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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DT Oct 13. 2022

아Q 세상.

조조 래빗

루쉰의 <아Q정전>는 ‘아Q’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을 조명한다. 그 이름을 들으면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안톤 쉬거(Chigurh)와 같이 국적 불명의 어떤 존재적 미지를 함의하기 위한 저의가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그러한 효과도 어느 정도 있지만, 아Q의 이름이 ‘아Q’가 된 것은 그 사람만큼이나 허무맹랑하다. 작중 작가로 등장하는 루쉰은 아Q의 이름을 한자로 표현하기 위해 갖가지 고민을 해보았다. 분명히 사람들은 아Q를 ‘아꾸이(아Quei)’로 발음했지만 그 발음에 맞는 한자를 쓰자니 어떤 한자도 적절하지 않았다. 심지어는 신해혁명 이후 서양 문자가 제창되어 예전의 한자를 찾을 길도 없다. 결국 루쉰은 이게 최선이려니 하며 그의 이름을 ‘아Q’로 적어냈다. 혁명을 입에 달고 살았다가 혁명당에게 총살당한 아Q의 최후를 생각해보면, 그는 뭔지도 몰랐을 혁명이 그의 목숨은 물론 이름까지도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했다는 것에서 아Q가 얼마나 우매한지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Q정전>은 아Q가 얼마나 우매한 인간인지 말하는 데에 힘을 쏟는다. 이 글에서 <아Q정전>의 줄거리를 다 읊진 않겠지만, 그의 정신승리법이라든지 하루하루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참으로 멍청한 인간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죽기 직전, 생전 처음 들어보는 붓으로 동그라미를 그리려고 쩔쩔매는 아Q의 모습을 상상하면 웃음이 나오기까지 한다. 동시에 아Q라는 인간이 만들어내고 있는 거대한 상징에 몸을 움츠리게 된다. 신해혁명 당시의 세태를 다각도로 담아낸 루쉰의 이야기는 이상하게도 현실적이기 때문이다. 1장에서 제목에 관한 루쉰의 비화, 제한적 전지적 시점에서 외부의 3인칭 시점을 넘나드는 시선, 체험 중심의 영화적 서술 등 <아Q정전>은 루쉰의 테크닉을 통해 (터무니없게도) 개연성을 얻어낸다. 결국 우리는 <아Q정전>을 읽으며 아Q와 같은 삶을 살지 않으려는, 혹은 아Q가 되지 않으려는 의지를 확인한다. 마찬가지로 현재까지도 아Q가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구심도 찾게 된다.


이 의구심에 대해 답하듯, 타이카 와이키키의 <조조 래빗>은 지구 반대편의 아Q를 조명한다. 조조와 아Q는 여러 공통점을 공유하고 있다. 조조의 삐뚤빼뚤한 글씨체는 아Q의 동그라미를 닮아있고, 조조의 ‘토끼가 얼마나 대단한 동물인데!’ 하는 다짐은 아Q의 정신승리와 겹쳐보인다. 아Q가 어떻게 해서 혁명당 행세를 하고 다니기 시작했는지 생각해보라. 아Q는 당시 명성이 높던 거인 영감마저도 혁명당을 무서워하던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혁명당인양 변발 머리를 틀어올리기 시작했다. 아마 <조조 래빗>의 조조도 비슷한 경험과 동기로 나치당원이 되고자 했을 것이다. 이러한 행동들에는 무엇보다도, 둘 모두 유아적 면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조조와 아Q의 맹목적인 충성심과 어리석음은 외부에 대한 지극히 유아적인 인지를 기저로 하고 있다. 유대인은 뿔을 가지고 있다는 등의 괴담을 곧이곧대로 믿는 조조의 모습이나, ‘쪽걸상’이라고 하는 마을 사람들이 전부 틀렸다고 생각하는 아Q의 모습들은 어린 아이에게서 볼 법하다. 사랑에 대한 인식도 마찬가지이다. 조조와 아Q 모두 사랑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문제를 겪는다. 특히나 사랑에 대한 미숙함은 뤽 베송의 <레옹>이나 웨스 앤더슨의 <문라이즈 킹덤> 등에서 흔히 동원되는 비유이다. 사랑을 알지 못하는 이는 유아기에 머물러 있는 존재이며, 조조와 아Q 역시 그렇다.


허나 아Q는 자신의 우매함에 발묶여 죽은 반면 조조는 끝내 살아남았지 않은가. 두 작품을 서로의 옆에 두고 관찰하는 이 시점에선 무엇이 이 둘의 최후를 갈라놓았는가라는 질문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분명히 아Q는 결핍의 존재이다. 그렇다면 과연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가. 이 질문은 무엇이 조조를 아Q의 비극에서 벗어나게 했는지와 연결된다. 벽과 거울엔 히틀러의 사진이 붙어있고, 항상 나치대원의 군복을 입고 있으며 ‘하일 히틀러’ 외치는 것을 연습하는 조조는 (중간 과정이 없었더라면) 당연히 독일을 점령한 군대에게 사살당했을 것이다. 하지만 <조조 래빗>의 결말은 그렇지 않다. 조조는 아Q에겐 없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조조의 주변으로 눈을 둘러보자. 우선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조조의 어머니인 로지이다. 로지는 독일 한복판에서도 비밀리에 유대인들을 위해 일하는 인물이지만, 막대한 인류애보다도 더 큰 모성애를 지닌 어머니이다. 전쟁에서 돌아온 군인들에겐 ‘집으로 가서 어머니에게 키스해드려라’고 이야기하고, 나치에 집착하는 조조를 현실로부터 극진히 보호한다. 조조에게 자유와 사랑을 가르쳐준 인물이기도 하다. 소년병 캠프에서의 유대인에 관한 수업과 비교해보면 조조의 진정한 교육자인 셈이다. (신발끈에 관한 장면들을 연상할 수 있다.) 그렇기에 조조는 진정한 상실도 경험할 수 있었다. 자유롭게 춤을 추던 어머니의 신발은 핏기 없이 공중에 매달려 있고, 조조는 그토록 사랑하던 어머니를 한순간에 잃게 되었다. 진정한 상실의 경험은 가족애의 절실한 확인임과 동시에, 자신이 맹목적으로 동경하던 나치의 진실을 마주하게 된 순간이다. 조조가 로지의 죽음 이후 군복을 입지 않는 이유도 이와 같을 것이다.


또 다른 인물들로는 엘사와 클렌첸도르프 대위가 있다. 나치가 설파하는 괴담을 그대로 믿는 어린아이 조조에게 유대인인 엘사는 사랑에 대한 인식과 함께 서로를 향한 이해를 가능케했다. 사실 처음부터 살가운 말이 오고간 것은 아니지만, 서로의 유약함이 절묘하게 부딪히며 유사 가족의 관계로 발전될 수 있었다. 위에서 언급한 내용의 연장선상에 있지만, 거기에 엘사는 조조가 유대인과 실제로 교류하는 기회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조조의 성장을 다른 방향으로도 이끌어냈다. 또한 극중 동성애자로 묘사되는 클렌첸도르프 대위는 엘사의 정체가 게슈타포에게 드러날 뻔한 상황에서 엘사를 구출해내고, 전쟁이 끝난 후 포로로 잡혀온 조조가 유대인이라고 거짓말하며 위기에 빠진 조조 또한 구출한다. 약자의 연대이자 공감인 것이다.


결과적으로 조조를 구원한 것은 무엇보다 사랑이다. 조조를 향한 로지, 엘사, 클렌첸도르프 대위의 사랑은 외부 세계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성찰이 되어 조조를 아Q의 비극으로부터 벗어나게 했다. 아이를 기르는 데엔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조조를 어리석고 생각없는 존재에서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해낸 것은 바로 그 ‘온 마을’, 그 온 마을의 사랑이다. 


이러한 사랑 예찬은 어떻게 보면 뻔하지만, 동시의 우리의 허를 찌르기도 한다. 조조를 구원한 것이 사랑이라면, 아Q를 파멸시킨 것은 사랑의 결핍이다. 허나 사랑은 단지 주어지는 것이다. 이 말은 곧 아Q의 비극에 우리의 책임이 있음을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그 누구도 아Q에게 사랑을 주는 이는 한명도 없었다. 그저 비웃거나 피하기만 할 뿐, 심지어는 누구도 아Q를 사랑해야겠다는 의식조차 하지 않는다. 더 나아가 루쉰의 글을 읽는 우리마저도 그렇다. <아Q정전>을 통해 아Q에 연민을 보일 수는 있으나 ‘우리는 아Q를 사랑해야 한다’라는 발상은 한낱 이상에 불과한 듯하다. 하지만 타이카 와이키키의 <조조 래빗>은 온전한 반론을 전개한다. 아Q가 우매함은 분명하지만, 오직 우매하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결국 우리는 아Q의 비극을 방조한 방관자가 된다. 어쩌면 루쉰이 그리고자 했던 인간이 절대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였을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조조 래빗>의 지적은 변하지 않는다. 애초에 사랑이 결핍되어있던 인간에게 사랑이 무엇인지 가르칠 수 있겠는가. 다시 말해, 사랑받지 못하는 존재에 대한 확인은 사랑을 주는 사람이 있어야 성립할 수 있다. 아Q의 말로 속 우리의 책임이 있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다르게 생각해보자. 우리가 아Q를 방조했다는 사실은 곧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의 방조가 또 다른 아Q를 만들어내고 있을 수도 있음을 내포한다. 누군가를 사랑할 필요가 없다는 명제의 빈틈은 아Q의 비극을 반복한다. 예컨대 길을 지나가다 보는 사람들부터 구걸의 손을 뻗는 걸인들, 혹은 뉴스에 등장해 연행되는 사람들까지. 우리는 누구든 사랑해야 한다. 그가 아무리 끔찍하고 혐오스럽다 해도 우리는 그를 사랑해야 한다. 이는 어떠한 사사로운 감정을 넘어선 문제이다. 아Q가 초래하는 혐오는 우리 개개인의 문제이지, 우리 존재 자체에 대한 문제가 아니다. 허나 아Q를 사랑해야 함은 사회를 구성하는 우리의 존재로서 부여받는 책임이다. 이러한 사실을 망각한 우리 사회는 아Q 세상과 하나도 다름이 없다.


다만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사랑 자체에 대한 고찰이다. 어느 정도의, 어떤 형태의 사랑이 필요하는가. 우선 이때의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의 사랑과는 다른 의미일 것이다. 또한 우리의 가족을 사랑하는 지나가는 정체 모를 이를 사랑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아Q를 사랑해야 하지만,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가. 삶의 지혜는 결국 이 질문에 대한 지점으로 귀결될 듯하다.


사진 출처: https://www.imdb.com/title/tt2584384/mediaviewer/rm1609217537?ref_=ttmi_mi_all_sf_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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