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식 에세이
[에세이] 봄이 오시는지
한결
대학 시절 방송 동아리에서 활동하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이름은 지금 기억이 나진 않고 예쁘지도 않고 그냥 평범한 여학생이었는데 목소리는 성우 빰치게 예뻤다. 나보다 한 살이 어려서 날 '형'이라 불렀는데 어느 날 학교에서 쉬는 시간에 그녀가 내게 다가와 혹시 듣고 싶은 가곡이 있느냐고 묻고 등교할 때 틀어주겠다고한다.
"잉, 왠 가곡, 요즘 가곡 좋아하는 사람이 없는데"
의아했지만 내가 좋아하는 가곡 중 하나인 '님이 오시는 지'라는 가곡을 신청했다. 재수하던 시절, 가끔 혼자 경춘선을 타고 춘천을 가곤 했는데 그 가곡은 강촌의 풍경을 연상시켜 가사가 가슴에 와 닿았던 노래였다.
'물망초 꿈꾸는 강가를 돌아 달 빛 먼 길 님이 오시는가'
방송 동아리 여학생이 내게 관심이 있었나. 글쎄, 내가 그녀에게 전혀 관심이 없었기에 그런 생각은 꿈에도 하지 않았다.
그 당시 난 같은 과 여학생을 짝사랑하다가 고백을 했는데 보기 좋게 차였을 때였다. 그녀는 새침한 봄 같았다. 조용하면서도 웃는 얼굴이 예뻤던, 그녀를 볼 때마다 난 봄 꽃같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는 나를 '날라리'같다고 싫어했고 나를 따랐던 여학생이 있었는데 걔는 나보다 더 날라리였다. 나는 그녀와 내가 썸을 타고 있다고 같은과 그녀의 친구들에게 소문을 내어주도록 부탁하고 작전을 짜고 실행했는데 그녀는 그게 싫으니까 나를 찾아와 그 따위 헛소문 내지 말라고 따끔하게 충고를 했었다. 그 때 얼굴이 붉어지도록 망신을 당했다. 그러나 눈에 뭐가 씌인 나는 멈추지 않고 돌진을 했다. 그 후로 어떻게든 기회를 잡기 위해 생일이라고 거짓말을 하고 둘이 있을 기회를 만든 뒤 인천 월미도에서 한 번, 또 단체 수학여행가서 한 번, 학교 체육대회 때 한 번 총 4번을 프로포즈 했으나 차이고 3학년 어느 겨울, 눈이 펑펑 내리던 날, 광화문 네거리에서 드디어 그녀의 마음을 얻는데 성공했다. 4전 5기의 신화를 이룬 권투선수 홍수환 챔피온 보다 더 기쁜 쾌거였다. 그 후로 우리는 같은 학교 같은과 캠퍼스 커플이가 되었고 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는 아무 문제없이 행복한 시간을 보내게 된다.
그러나 문제는 졸업 후였다. 그녀는 취업을 했고 난 원하는 시험에 모두 떨어졌다. 가뜩이나 겨우 겨우 마음을 얻었는데 취업을 못하자 불안해지기 시작했고 결국은 마음은 안그런데도 점점 더 멀리하게 된다. 결국 난 이별을 선택한 못난 남자가 되었다. 지금도 청년 들이 취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그때도사정은 같았다. 경제가 좋아서 일자리가 많은만큼 청년의 숫자도 많았으니까. 후에 안면이있던 그녀의 친구가 찾아와 다시 잘 해보라는 설득에도 그놈의 알량한 자존심 내세우느라 거절하고 말았다. 다음 해 취업 재수를 하고 취업에 성공했지만 그녀의 소식은 끊기었다.
날씨가 풀린 듯하다. 아직 쌀쌀한 감은 있지만 서서히 봄이 다가옴을 느끼는 날, 언제 봄꽃 들이 필까. 산수유, 목련, 벚꽃, 진달래, 개나리의 천연색 물감들이 알록달록하게 얼른 수를 놓아주었으면 , 아마 봄까치꽃은 어느 산 비탈 나무 사이에 부엽토를 들추고 벌써 고개를 내밀고 있을지 모른다. 봄이 진짜 오고 있나. 세찬 맞바람을 맞아 웅크린 듯 보이지 않던 봄이 아주 살짝 반발자국 내딛으려하며 소리없이 오고 있는 듯하다. 강의실에 앉아 복도 멀리서 걸어오는 발자국 소리에 숨을 죽이고 귀 기울이며 그녀이길 기대했던 그 옛날 싱그러운 봄 빛같은 그녀의 얼굴을 보며 설렜던 그 날처럼, 수십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봄은 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