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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내 딴에는

우리의 싸움은 어떠해야 하는가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by May

우리가 사는 세상엔 세상을 지금 그대로 유지하려는 자, 새로운 모습으로 바꾸려는 자가 있다. 바꾸려는 자 입장에선 세상의 변화는 한없이 더디게 느껴질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것처럼 여겨질지라도 세상은 언제나 바꾸려는 자의 손을 들어주어 왔다. 통시대적으로 보자면 분명 세상은 변화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눈앞에 산재한 부조리가 산더미일 때, 개인의 삶과 영향력은 보잘것없는 것으로 느껴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세상을 바꾸려는 자들은 조급하다. 그들은 풀리지 않는 문제들을 마주하고 자신을 탓하다 버티지 못해 세상을 탓하기도 한다. 내가 세상을 바꾸지 못하는 동안 누군가는 여전히 저편에서 죽음을 맞이하고 있지는 않을까, 아니 내가 세상을 바꿀 수는 있는 걸까. 그 불안 탓에 그들은 종종 누군가의 눈살을 찌푸릴만한 과격한 행동을 한다. 그들을 종종 이해하기 어려운 한편, 종종은 그들의 절박함에 사무치게 공감할 수 있는 이유다.


거창한 의미가 삶을 뒤덮을 때, 우리는 자신의 삶에 대한 맹목적 확신을 가진다.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 밀란 쿤데라가 정의했듯 '키치'에 빠지는 것이다. 존재 의의, 소명 의식 같은 것들을 양손 무겁게 붙들고, 자신의 삶이 대단히 숭고하다고 여기며, 그 외에는 모두 몰가치한 대상으로 전락시켜 버리는 것이다. 요컨대 윌라와 밥을 버리고 혁명을 외치며 집을 떠나버린 퍼피디아가 그러하다. 흑인 여성, 무장 집단의 혁명가, 페미니스트인 퍼피디아에게 '가족'이라는 개념은 그리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 못하다. 그녀는 모든 것들을 포기하고서라도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자다. 그리고 그런 자신에 대한 무한한 확신을 가진 자다.


그러나 그 길은 그리 순탄치 않다. 퍼피디아는 자본주의의 중심 격인 은행을 습격하다, 총을 쏴 누군가를 살해하고 만다. 아이러니하게도 살해된 이는 흑인 노동자다. 폭력과 차별은 여기에서 교차한다. 그리고 흔들리는 퍼피디아의 눈에서는 모순에 의해 폭로되어 버린 삶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현현한다. 싸움을 위한 싸움은 이렇듯 무엇이 중요한 것인지 잊게 만든다. 이후 그녀가 감옥행을 피하기 위해, 결국 그토록 소중한 조직을 배신하는 행위는 어떠한가. 그 결과 퍼피디아는 자신의 딸 윌라조차 평생 만날 수 없는 도망자 신세에 처한다. 덧없는 농담 같은 삶이다.


키치에 빠진 건 그녀뿐만이 아니다. 그녀의 맞은편에도 자신의 존재에 대한 더없이 확고부동한 믿음을 가진 이가 있다. 스티븐 록조다. 그는 권력의 편에 서서 세상을 지금 이대로 유지하려는 자다. 그리고 우스꽝스러운 이름의 백인 우월주의 집단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을 동경한다. 그가 추구하는 숭고함이란 순수 혈통 백인 엘리트가 되는 것, 누구보다 우월한 남성으로 자리 잡는 것이다.


바람대로 클럽은 그를 초대하지만 한 가지 걸림돌이 있다. 프렌치 75를 박살 내며 혁혁한 공을 세운 완벽한 군인이자 애국자이지만, 흑인 혁명가 퍼피디아와 관계를 가진 적이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사이에서 아이가 태어났다는 것. 클럽은 이를 인정할 수 없다. 록조는 자신의 과거를 지우기로 결심한다. 자신의 권력과 지위를 활용해 어마어마한 군대를 동원하여 밥과 윌라가 있는 박탄 크로스를 향해 총공세를 벌인다. 윌라를 제거하기 위함이다.


상당히 치졸한 인간으로 보이지만, 그의 입장에선 일종의 성전이다. 광대한 자의식이 국가 폭력으로 발현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도 나약한 인간이다. 그의 자의식 과잉은 어딘가 미쳐있는 '크리스마스 모험가 클럽'의 정신에 기인하고 있다. 제도화된 백인 우월주의에 휩쓸려, 응당 해야 할 일을 해내야만 하는 그도 안쓰럽긴 매한가지다. 나름 죽을 고생을 하고서 결국 그토록 동경하던 클럽에 가입하는 줄로만 알았던 그날, 클럽 멤버들에 의해 살해를 당하고, 흔적도 없이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만다.


사실 밥도 크게 다르지 않다. 프렌치 75의 가장 기본적인 위기 대처 매뉴얼조차 까먹고, 당장 눈앞에서 사라진 딸을 찾아 보호해야 하는데 마음만 조급하다. 활동하던 당시보다 둔해진 몸, 술과 마약으로 찌든 머리로 버둥대지만 버겁다. 세르지오의 도움으로 그는 겨우 겨우 핸드폰을 충전하여 프렌치 75와 연결되지만, 그깟 암구호를 기억해내지 못해 접선 장소를 알아내지 못한다. 내가 누군지 아느냐며 왕년의 전쟁 영웅은 소리치지만, 전화기 너머에서는 원칙적인 대응만 반복한다. 다행히 옛 동료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긴 밥은 뭐 별것도 한건 없지만 초흥분상태다. 혁명가 시절의 향수를 오랜만에 느낀 탓인지, '혁명 만세' 따위의 말들을 내뱉으며 좌충우돌 세르지오를 따라다닌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박탄 크로스의 가라데 센세 세르지오는 차분히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를 준비한다. 박탄 크로스의 마을 사람들은 세르지오의 지휘 아래에서 약속이나 한 듯 질서 정연하게 움직인다. 그들은 무언가에 고취되어 있지 않고, 어딘가 의미심장하지도 않다. 그저 반복되는 삶 그 자체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한 명이라도 더 살려내기 위한, 차분하고도 자연스러운 투쟁이다. 요컨대 우리는 그들의 투쟁을 '탈키치'에 위치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이들과 밥의 모습을 대조적으로 번갈아 보여주며 영화는 말한다. 투쟁은 계속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그리 특별한 것도 숭고한 것도 아닐지 모른다고. 그리고 영화는 묻고 있다. 지금 당신의 투쟁은 어딘가 좀 취해있는 것은 아니냐고. 당신의 투쟁의 진짜 목적은 무엇이었냐고.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긴 윌라는 혼란스럽다. 끝끝내 마주한 밥을 향해 총구를 겨눈다. 그리고 당신은 누구냐고, 암구호를 대라고 외친다. 돌아 돌아왔음에도 자명한 진실이 있다. 어딘가 멍청하고, 꼰대 같고, 비밀스러운 못난 아빠이지만 지금까지 날 지켜주었다는 것, 그리고 여기까지 날 찾으러 달려왔다는 것. 윌라는 총구를 내리고 밥에게 안긴다. 우리의 투쟁은 비밀스럽고 숭고한 단체의 암구호로 대변될 수 없는 것이다. 그저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내기 위한 자연스러운 실천이다. 영화는 어머니처럼 혁명가가 된 윌라의 모습을 끝으로 막을 내린다.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가 극단주의적 혁명을 긍정하는 좌파 영화라고? 전혀 아니다. 완벽한 해방도 완벽한 체제도 없다. 그렇기에 세상은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 그리고 실제로도 변화해왔다. 이 흐름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원 배틀 애프터 어나더, 계속되는 싸움의 바통을 이어받은 자는 어떠해야 하는가. 어딘가 취해버린 채 싸움을 위한 싸움을 반복하는 것이 아닌,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켜내는 것. 숭고하고 특별하고 대단한 무언가가 아닌 우리 일상에 스며들어 있는 실천을 반복하는 것이다. 윌라는 어머니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사랑을 내팽개치지 않을 것이다. 담담하고 담백하게, 든든한 가족 밥을 등에 지고 그 다음 싸움을 이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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