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상수훈과 가나안(천국) 입성
앞의 대인 계명에서는 구약의 대인 계명과 신약에서 내가 주는 대인 계명 간의 간극을 보았다. 그 차이는 인간이 극복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제 계속하여 마 5:48절 후에 주어지는 대신 계명(마 6:1~7:11)들에 관해 그 뜻을 밝히 비추어주겠다. 앞으로 언급되는 대신 계명은 구약과 그 틀을 완전히 달리한다. 그 이유에 대해서는 대신 계명들에 관한 뜻을 밝힌 후에 설명하는 것이 너희 어두운 눈의 이해를 위해 유익할 것이다. 앞에 구조분석에서 살펴보았으나 그 구체적인 것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러면서 구조분석에서 부여했던 제목과는 다른 단락의 제목을 부여할 것이다. 이를 통해 우리를 더 깊이 사랑하는 길을 보일 것이다.
Matthew 6:1 개정
1사람에게 보이려고 그들 앞에서 너희 의를 행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그리하지 아니하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상을 받지 못하느니라
너희는 바로 위의 이 글을 읽으며 이 글이 십계명의 1 계명과 같음을 간파하였는가? 그렇지 않다면 너희는 나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글을 쓴 자의 의도도 모르고 또 무거운 짐으로만 여기고 있는 것이다.
Exodus 20:1-6 개정
1하나님이 이 모든 말씀으로 말씀하여 이르시되
2나는 너를 애굽 땅 종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3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4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5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6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대신 계명에 관한 언급이 시작되면 처음으로 등장하는 말이 외식이다. 행동의 동기가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고 오직 우리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이가 부모의 칭찬을 바라듯, 그리고 여인이 자기 남자의 관심만을 원하듯 그러해야 한다.
만약 여인이 자기 남자가 아닌 다른 남자들의 관심을 원한다면 그것이 사랑인가? 이것은 음행이다. 간음이다. 이미 마음으로 다른 남자들의 관심을 원하고 그들의 사랑을 원한다면 그 여인은 이미 마음으로 간음했다.
내가 앞의 5장에서 대인 계명의 시작을 왜 사랑(미움)과 정절(음욕)로 정했는지 알겠는가? 나는 사랑에 관해 말하고 있다. 인간 사이에도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 서로 사랑하는 관계 안에서만 행복이 주어진다. 우리의 원함은 사랑이다. 우리의 법은 사랑이다. 그 법이 인간 안에 이루어지기를 원한다.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을 너희는 힘겨워하고 또 심지어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고 대적한다. 왜 혼전에는 성교를 하면 안 되는가? 왜 한 여자만을 사랑하고 다른 여자들과 혼외정사를 하면 안 되는가? 내가 왜 노골적인 단어들을 사용하는지 너희는 아는가?
진정한 사랑은 상대를 배려하고 상대의 유익을 구하고 상대의 행복을 구한다. 그렇다면 상대를 위해 절제하고 상대의 마음이 다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한다.
단지 짐승과 같이 남자와 여자 모두 육체적 쾌락을 구하는 삶을 살아서는 안된다. 육체를 구하는 삶이 얼마나 추잡한가? 그러나 현대의 너희는 모두 그것을 원한다. 너희는 쾌락을 위해 상대를 찾으며 또 쾌락을 위해 외도를 한다. 자기 사랑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하는 그것이 사랑인가? 매스미디어와 문화적 세뇌에 의해 너희는 더욱 그런 짐승적 쾌락을 요구하고 그것을 정당화하는 가치관 속으로 내몰리고 있다.
오직 한 남자, 그리고 한 여자를 사랑하여 그 상대를 위한 정절을 지키고 그 상대만을 사랑해야 한다. 누구든지 가장 아름다운 사랑을 떠올리면 이 모습이다. 로맨스나 심지어 영웅물에서도 조차 가장 순전한 사랑은 이러한 모습이다.
그렇게 사랑하라는 것이 무슨 규율이고 법인가? 내가 모세의 오경이나 그것을 바탕으로 선지자들을 통해 너희에게 준 것이 어떻게 무거운 짐이고 벗어나기 힘든 의무이며 금욕과 절제를 요구하는 악법일 수 있는가? 그냥 사랑하라는 것이다. 사랑하는 관계 안에서 더욱 아름다운 사랑을 하라는 것이다. 그런데 너희가 기억하는 성경의 계명은 모두 무거운 짐일 것이다.
그 이유는 너희가 순전한 사랑보다, 외도를 통해 주어지는 육체적 쾌락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정절을 지키는 순전한 사랑보다 너희 마음속 육신이 원하는 더러운 쾌락을 추구하는 네 자신이 누구인지를 볼 수 있어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폴리아모리(Polyamory)는 사랑이 아니다. 자연적 극악한 제약에 따라 어쩔 수 없는 결혼의 다양한 제도가 있다. 그러나 폴리아모리는 쾌락만을 위해 존재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폴리아모리는 쾌락을 추구하는 자들의 협정이며 진정한 사랑에 대한 배반이다. 진정 사랑한다면 오직 나만이 상대의 사랑이기를 원한다. 내 마음이 그러하다면 상대의 마음도 그러하기에 사랑하면 나를 지켜 정절을 상대에게 보임으로 신뢰와 사랑으로 충만한 관계를 형성해야 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질투가 없다면 사랑이 아니다. 질투가 없다면 그 관계는 무료 쌍방 간 성매매와 다를 바 없다. 단지 쾌락을 위해 존재하는 관계다. 그렇지 않다면 질투는 당연한 것이다. 심지어 진정 그 상대가 마음에 든다면 성매매에서도 질투를 느낀다. 그래서 창녀를 첩으로 들이는 것이다. 다른 자들과 자신이 원하는 여인을 공유하는 것이 싫은 것이다. 그래서 많은 돈을 들여서라고 그 여인의 몸값을 지불하고 오직 자신의 여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순전한 사랑과 질투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이며 사랑의 근원이다. 사랑은 원래 독점성을 담보로 한다. 독점되지 않는다면 사랑을 만족시킬 수 없다. 독점성이야 말로 사랑의 본질을 여과 없이 보여주는 거울이다.
내 사랑이 나 외에 다른 자를 사랑한다면 그것을 참을 수 있는가? 그것이 십계명의 제1 계명이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구약에서 나는 다른 형상이나 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다. 우리는 사랑이다. 그래서 우리는 질투하는 신이다. 우리의 사랑은 완전하며 순전하다. 그러므로 우리의 사랑에 질투는 필수적이며 질투가 없이는 우리의 사랑은 완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눈에 보이는 우상숭배와 이교숭배를 금지했다.
그런데 신약에서는 이렇게 말하지 않고 "외식하지 말라"라고 했다.
제1 계명과 외식이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인가? 앞에서도 구약에 모세에게 준 10 계명 중 대인 계명과 그 완성본인 나(예수님)의 계명을 비교하였다. 그렇게 하여 하늘나라에 들어올 수 있는 완전한 율법의 준수가 무엇인지 보였다. 이와 같이 대신 계명에서도 이것을 보일 것이다.
우상숭배는 우리(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이 우상숭배다. 우리를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다른 것도 사랑할 수 없고 오직 우리만을 사랑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 내가 너희가 형제를 사랑하고 아내를 사랑하고 자녀를 사랑하는 것을 금지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너희가 그들을 나(예수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너희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또한 부모나 아내나 자식이 생각했을 때 우리(하나님)로 인해 자신들은 부차적인 존재가 되었다고 느껴져야 사랑이다. 사랑은 독점적이며 배타적이다. 그렇지 않으면 사랑이 아니다.
그런데 율법을 지키는데 나를 사랑하여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이들에게 보이려고 한다면 그것이 나를 사랑하는 것인가? 아니면 나 외의 타자들 즉 세상을 사랑하는 것인가? 행위는 나의 계명을 지키지만 너희 마음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나는 너희가 마음으로 나를 떠나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 이것은 다른 것을 사랑하는 것 즉 다른 것을 섬기는 것이다.
너희가 나외에 다른 것을 섬긴다면 그것은 나외에 다른 신을 두는 것이다.
사랑하면 섬기게 되어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자가 상대에게 복종하게 되어있다. 그래서 사랑은 언제나 복종을 요구한다.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그의 기쁨이 우리의 기쁨이 될 것이다. 만약 상대가 유쾌한 성격이라면 우리는 그가 좋아하는 시끌벅적한 장소에서 맞을 것이다. 상대가 만약 조용한 성격이라면 우리는 주변이 정돈되고 소음이 없고 사람이 없는 안정된 장소에서 맞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가 미식가라면 그의 까다로운 입맛에 맞는 미슐랭에 열거된 식당에서 그를 맞을 것이다. 만약 상대가 대식가에 술을 좋아한다면 우리는 고기뷔페나 감자탕집에서 푸짐한 안주와 술을 대접할 것이다. 만약 상대가 물질적 어려움이나 육체적 노동을 두려워한다면 우리는 그 모든 것을 피하게 해 주기 위해 권력이나 경제력을 가져 상대를 돌볼 것이다. 상대가 예술적이며 문학적인 감성이 가득한 사람이라면 파리의 몽마르뜨나 현대적 음악과 예술이 가득한 콘텐츠를 준비할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랑한다는 것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내가 공급하고 그것으로 기뻐한다. 사랑한다면 아무 대가도 없이 그 모든 것을 준비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지배적이며 사랑하는 상대는 복종적으로 상대에게 권력을 이양한다. 더 사랑한다는 것은 더 많은 지배를 기뻐하는 행위로 나타난다. 정말 사랑하면 상대가 우리를 거절하며 모진 말을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감내한다. 그런 연후에도 또 상대에게 끝없는 프러포즈를 한다. 그것이 사랑이다. 사랑은 정서적 학대와 같은 거절도 감내하고 그것을 이겨내고 끝까지 상대가 나의 사랑을 받아줄 것을 기대한다. 사랑은 상대의 행위와는 상관없는 절대복종의 힘을 발휘한다. 이와 같이 사랑의 권력은 독점적이며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네가 상대를 사랑하면서 그와 동시에 다른 대상을 사랑할 수는 없다. 그렇게 된다면 너는 상대를 배신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복종이지만 그 대상이 유일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상대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도 좋고 저도 좋다고 말한다면 상대는 분노할 것이다. 사랑은 언제나 독점적이며 배타적이며 지배적이다. 이러한 특성 중 하나라도 빠지면 사랑이 아니다. 사랑한다면서 상대의 기쁨을 즐거워하고 상대의 필요충족을 추구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한다면서 내가 원하는 대로 상대가 따라오기만을 바란다면 상대는 우리에게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과연 그대는 나를 사랑하는 것이 맞는가?"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하나님)를 사랑한다면서 우리 외의 다른 것들에게 보이려고 우리가 준 율법을 행할 수 있는가? 그렇게 외식하는 자들이 사랑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다. 정말 우리를 사랑한다면 우리의 마음에 들려고 노력할 것이다. 그런데 다른 자들의 마음에 들려하고, 또 다른 자들을 기쁘게 하려고 한다면 외식하는 자들이 사랑하는 것은 누구인가? 그래서 외식은 다른 자들을 사랑하는 우상숭배다.
다른 자들에게 보이려고 자랑하는 자들은 다른 존재를 우상으로 숭배하는 것이다. 그런데 더 근원적으로는 자기 자신을 자랑하려는 것으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명예와 교만에서 나온 것으로 결국 자기 자신을 우상으로 숭배하는 것이다. 옛뱀이 추구한 자아실현이며 또한 아담과 하와가 추구한 자아실현이다. 결국 자기를 사랑하는 것으로 교만에 의해 정죄되는 우상숭배다.
외식은 그래서 제1 계명을 어기는 것이다. 구약에는 그냥 계명을 지키기만 하면 되었다. 그런데 이제 마음속에서부터 순전함으로 사랑해야 한다. 구약에는 율법을 지키는 것이 겉으로 보기에 우상숭배를 하지 않으면 되었다. 즉 다른 신을 섬기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에서 내가 말하는 완전한 제1 계명은 나 외에 더 사랑하는 모든 것은 우상이다. 만해 한용운이 말한 것처럼 기룬[^1] 것은 다 님이다. 즉 내가 사랑하는 모든 것이 신으로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사랑하는 것이 바로 우상숭배다. 그러므로 오직 우리(하나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면 우상숭배다. 신약의 계명은 마음속을 말한다. 마음으로 오직 우리만을 사랑해야 한다. 다른 것을 사랑하고 다른 것을 기루는 것은 우상숭배다.
그러므로 다른 인간들을 신경 쓰고 자신의 명예와 자랑을 신경 쓰는 것은 우리(하나님)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고 다른 사람들을 의식하고 사랑하는 것이다. 추구하고 기룬 것은 모두 우상이다.
외식(外飾)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내식(內飾)일까? 먼저 외식이 정확하게 무슨 뜻인지 알아야 그 반대말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외식자(ὑποκριταὶ)는 배우, 무대 연기자, 다른 이들에게 자신의 모습을 꾸며 속이는 자라는 뜻이다. 또는 그런 척하는 자들을 외식자라 한다. 외식은 무대에서 자기 본래의 모습이 아닌 다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다.
한자 외식(外飾)은 겉을 꾸민다는 뜻이다. 물론 겉치레를 하는 것이 외식자의 모습이기는 하지만 그 근원적인 뜻을 밝히기에는 부족하다. 율법을 지키는데 겉으로만 지키는 척 연기한다. 마음으로 우리의 뜻을 따라 사랑하여 지키는 것이 아니다. 단지 율법을 지키는 척한다는 것이다. 결국 그 목적은 연기하여 다른 이들을 속여 자신의 명예와 의를 얻는 것이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의의 한계가 여기에 있다.
그럼 외식의 반대말은 무엇일까? 외식의 반대는 바로 임재다. 코람데오(KORAM DEO)다. 바로 우리(하나님) 앞에서 우리를 의식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이를 성경에서 사용된 용어로 보면 우리의 얼굴 앞에서(면전에서) 행동하는 것이고 우리의 마음을 원하는 것이며 우리를 사랑하는 것이다. 그 표현을 구약에서는 우리(하나님)의 얼굴이라 표현했다. 야곱의 사건들에서 언급된 브니엘이다. 이것을 뜻하는 영어식 표현은 Presence다. 즉 지금 현재 이곳에 있는 현존을 뜻한다. 또 한국어로는 임재다. 바로 우리가 현재적으로 그 장소와 시간에 함께 하는 것을 말한다. 그것도 바로 우리의 얼굴 앞에 너희가 있는 것을 임재라고 한다. 그것은 바로 하늘 보좌 앞에 너희가 나아온 것을 말한다. 그것이 임재다. 임재는 다시 강조하여 말하지만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실재하여 존재함이다. 그리고 실재하여 존재하면 그 순간에 그것을 보고 느끼고 만질 수 있다. 마치 길에 나무가 있는 것을 알듯이 그렇게 우리(하나님)가 존재함을 보고 느끼고 아는 것이 임재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꾸며서 연기하는 것의 반대가 임재라는 것인가?
꾸며서 연기하는 것은 우리(하나님) 외에 다른 것을 바라보며 연기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의 반대는 우리를 바라보는 것이다. 바로 임재다.
또한 꾸며서 연기하는 것이 아니라 진정 마음으로부터 율법을 지키는 것은 오직 우리(하나님)의 현존을 인식할 때에만 가능하다. 인간은 마음이 부패하여 율법을 진심으로 지킬 수 없다. 그것이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그 율법을 행할 수 있는 심령을 가지려면 죄의 본성을 지닌 옛 자아가 죽고 새로 거듭나야 한다. 거듭난 우리(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그는 우리와 함께 함으로 우리 안에 있는 전능의 능력으로 그 율법을 행할 수 있다. 진정 순종하려 한다면 그는 결코 능력이 모자라 육신이 약하여 순종치 못하는 경우는 없다. 왜냐하면 전능의 능력인 성령의 능력(듀나미스)이 그를 두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 능력이 함께 함으로 인간은 완전한 율법을 행할 수 있다. 거듭나게 되면 우리(하나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가득 차게 되고 우리의 뜻인 사랑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득 생긴다. 우리에 대해 가난하며 우리의 뜻인 의에 주리고 목마르게 된다. 또한 우리의 긍휼을 받음으로 긍휼이 가득하게 된다. 그래서 자신과 같은 죄인인 원수도 사랑하는 것이다. 원수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을 이해하고 용서하여 사랑한다. 그런데 이 모든 일이 우리의 앞에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바로 우리의 임재가 있는 것이다.
Matthew 6:2~4 개정
2그러므로 구제할 때에 외식하는 자가 사람에게서 영광을 받으려고 회당과 거리에서 하는 것 같이 너희 앞에 나팔을 불지 말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3너는 구제할 때에 오른손의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4네 구제함을 은밀하게 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너의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교인 개인이 아니라 교회가 구제를 하면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광고** 해야 하는가?
어느 누가 우리(하나님) 대신 교회를 높여 영광을 얻으라고 하였는가?
결국 목사와 교회의 이름을 높임으로 동일한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다. 교인들도 그 교회에 다니는 것을 자랑스러워함으로 개들과 행악자들의 교만을 드높인다. 결코 우리의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영광 돌립니다'라고 말하면 자기 영광을 구하는 것이 아닌가? 또는 **'제가 할 줄 아는 것이 무엇입니까? 다 목사님, 장로님 덕분입니다'라** 고 말하면 그는 겸손한가?
내가 미워하는 것이 무엇인가? 나는 진심으로 행하는 것이 아닌 거짓으로 연기하는 것을 미워한다. 자신의 겸손을 가장하는 자를 더욱 미워한다.
나는 너희 시대에 십일조를 경멸한다. 그리고 너희 헌금봉투에 적힌 이름들을 미워한다. 또한 너희 구제헌금과 선교헌금과 건축헌금을 미워하여 멸시한다.
어리석은 자들아 나는 너희가 형제를 도우며 느끼는 자족감을 경멸한다. 또한 지적, 육적 장애인들의 말에 공감하지 않고 들어주지 않는 너희 성급함을 경멸한다. 그들을 도운다고 하는 너희 생색내기를 경멸한다. 그들에게 1억을 주는 것보다 알아듣기 힘든 그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그들의 마음을 감동케 하는 것을 알고 있는가?
너희는 너희 말만 하고 타인의 말을 들어주기 힘든가? 상담을 받기만 하고 상담하여 주기 힘든가? 나는 너희 소멸될 지옥의 내적치유를 경멸한다. 타인들이 너희 아픔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원망을 터트리는가? 그렇다면 너는 그들의 아픔을 얼마나 안아주고 있는가? 너는 그가 1 시간을 들어주기 원하다면 1 시간을 더 내어 2 시간을 들어주는가? 이것이 진정한 구제임을 알지 못하는가? 그러한 것은 생색내기도 힘들고 이름 내는 것도 아니니 하고 싶지 않은가? 너는 누구인가? 너의 아비는 마귀인가? 아니면 우리(하나님)인가?
너희 양심에 화인 맞은 자들아 너희는 꾸며 연기하면서도 그것이 얼마나 악한 것인 줄 알지 못한다. 나는 너희 거짓 겸손을 경멸한다. 너희 거짓 충성과 너희 거짓 봉사를 미워한다. 너희가 사람들에게 자신을 자랑하고 교회에서 자신을 높이기 위해 하는 모든 충성을 경멸한다. 장로가 되기 원하고 집사가 되기 원하며 기관장이 되기 원하는 너희 모든 중심의 탐욕을 경멸한다. 너희는 그것이 우상숭배임을 알지 못하는가?
원래 가장 깊이 물든 악은 자신이 악에 속하였다는 것도 모르는 악이다. 너는 네가 왜 죄인인지 진정으로 통곡할 만큼 알지 못하는가? 또는 너는 네가 교회 다니는 선량한 사람이라 생각하는가? 그렇다면 너는 너무 악하여 자신의 모든 주변도 악으로 둘렀다. 그러니 너의 모든 환경이 악이니 그것이 악인지 인식하지 못한다. 모두 서로서로 인간의 영광을 구하고 인간의 자랑질을 구한다. 그러니 서로서로 뭉쳐서 프로그램과 행사들을 만들고 조직을 만든다. 그 속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들은 세상이 구하는 오물이다. 그런데 그것이 교회에서 행해지고 우리(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행해지면 그것이 거룩한가?
그래도 깨닫지 못하겠고 네 주변의 사람들이 너를 환영하고 네가 하는 것을 칭찬한다면 바리새인과 서기관과 신사참배자들의 자손들이여, 너희에게 화로다, 화로다, 화로다.
Matthew 6:5-6 개정
5또 너희가 기도할 때에 외식하는 자와 같이 하지 말라 그들은 사람에게 보이려고 회당과 큰 거리 어귀에 서서 기도하기를 좋아하느니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들은 자기 상을 이미 받았느니라
6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
나는 너희 대표기도문을 미워한다. 나는 예배인도자나 설교자가 하는 기도를 미워한다. 또한 너희가 하는 습관적 주기도문을 경멸한다. 또한 너희 기도문집과 화려한 문체로 기술된 기도들을 미워한다. 또한 너희가 보이기 위해 행하는 모든 기도의 행위들을 미워한다. 너희 일천번제를 미워한다. 목사의 설교단상에 올리는 봉투를 경멸한다. 너희 작정헌금 봉투에 든 돈과 그 겉에 기록된 기도를 미워한다. 또한 그 봉투를 들고 기도하는 도적의 행위를 미워한다. 나는 대가를 받고 기도하는 모든 기도를 미워한다. 만약 그러한 기도에 응답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하나님)의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디에서 응답된 것인가?
기도는 사랑하는 자와의 속삭임이다. 그 사랑에게만 전달되기를 원하는 은밀한 바람이며 살랑이는 아지랑이다. 너는 네 사랑의 말이 실시간으로 다른 이들에게 공개되기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너는 운동장 모퉁이에 부는 회오리바람을 태풍이나 허리케인으로 과장하기 좋아하는 관종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과연 누가 자기 사랑의 대화를 타인에게 공개하겠는가? 사랑의 은밀하고도 때로는 시시콜콜한 사적 밀어를 타인들과 공유하기 원한다면 이는 매스미디어적 관종 외에는 그 정체성을 논할 단어가 없다.
그런데 기독교에는 이런 관종들이 많다. 그것도 매주일 그런 관종들이 나와 예배를 드리러 온 생각 없는 무뇌아들 앞에서 자랑질을 한다. 그것을 또 엄숙하게 받아들여 같이 하고 있는 교회의 목사도 동일한 종자다. 너희 아비는 누구인가? 역시 너희는 우주 최고의 관종인 사탄에게서 났다. 그놈은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않고 자신을 드러내어 북극성 위의 보좌에 앉기 원했던 최고의 관종이다. 자신을 자랑하고 자신의 행위와 지위를 자랑하는 그놈의 영을 받은 너희는 과연 우리(하나님)의 아들인가? 아니면 독사의 새끼인가? 네가 어떤 형태이든 관종이라면 너는 독사의 새끼다.
이러한 관종이 쓴 참회록을 너희는 읽어보았는가? 그렇다면 그 문체와 수려한 수사법을 눈치챘는가? 자기 참회의 고백을 게시하여 출판하는 관종을 무엇이라 해야 하겠는가? 그의 목적은 참회가 아니다. 참회의 문체는 그러할 수 없다. 참회의 눈물 속에서 수사법과 화려한 문체는 빛을 잃고 오직 꾸밈없는 어린아이의 말만이 있는 곳이 우리(하나님)의 보좌 앞이다. 너희는 다윗의 참회 기도를 시편에서 읽었는가? 그는 시인인가? 아니면 그는 단순 무식한 아이인가? 그 화자의 정체성을 너희는 보았는가?
나는 아버지이므로 내 아이의 기도를 듣는다. 나는 내 아이의 꾸밈없는 말 한마디를 노벨 문학상을 받은 천재의 글과 결코 바꾸지 못한다. 너희가 아비나 어미라면 나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분명 알 것이다. 말을 배우는 그 아이의 어눌한 발음을 듣는 기쁨을 너희는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나를 향한 기도에 결코 문학적 천재성으로 기인한 문장을 기뻐하지 않는다. 그것은 너희 관종들끼리 기뻐하는 종이 쪼가리다. 그것은 너희 관종들끼리 나누라. 결코 나의 앞에 들고 오지도 말며 내 예배에 끌어들이지도 말라.
나는 외워서 나에게 기도하는 것도 기뻐하지 않는다. 생각하여 보라 네 아이가 너에게 대화를 시도하는데 언제나 준비된 기록된 종이를 읽거나 아니면 다른 훌륭한 아이의 글을 외워서 말한다고 하면 그것이 어찌 부모와의 대화이겠는가? 이런 우스꽝스러운 일을 하면서도 그 어리석음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은 너희가 내 앞에서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 앞에서 말하고 있다면 감히 그렇게 하지 못할 것이다. 너희는 임재가 없는 관종들의 기도가 학습된 망종들이다. 너희는 그렇게 학습된 망종들의 예배를 뾰족지붕집에서 드리니 나는 그것을 이상히 여기며 그러한 너희를 슬퍼한다.
그러므로 우리(하나님)도 모르고 성경도 모르는 너희 어리석은 관종질을 버리고 우리를 찾으라. 그래야 살 길이 열릴 것이다.
Matthew 6:7-615 개정
7또 기도할 때에 이방인과 같이 중언부언하지 말라 그들은 말을 많이 하여야 들으실 줄 생각하느니라
8그러므로 그들을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9그러므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10나라가 임하시오며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11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12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13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 나이다 아멘)'
14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이방인들은 기도할 때에 기도를 듣는 대상인 귀신들에 대한 신뢰가 없다. 그래서 귀신들에게 무엇인가 얻어내기 위해서는 그 귀신들을 설득시킬 무엇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반드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제물을 바치든지 또는 정성을 바쳐야 한다. 불교인들이 일천배를 하는 정성을 들이는 것은 믿을 놈들이 못 되는 도적들에게 자신의 노력을 들이는 것이다. 그래서 이방인들은 귀신들을 설득하고 이용하는 제사나 굿을 하는 것을 원한다. 그렇게 하여 기도를 들어주는 귀신에 대해 너희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과연 귀신들이 너희의 기도를 듣고 너희에게 복을 주겠는가? 아니면 귀신들은 너희에게 복을 주는 척하며 너희의 소중한 것을 도둑질하겠는가? 어리석은 자들아 이에 대해서는 언급할 필요도 없다.
어찌 되었던지 이방인들의 기도는 기도가 아니다. 귀신들과의 거래며 귀신들에게 자신의 영혼과 가정을 파는 멸망의 통로다.
내가 보여준 기도는 간결하다. 그 이유는 이미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너희 모든 필요를 아시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 모든 것을 아시고 후히 주시며 꾸짖지 아니하시는 아버지께 구하라. 먼저 주시려고 준비하고 기다리시는 분께 달라고 정성을 들이고 또 설득을 위하여 여러 말로 장황하게 기도한다면 그것은 아버지께 대한 모독이다. 그렇게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악하신가? 너희가 그렇게 장황하게 설득하여 필요한 것을 얻어내어야 할 만큼 너희 하늘 아버지는 인색한가? 그렇지 않다.
만약 너희가 악한 욕심으로 구한다면 너희의 타락과 멸망을 원치 않으시는 아버지께서 주시지 않으실 것이다. 그런데도 고집을 부려 기도하고 그 응답을 받는다면 그 응답은 아버지께로 온 것인가? 아니면 귀신들에게로 온 것인가? 결코 우리는 악한 요구에 응하지 않는다. 만약 악한 요구가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누구에 의한 것일까?
너는 이방인의 기도를 하고 있는가? 우리(하나님) 아들들의 기도를 하고 있는가?
마 6:14~15 바른
14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15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기도와 관련된 이 본문에 왜 갑자기 용서에 대한 것이 등장하고 있을까?
누구든지 남에게 대접받고 싶은 대로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완전한 사랑이다. 상대를 사랑하는 것은 상대를 위하는 것이고 그 상대가 사랑받기 원하는 만큼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율법의 핵심은 여기에 있다. 그런데 이 원리대로면 내가 용서받으려면 형제를 용서해야 한다. 원수를 원수로 두지 않고 용서하여 형제로 두어야 한다. 그래서 기도의 마지막에 내가 이 문장을 붙였다. 기도에서도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용서하여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며(마 6:12)"라고 했다.
정말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가 용서받은 자인가? 용서받은 자는 용서받은 눈물이 있다. 자신이 죄인이었다, 죄를 깨닫고 돌이킨 자는 회개의 눈물이 있다. 그렇게 눈물을 흘려본 자는 과거 자신과 같이 여전히 깨닫지 못한 악인을 보면 불쌍한 마음이 든다. 결코 정죄하지 않는다. 너나 나나 죄인이다. 그런데 어떻게 죄인이 죄인을 정죄하겠는가? 진정 회개한 자는 자신이 얼마나 흉악한 죄인인지 안다. 사회적 도덕과 종교적 율법을 완전히 행한 바리새인 중의 바리새인 바울도 자신이 죄인의 괴수라고 고백했다. 그가 무슨 악행을 저질렀다고 자신이 죄인의 괴수라고 했겠는가? 단지 나 예수와 스데반을 죽이는데 동참했다고 하여 자신을 죄인의 괴수라고 했겠는가? 아니다. 로마서 6~8장을 읽은 자라면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그의 탄식을 보라.
Romans 7:24 개정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아, 나는 비참한 사람이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주겠느냐?(바른)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공동개정)
오 나는 悲慘비참한 사람이로다! 이 死亡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欽定倂用)
만약 누군가 이 글 속에서 죄인의 절규를 느끼지 못한다면 그는 심정 없는 괴물일 것이다. 율법의 의로는 완전한 자인 바울이다. 그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위와 같이 자기의 죄에 대해 절망하고 있는가?
인간 죄인이다. 이를 아는 자 용서한다. 그리고 서로 긍휼히 여긴다.
Matthew 6:16-18 바른
16"너희는 금식할 때에 위선자들처럼 슬픈 표정을 짓지 마라. 그들은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자신들의 얼굴을 보기 흉하게 하기 때문이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하니, 그들은 그들의 상을 이미 다 받았다.
17오히려 너는 금식할 때에 네 머리에 기름을 바르고 네 얼굴을 씻어라.
18그리하여 금식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나타내지 말고 은밀히 계시는 네 아버지께만 보여라. 그러면 은밀히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네게 갚아 주실 것이다."
금식하면 배가 고프다. 내가 배가 고픈 너희에게 억지로 금식하지 않은 것처럼 더 생생하게 보이도록 가장하라고 시키는 것인가? 내 말의 의도를 알겠는가? 나는 종교적 의식을 통해 연기하고 가장하는 것을 미워한다. 나는 종교적 의를 자랑하기 위해 연기하는 것을 가증히 여긴다.
오직 너희는 내 앞에서 은밀히 행하라. 그렇게 나를 사랑하는 자가 나의 사랑을 받으며 나를 사랑하는 그에게 나를 나타낼 것이다.
너희는 위의 계명이 요구하는 대로 살 수 있는가? 너희는 일평생 오직 우리의 임재 안에서, 우리만을 의식하고, 우리의 명령에만 순종할 수 있는가?
과연 너희 중 몇이나 우리와 함께 함으로 우리의 음성을 듣는가? 또는 너희가 듣는 그 음성이 귀신의 음성이냐? 아니면 우리의 음성이냐? 올바로 분별하여 우리를 따를 능력이 너희에게는 있느냐?
거듭나 하늘의 능력을 소유한 자는 성령의 가르침으로 모든 것을 분별하고 깨닫는다. 우리(하나님) 여호와를 구하고 그 말씀(성경)을 살피는 자는 분별을 배운다. 우리를 경외하는 자는 명철을 얻는다. 우리를 경외할 수 있는 자는 오직 거듭난 자다. 너희는 영을 분별하기 전에 먼저 거듭나야 한다. 겸손히 거듭남을 구하여 생명을 얻자. 그래서 지금은 거듭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자신이 거듭났음 분별할 필요가 있다. 너희 세대는 분별이 없는 어둠속에 있기 때문이다.
[^1]: '기루다'는 그리워하다의 고어다. 전라도 사투리에는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 '기루다'와 '그리워하다'는 모두 같은 어근에서 나왔다. 비슷한 뜻이지만 또 다른 뜻의 단어는 '기리다'가 있다. 현대어의 '기리다'는 표준어로는 '뛰어난 업적이나 바람직한 정신, 위대한 사람 따위를 칭찬하고 기억하다'를 듯한다. 이것도 일종의 그리워함의 행위라 할 수 있다. 본문에 사용된 전라도 사투리나 고어의 '기루다'와 동일한 단어의 다른 사투리로는 경북 방언인 '기리다'가 있다. '기루다'와 '기리다'와 '그리다'는 모두 동일한 단어의 시대와 지역에 따른 방언들이다. 그것이 현대의 표준어로는 '그립다'가 되었다. '그리다'에서 출발하여 '그리웁다'가 되어 다시 단축되어 '그립다'가 되었다. '그리워하다'는 '그리다'와 '하다'가 연합하여 만들어진 단어다. '힘겹다'와 '하다'가 합하여 '힘겨워하다'가 된 것과 같은 형태다. 그립다는 영어의 자동사의 형태이며 그리워하다는 영어의 타동사의 형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