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포스는 인간들을 농락하고 신마저 속인 죄로 신의 노여움을 산다. 그리고 산 꼭대기까지 바위를 밀어 올리는 형벌을 받는다. 끔찍한 것은 횟수가 정해져 있지 않다는 것이다. 꼭대기에 이르면 바위는 굴러 떨어지고 그는 다시 처음부터 바위를 밀어 올려야 한다. 그야말로 시작도 끝도 없는, 성취도 절망도 없는, 무의미의 형벌인 것이다.
우리의 삶도 별반 다르지 않다. 특히 금요일이 되면 나의 처지가 시시포스와 다르지 않음을 감각하게 된다. 9-6 직장인으로서 한주를 겨우 견뎌내고 맞이하는 휴식. 물론 달콤하고 평화로운 시간이지만, 어김없이 찾아올 월요일을 생각하면 맘 한켠이 무거워진다. 견딤과 휴식의 반복. 그 운명의 무게감이 더없이 크게 느껴져 당장의 휴식을 향유하는 것조차 어려워지는 것이다.
알베르 카뮈도 <시지프 신화>를 통해 이를 설명한 바 있다. 아무렇지 않게 일상을 살아가다 보면 어느 한 순간 인간은 삶의 부조리를 깨닫게 된다. 저기 멀리 산 꼭대기에 우리가 바라는 목적으로서의 행복이 존재할 것 같지만, 바위는 다시 굴러 떨어지고 결국 우리는 반복의 굴레에 놓이고 만다. 삶에서 잠시 멀어져 이를 깨닫는 순간, 깊은 무력감에 빠진다. 의미 있는 삶이라 말하고 싶지만, 근본적으로 그러한 의미가 존재하지 않음을 알아채는 것이다.
물론 까뮈는 '행복한 시시포스'를 상상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부조리한 삶에 대항하는 방법은 막연한 희망을 품는 것이나 삶을 포기해 버리는 것이 아니다. 그보단, 부조리한 운명을 인식하고 있음에도 바위를 끝없이 밀어 올리는 것이다. 그로써 시시포스는 삶에 대한 자신의 의지가 그에게 주어진 신의 형벌(운명) 보다 강한 것임을 증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어디 말처럼 쉬운가. 무력감에 빠진 사람의 문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에 있다. "그래도 해내야 한다"는 말은 인간의 보편적 실존에 차원에서 이치에 맞지만, 실질적으로 누군가를 치유할 수 있는 처방은 아니다.
나는 고양이와 식물을 키운다. 반려라는 말이 있듯 함께 산다는 표현이 옳은 것일지 모르겠지만, 실상 그들의 생존이 내게 달려 있기에 부모와 비슷한 책임감을 느낀다는 차원에서 내겐 '키우다'가 더 적절하다. 적절한 때에 물을 주고, 밥을 주고, 바람과 햇빛을 보여주고, 놀아주어야 한다. 의무라는 단어는 부정적 뉘앙스를 풍기기도 하지만, 내겐 그렇지 않다. 누군가 내게 고양이와 식물의 집사로 사는 것이 무엇이 좋냐 물었을 때 '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 답했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오면 우선 고양이 화장실을 청소해야 한다. 사료를 채워주고, 마실 물을 갈아준다. 그제야 샤워를 마치고 이제 분무기를 든다. 방을 한 바퀴 돌며 식물들을 충분히 적시고 잠에 든다. 또 주말이 되면 꼭 물을 주어야 하는 식물이 있다. 또 어떤 식물은 2주에 한번, 한 달에 한번 물을 주어야 한다. 삶이 더없이 힘들고 무력해질 때에도, 빼놓을 수 없는 루틴이다. 나의 의지라는 것은 내가 책임져야 할 존재들의 요구 앞에서 자세를 낮춘다.어쩌면 그 또한 계속해서 밀어 올려야 할 바위와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고양이와 식물을 챙기고 나면 무력감을 잠시나마 벗어난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난 청소를 매우 매우 귀찮아한다. 삶의 무기력에 빠질 때면 쓰레기장 못지않은 더러운 방이 되어 버리기 일쑤다. 그러나 식물에 물을 준 주말이면 청소기를 집어 들 용기가 생긴다. 책임의 무게는 무의미로 인해 한없이 가벼워지는 삶일지라도 나를 발 붙이고 살아가게 한다. 집사가 되는 것이 무엇이 좋냐는 누군가의 물음에,'나를 움직이게 하는 것'이라 답한이유이다.
운명을 넘어설만한 의지를 발현하는 것. 모든 것을 긍정해 내라는 것. 좋은 말이긴 하지만 내겐 너무 거창한 일이다. 나는 그 운명에 치이고 휘둘리며 여전히 무력감을 느낀다. 대신 내가 선택한 삶의 방식과 그로 인한 책임과 요구에 기대어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다. '그래도 해내야지'라는 다짐 보다 '그나마 삶에 발을 붙이고 살 수 있게 한다'가 더 적절하겠다. 그것이 내가 바위를 밀어 올리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