되었다.

5이튿날 그들의 지도자들과 장로들과 서기관들이 예루살렘에 모이고,

6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와 요한과 알렉산더와 대제사장 가문에 속한 자들도 다 참석하였다.

7그들이 사도들을 가운데 세우고 질문하기를 "너희가 무슨 능력과 누구의 이름으로 이 일을 하였느냐?" 하니,

8그때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그들에게 말하였다. "백성의 지도자들과 장로들아,

9만일 오늘 우리가 이 병든 사람에게 행한 선한 일, 곧 그가 어떻게 구원받았는지에 대해 심문을 받는 것이라면,

10너희 모두와 이스라엘 백성 모두가 알아야 한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았으나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렛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 사람이 너희 앞에 건강하게서 있다.

11이 예수님은 '너희 건축자들이 버렸으나 모퉁이의 머릿돌이 된 돌' 이시다.

12다른 이에게서는 구원이 없으니, 천하에 구원받을 수 있는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13그들이 베드로와 요한이 담대히 말하는 것을 보고, 본래 배우지 못한 무식한 자들로 알았다가 놀랐으며, 이들이 예수님과 함께 있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14또 병 나은 사람이 이들과 함께 서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은 아무런 반박도 할 수 없었다.

15그러자 그들을 공회 밖으로 나가도록 명령하고 서로 의논하여,

16말하기를 "우리가 이 사람들에게 어떻게 해야 할까? 그들이 행한 대단한 표적이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이들에게 잘 알려졌고 우리도 그것을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17그러나 그것이 백성들 가운데 더 퍼지지 않도록 그들을 위협하여 더 이상 누구에게도 이 이름으로 말하지 못하게 하자." 하고,

18그들을 불러 예수님의 이름으로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명령하였다.

19그러나 베드로와 요한이 그들에게 대답하여 말하였다. "하나님보다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일인지 판단해 보아라.

20우리는 보고 들은 것들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21그러나 그들은 백성들 때문에 사도들을 어떻게 벌해야 할지 알지 못하여 사도들을 더욱 위협한 후에 풀어 주었으니, 이는 모든 이들이 그 이루어진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때문이었다.

22이 표적으로 병이 나은 사람의 나이는 마흔 살이 넘었다.



눅 18:1,8 바른
1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셨다.

8"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찾아보겠느냐?"






[^1]: 여기서 성령이라는 호칭에 ~님을 붙이지 않은 것은 이 글의 화자가 예수님으로 설정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한국어 어법에는 (성령)~님이라는 존칭어미를 붙이는 것이 정확한 표현이다.


이 글은 예수님을 주인공으로 하는 1인칭 전지적 시점에서 집필되었다. 만약 전지적 시점이라는 말에 오해가 생기는 사람이 있다면 단어의 뜻을 찾아보기 바란다. 중고등학교 국어교과과정을 살펴보면 된다. 우리 소설 중 구운몽이 이에 해당하는 소설이다. 1인칭 전지적 시점과 1인칭 관찰자 시점에도 차이가 있으니 그 차이도 비교하여 보기 바란다. 현대의 대부분의 소설들은 3인칭 관찰자의 시점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래서 아마 대부분 이에 익숙할 것이다.


복음서나 사도행전과 같은 내러티브 성경들은 3인칭 관찰자 시점과 3인칭 전지적 시점이 같이 혼용되고 있다. 단지 관찰자로 있던 성경의 저자들은 성령님에 의해 전지적 시점의 기록들을 삽입하고 있다. 또한 3인칭 관찰자의 시점으로 기록된 기록들도 성령님의 감동에 의해 집필됨으로 그 사건의 구성과 내용의 취사선택과 전체적 내러티브의 흐름들이 결정됨으로 전지적 시점의 기반에서 관찰자의 시점이 표면적으로 사용되었다 할 수 있다.


또한 성경의 내러티브는 사실이며 소설의 내러티브는 허구라는 근원적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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