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이해한다는 것
내가 나를 뛰어넘는 상상을 할 수 있을까
무언가를 상상할 때는 비유와 비교를 하게 된다.
예를 들어 '열기구'를 모르는 유아들에게 열기구를 설명할 때는 이렇게 말할 수 있겠다.
"정말 큰 풍선 같은 곳에 뜨거운 열을 넣어 사람을 이동시킬 수 있게 하는 기구야. 사람이 탈 수 있게 바구니 같은 모양의 공간이 있어. "
이 말을 들은 대부분의 유아들은 풍선을 보며 거대한 풍선을 타고 놀잇감이 든 바구니에 앉아 날아가는 상상을 할 거다.
생리통이 심한 내가 두통이 심한 동생에게 한 말도 있다.
"생리통이 얼마나 아프냐면, 음... 배가 수시로 쿡쿡 쑤시고 아무것도 하기 싫고 몸을 웅크리게 돼, 두통의 열 배쯤 될까?"
상대적으로 두통이 심한 동생은 깜짝 놀랐다.
"두통의 열 배??????"
결국 말하는 사람이나, 받아들이는 사람이나 본인의 경험에 의해 상상을 한다.
내가 아는 물건 중에서, 내가 아는 고통 중에서.
내가 상상할 수 있는 풍선 중에 제일 큰 풍선, 그 밑에 달린 바구니, 그 안에 있는 사람과 불.
과연 얼마나 흡사하게 열기구를 상상할 수 있을까.
내가 두통으로 느끼는 고통이라 하면 애써 잠을 자려 하고, 안 되면 약을 먹고. 그런 편인데 열 배라면 약을 먹어도 잠을 잘 수 없고 머리만 쥐어뜯고 있을까?
과연 얼마나 다른 이가 느낄 고통을 체득할 수 있을까.
꽤 오래전에, 한 단란한 가정의 엄마가 스스로 생을 마감하였다는 기사를 접했다.
타이틀은 직장 내 괴롭힘이었다. 안타까웠으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직장 내 괴롭힘으로 왜 자살이라는 선택을 하였을까, 직장을 나오면 되지 않나?
그냥 직장 그만두고 나와서 다른 일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남은 가족과, 특히 아이는 어떡한담'
아니나 다를까,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니 비슷한 생각들이 보였다.
이 얼마나 '나'에게 머무른 모지란 생각이란 말인가.
작년 가을, 처리하지 못한 일이 쌓이고, 늘어가고 길어지다 보니 주말에도 일하는 게 당연하다 생각할 즈음이었다.
그날따라 다들 가벼운 회식이라도 있었는지, 평소라면 어렵지 않게 탔을 저녁 7시가 넘는 애매한 시간의 광역버스는 남는 좌석이 하나도 없어 3대의 버스를 보내다 시간만 더 허비하게 될 거 같아 정류장에서 기다린지 30분여만에 좀 더 갈아타고 돌아가야 하는 광역버스를 탔다. 이 광역버스는 나를 한강으로 데려갔다.
한강의 잔잔한 물결을 보니 문득 답답했던 속이 뚫리는 느낌이 들었는데, 그 순간 나도 모르게
'아, 저기 들어가면 얼마나 시원할까.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별 위화감을 못 느꼈고, 그렇게 계속 한강만 바라보다 느지막이 집에 도착했다.
피곤하고 정신없는 하루였으나 그날은 아이를 재우다 함께 잠들지 못했고, 결국 느릿느릿 방에서 거실로 나와 식탁에 앉아 아무 노트를 펴 들고 오랜만에 일기를 썼다. 그러다 깨달았다.
별 것 아닌 그 생각이, 길어지고 깊어지면 위험해질 수 있겠구나.
나, 지금 많이 힘들구나.
나는 나를 뛰어넘는 상상을 할 수 없기에, 지금도 기사에 나온 사람의 마음은 감히 내가 상상할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
그래도, 안타까운 마음은 가질 수 있다.
가엾다, 저 이의 고통이, 그 마음이.
아직 다른 사람의 마음을, 생각을 헤아리는 건 너무 어렵지만,
적어도 나를 사람으로 만드는 몇 가지 마음가짐은 잊지 말아야겠다 다짐한다.
그게 좀 더 나은 세상으로 이끌어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내 주변의 몇몇에게는 좀 더 나은 삶을 기대하게 만들어 줄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