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이 바로 서 있으면 꽉 차는 프레임. 하루 종일 엄지 손가락을 아래에서 위로 쓸어 올리며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다. 프레임 안의 그와 대화를 나누는 옆사람의 표정도, 바로 근처에 놓여 있을 물건도, 어떤 환경에 놓여 있는지도 잘 보이지 않는다. 전후 맥락도 전혀 알 수 없다.
몇 초 간의 말과 행동은 적나라하다. 표정과 얼굴 근육까지 면밀히 살필 수 있다. 좁은 프레임에 갇혀 시선이 집중된다. 그를 가까이서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지만, 사실 알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맥락은 없지만, 강렬한 인상만 남을 뿐이다.
누군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눈을 한가운데에 고정한 채, 연속되는 자극의 갱신 속에서 타인에 대한 이해는 요원하기만 하다. 시간도, 시야도, 맥락도 빼앗긴다. 들키지 않는 쾌락은 우리를 더 깊은 편견으로 몰고 간다.
맥락을 잃은 판단은 사실 ‘믿음’의 문제로 귀결된다. 언젠가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한 기대라고 적었다. 본래 믿음이란 것은 1부터 100까지 두 눈으로 확인하고 손으로 만져보고 나서야 생겨나는 게 아니라는 주장이다. 믿음은 결국, 감각되지 않는 무언가가 내 기대대로 존재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 더 가깝다.
이 주장에 근거하자면, 그렇기에 믿음이라는 건 의지와 결단이기도 하지만, 자의식 과잉의 발로일 수 있다. 타인에 대한 잠정적 판단은 전자의 경우에 한하여 용납될 수 있다. 당신을 속속들이 알지 못해도, 기꺼이 당신을 믿겠노라는 선언. 그러다 혹여 당신이 실수를 범하더라도, 그것은 나의 몫으로 소화를 해내겠다는 다짐이다. 타인과의 경계를 존중하는 차원에서의 실천적 사랑이다.
그러나 후자의 경우는 용납될 수 없다. 그들은 좁은 프레임 안에 노출된 편린으로 말미암아 '당신을 판단하고 처단하겠노라, 그리고 이 확신은 내가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노라' 주장한다. 그 확신의 기반은 사실 ‘보았다’는 경험에 현혹되어 나타나는 스스로가 옳다는 집착일 때가 많다. 믿음에 대한 이해가 다르다는 것은 차치하고서도 그의 비대한 자아는 부정할 수 없다. 비대한 자아를 가진 이는 타인을 세계에서 몰아내려고 함과 동시에 스스로를 진실로부터 멀어지게 만든다.
"너희 중 죄가 없는 자만 돌을 던져라" 여기서 죄는 비단 잘못된 행동, 비도덕적인 일탈 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는 누구나 취약한 부분 하나쯤은 달고 살아간다. 인간이기에 그 취약함에 종종 잡아먹히기도 한다. 취약함은 요컨대 인간으로서 갖는 원죄다. 취약함이 원죄라면, 누구도 타인의 죄를 단독으로 규정할 수 없다. 누구나 품고 있는 인간적 결함의 총칭으로 이해해야 한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며 서로에 대한 무분별한 판단과 편견은 무용하다는 것이다.
모든 인간은 취약함을 품고 있다는 것. 이를 인정하지 않고서 우리는 어떠한 죄도 테이블 위에 올려둘 수 없다. 자기 자신마저 부정하고 좁은 시야로 바라본 타인에게 무작정 돌을 던지는 건 오히려 우리 모두를 외롭게 할 것이라 믿는다.
인간은 모두 나약하다. 그럼에도 세상은 우리로 하여금 그 취약함을 숨길 것을 강요한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가린 채, 아이러니하게도 타인의 나약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를 미덕이라 굳게 믿는다. 우리가 어떤 지점에서 공통점을 갖고 있을 수밖에 없는지, 생각하지 못한다. 그러나 연대는 그 취약함을 고백하는 것, 그리고 당신도 이런 것쯤 하나는 갖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으로부터 시작된다. 좁은 프레임 밖 인간에 대한 가장 넓은 이해의 지평 위에서, 우리는 빼앗겨 버린 서로에 대한 맥락을 되찾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