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바다에 가고 싶다

힐링 에세이

by 한결

[에세이 그 바다에 가고 싶다

민병식


넘실대는 파도가 한가득 밀려오고, 비릿한 바다 내음이 콧등을 자극한다. 더이상의 수식어가 필요없다. 몇 시간의 기차와 버스에서의 지루함은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지고, 늘 그리워했던 바다가 벅찬 감격으로 다가와 가슴을 방망이질한다. 코발트색 물결이 잠시도 쉼이 없이 출렁거리고 힘껏 밀려왔다가 빠져나가는 파도의 도도함은 경이롭기까지 하다. 그 우렁찬 함성 위로 갈매기가 유영을 하고 모자란 듯 넘치듯 채우는 충만한 몸짓에 이끌려 바다 속 깊숙히 마음을 담근다. 뜨거운 열정과 끝이 보이지 않는 광활함으로 나의 바다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네에 앉는다. 모래사장이 펼쳐지고 그 멀리에 바다가 있다. 소나무 사이를 헤치고 살강거리는 해풍이 조심스레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팔짱을 끼고 지나가는 연인 들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사이 바다건너 작은 섬에는 들꽃 향기가 피어나고, 앞 뒤로 흔들거리며 바라보는 바다는 아스라이 하늘 끝 저 멀리에서 영화의 한 편처럼 사랑의 속삭임을 하늘에 비춘다. 점점 거세지는 햇빛 아래 아주 느릿한 걸음으로 모래 위을 걷는다. 뜨거움이 발 아래서 번쩍거리고 멀리서 불어오는 뜨끈한 바람과 볕의 온도가 피부로 스며들어 겹겹이 휘감아 온 몸을 소금 덩어리로 만들 때쯤 바다는 슬쩍 파도에 실린 바람과 그 바람을 타고 오는 비릿한 향기로 턱 밑까지 또아리를 틀고 있는 막힌 숨을 트여준다. 오직 바다만이 보여줄 수 있는 청량함이다.


아침마다 갈매기가 날고 이름 모를 누군가의 그리움과 오래전부터 내려온 수천 개의 추억 조각 들이 살고 있는 곳, 바다라는 외침 하나만으로 영원히 푸른 파도를 불러오는 곳에 나도 오랫동안 가슴 한 구석에 묻어두었던 추억 한 조각을 꺼내어 본다. 모래사장이 끝나는 그 어디 쯤에 나의 오늘을 묻으면 바람이 은빛파도에 입을 맞출때마다, 문득 문득 가슴 떨리는 모습으로 나타나 꿈인 듯 환상인듯 아스라이 눈 앞을 스쳐가겠지.


나의 케렌시아 안목의 바다, 현대의 부속품으로 살아가는 내게는 당장 찾아갈 수는 없지만 마음 속 케렌시아, 즉 추억을 떠올리고 상상하며 혼자 빙긋이 미소짓고 하는 나만의 장소가 필요했다. 안목의 바다는 그런 곳이다. 살면서 생기는 부스러기 들, 마음가는 대로 하지못해 생긴 때늦은 후회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는 미래에 대한 불안과 거기서 파생한 분노의 토사물인 비명소리도 그저 말없이 받아주고 묻어주고 닦아주는 평안으로 채워주는 곳이다. 치열한 삶의 전쟁터에서의 전투를 멈추고 잠시동안 이라도 현실의 이방인이 된다.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어서 가을이 오라고 고삐를 잡아채도 아랑곳하지 않는 무더위의 오후, 그 날을 떠올리면 행복해지는 장소, 커피 숍 밖에 있는 탁자에 앉아 바라보면 움직이지 않고 고정되어 있는 듯한 돛단배가 어느새 눈 앞을 가로지르며 하얀 포말을 남기고 사리지는 광경에 지긋이 눈을 감는다. 꿈을 꾼다. 해변을 거닐다 한 편의 시를 읽으면 박자를 맞추며 추임새를 넣듯 멀리서 바다가 손짓을 하고 파도소리가 들린다. 코 끝에 스미는 바다의 내음이 천천히 내 앞으로 다가 온다. 깊게 숨을 들이쉬고 내쉰다. 모래밭 가득히 숨어 있던 그 날의 추억들이 반짝이는 햇살을 받아 눈이 부시다.


그 바다에 가고싶다. 시멘트의 후끈한 추근거림과 어쩔 수 없이 공생해야하는 삶의 밀물과 썰물의 반복 속에서 한가닥 전깃 줄에 앉아있을 새도 없이 끊임없는 날개 짓을 해야만 하는 피할 수 없는 이글거리는 번뇌와 혼잡의 트랙을 벗어나고픈 내 마음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갑자기 내리는 소나기의 투정을 온 몸으로 다 받아주는 드넓은 초원처럼 조금 느려도 괜찮다고 조금 쉬어가도 괜찮다고 말없이 나를 품고 토닥여주는 그 넓은 바다에 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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