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온한 가을 주말의 늦은 오후다. 마음같아선 오리떼가 한가로이 노닐고 나뭇잎 팔랑팔랑 떨어지는 강가를 걷고 싶지만 불행히도 내가 사는 곳은 도심 중에서도 도로와 아파트, 상가로 가득한 곳이고 커다란 공원도 떨어져 있다.결국 걷기나 산책을 하려면 차다니는 소리가 빵빵거리는 인도로 다닐 수 밖에 없는 상황이라 아쉬움이 크지만 그나마 걸을 수 있다는데 감사해야한다.
느긋한 기분으로 한가로이 거니는게 산책인데 도심의 산책은 느긋함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도 요즘같은 가을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걷다 보면 근심 걱정도 바람과 함께 날아가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요즈음은 산책을 즐기시는 분들이 꽤 있다. 산책은 여러가지로 바쁜 현대인들에겐 더없이 소중하며 몸과 마음 건강에 모두 좋다. 그런의미에서 나는 앞으로도 천천히 산책을 즐기며 도시의 일상도 둘러보며 마음의 여유도 찾고 싶다.
갈바람이 간간히 불어와 콧등의 땀을 식혀주니 목이 마를 때 시원한 물 한잔 들이키는 듯 반갑다. 지치고 힘든 일상에 있어 일과 사회생활은 필수적이지만 충전의 시간을 갖고 다친 마음을 회복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데 특별한 무언가를 하지 않더라도 생각보다 쉽고 빠르게 행복을 느낄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자연과의 대화이다.마음의 눈을 가리는 어두운 그림자를 없애고 숲의 향기에 취하고 싶다. 삶의 부산물들, 이 것 저 것에 마음 쓰느라 다친 나의 가슴이 힘을 얻고 어린 시절의 순수하고 밝은 모습을 회복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한다. 자연은 우리의 생명이며 메말라가는 우리 들의 가슴에 산소를 공급하는 활력소이며 에너지이다. 이름 모를 들꽃과 대화하고 나무의 부비적 거림 소리를 들으며 자연에 동화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늘 생각하지만 일상에 얽매여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가까운 안양 천변을 찾았다. 나뭇가지 사이로 밝게 빛나는 푸른 하늘이 나를 향해 웃어 주고 코 끝을 간지르는 나무 향을 맡으니 마음이 한결 상쾌하다. 처음 방문하는 곳 같지 않고 마치 오랫동안 살았던 고향의 냇가같은 친근감이다. 보통은 집주변 거리를 산책하는데 오랜만에 나들이 온 기분을 느끼고 있다. 평일 저녁에는 운동도 해야하고 이것 저 것 자잘한 마음씀이 많아 여유가 없다. 한가로운 휴일의 천변 나들이가 도심 속 생태의 세상이 일상에 지친 지친 답답함을 희석시키면서 딱딱히 굳어버린 마음을 몽글 몽글 부드럽게 만져 준다. 휴일이 아니면 누릴 수 없는 고마움이다. 마침 주말의 날씨가 산책을 마음껏 즐겨보라는 듯 화창하고 늦은 오흔의 시각이라서 덥지도 않다. 시원한 바람을 맞는다. 갈바람이다. 여름의 후덥지근하고 끈끈함이 아닌 귓볼을 살살 간지럽히는 가을이 왔음을 알리려 부드럽게 소근거린다. 먼지 한 점 없는 하늘을 비추는 천변에 코스모스가 가득피었다. 바람에 야들야들 흔들리는 모습이 사색적이다. 분홍, 하양, 노랑의 화려한 색깔이지만 전혀 가볍지 않고 사치스럽지 않은 소박함, 나무들의 초록과 물빛의 투명함과도 잘어울리는 정겨움의 꽃이다.
저만치 잉어 떼가보인다. 그 옆을 따라 드문 드문 모여있는 백로 가족들이 가을 오후의 평안함을 더하고 한 마리의 새가 작은 물고기 한마리를 낚아올렸다. 실컷 물에서 배를 채우고 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걸까. 그 옆을 한 떼의 오리들이 줄지어 지나간다. 아직은 여름을 떨쳐버리지 못한 천변의 나무 들이 잎을 벗어던지며 가을을 준비한다.얼마 지나지 않아 노란물, 붉은 물 가득 뿜어내고 겨울잠에 들어가리라.
훌륭하고 비싼 음식이 아니라도 때론 된장에 보리밥, 열무김치를 비벼 먹어도 꿀맛인 날이 있듯이 꼭 유명 관광지나 명승지를 가지 않더라도 아름다움을 만끽하게 해주는 감동의 장소가 있다. 오늘이 그렇다. 덥지도 않고 춥지도 않은 가을의 늦은 오후 천변 산책 만으로도 여유롭고 행복한 시간, 자연의 순환을 바라보며 나를 잠시 내려놓은 평온의 공간이다. 삶은 무조건 거창한 것에 만족이 있는 것만 아니다. 때로는 이 작은 시간들이 주는 평안에 근육이 이완되고 가슴이 넓어진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할 시간, 아쉽지만 발걸음을 돌린다. 넓은 바다도 아니고 커다란 강도 아닌 도심 천변을 걸으며 오늘 난 자연의 순환과 살아있는 작은 우주를 보았다. 별 것 아닌 것 같아도 때론 그 안에 행복과 평안과 쉼이 들어있는 것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