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콕에서 천사를 만났다
캄보디아와 태국 여행의 마지막 날은 방콕에서였다.
10년 전 방콕에서의 기억이 났다. 밤이면 게스트하우스에서 만난 사람들과 카오산 로드 구석진 허름한 가게로 몰려가 식사하곤 했다. 다들 배낭 여행자라 주머니 사정이 넉넉치 못해 푸팟퐁 커리 하나 시켜 나눠 먹고, 너무 맛있어서 한 입이라도 더 먹고 싶어했다.
기억이 묻어있는 장소를 찾아나갔다. 태양이 내리쬐는 카오산 로드를 혼자 걷기도 했다. 대로변의 노란 건물, 도로 한가운데 세워진 조형물이 기억났다. 미얀마 대사관에서 비자 받고 돌아오며 다리가 아프도록 걷고, 세븐 일레븐에서 커피 한 잔 사 마셨는데 별로 맛은 없었던 기억이 난다.
오래 전 여행 사진을 볼 때 느끼는 것처럼 미쳐버릴 것만 같다. 나는 고스란히 기억하는데 시간은 흘렀고, 지나버린 시간을 어쩌지 못하는 절대적인 힘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 것도 없는 슬픔과 서러움. 종종 느끼는 이 감정은 어디에서 온 걸까? 한참 후에는 혼자 캄보디아와 방콕을 누비던 2020년의 지금 이 시간을 몹시 그리워하겠지? 지금에 더 충실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으로도 더 많이 남겨놓아야겠다. 분명 그리워질테니.
점심 식사를 하고 테웻 로컬 시장으로 향했다. 밤람푸가 아주 가까이 있었고 삼센 로드를 따라 올라가면 시장이 나올 것이다. 잠시 앉아 구글맵으로 길 확인하는데 여기에서 천사를 만났다.
이름이 Gabriel인 그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아느냐고 물었다. 아마 내가 길을 몰라서 구글맵을 들여다보고 있는 줄 알았던 것 같다. 테웻 시장에 간다고 하니 같이 가자고 한다. 마냥 즉흥적인 사람인 줄 알았는데 디테일한 상황만 흘러가게 내버려뒀을 뿐 큰 줄기에서의 계획은 가지고 있었다. 그는 방콕에 있다 Full moon party에 갔다 베트남, 싱가폴, 말레이시아를 거쳐 두바이에 있는 세계에서 제일 높은 빌딩에서 커피를 마실 거라고 했다.
동행이 생겼겠다 그는 길도 잘 찾기에 가는대로 따라갔다.
테웻 시장은 열려는 있었지만 닫힌 상점들이 많았다. 다른 여행자에게 추천 받은 짜뚜짝 주말 시장에 가기로 했다. 뚝뚝 기사는 시장까지 270바트를 불렀다. 가브리엘은 기사와 어깨동무하며 “프렌드~”하고 아주 쉽게 200바트로 깎았다.
그와 길을 걸으며 알게 된 사실이 있다. 나 혼자였다면 절대 그런 골목길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옷차림이 단정치 못한 남자들이 서 너 명 몰려있으면 그 쪽으로는 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이건 무의식 중에 자연스럽게 나오는 행동이다. 체구 작은 동양인 여자가 혼자 여행다니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최소한이지만 최대한일 수 있는 방법이었던 것이다.
가브리엘은 달랐다. 아무에게나 “헬로~헬로~” 외치며 후미진 골목에 거침없이 들어갔다. 가격도 쉽게 쉽게 깎고, 뚝뚝 기사나 버스 승객에게 스스럼없이 말 걸었다. 정말로 보기 좋았다. 자유롭고 당당하고 거침없는 모습이 딱 내가 멋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여행하며 멋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었는데 여행 마지막 날 그런 사람을 만났다.
그는 내가 묵고 있는 호텔까지 데려다줬다. 길도 잘 못 찾고, 흥정도 잘 못해서 돈도 달라는대로 다 주는 내가 걱정되었나 보다.
“I’m bad with directions.
(나 길치야.)”
“That’s why I’m here."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거야.)
내 부족한 점을 얘기했는데 예상 밖의 대답을 들으니 정말로 신과 천사에게 보호받는 것 같았다. 내가 무언가를 잘 하고 못하고는 전혀 중요한 게 아닌데 지나치게 작은 부분에 신경쓰고 웅크리고 있었구나.
그에게는 나와의 만남이 특별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나에게는 고맙고 기억에 남는 진짜 천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