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한 것들과 헤어지기
퇴직이라는 것은 많은 익숙한 것들과 헤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출근길 만원 버스에서 부대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된 것, 환승하는 곳에서 의식하지 않아도 제대로 가고 있는 발걸음, 사무실에 이르는 동안 만나는 사람들과 가벼운 인사들…
90세가 되신 분들의 인터뷰 기사 두 개를 보았다. 하나는 “내가 60세에 은퇴하면서 이렇게 오래 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 무엇인가 시작하지 않은 것이 후회된다.” 하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나는 90세가 넘었지만 지금도 공부하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60세에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았던 분은 어학공부를 시작하겠다고 하셨다. 뒷 소식은 못 들었지만, 목표를 이루셨을 것으로 생각한다. 배움에 늦은 것은 없다.
“지금도 나는 공부하고 있다.” 이 글에 부끄럽지 않도록 살아가고 싶다. 꼭 취업이라는 수단으로써의 배움이 아니고, 경험으로부터 얻은 지식과 지혜가 그냥 사라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더 다듬고, 더 익어가도록 해야겠다. 젊을 때 가고 싶었으나 가지 못했던 길에 대하여 더 알아보고 한 걸음이라도 가 보자.
사실 공부에 대한 새로운 재미를 발견 중이다. 공부는 시험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는 강박관념이 새로운 것에 대한 공부를 어렵게 만든 것이다. 이제는 시험을 보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공부가 재미있다.
젊었을 때는 그저 시험과 독서량을 채우기 위한 의무감에서 읽었다면, 지금은 그런 의무감이 없다. 그래도 한 페이지를 읽더라도 오히려 생각할 것이 더 많아지기도 하고, 다른 부분들과 연계되는 부분들이 많아서 이해가 쉽기도 하다.
이제는 고전을 읽으면 오히려 이해가 잘 되는 부분이 있다. 노자의 도덕경이 거슬리지 않는다. 논어에 있는 어구들이 참 잘 정리되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버킷 리스트 하나를 만들었다. 책장에 있는 고전 병법서들을 다시 보면서 오늘날의 시각으로 다시 해석해 보는 것이다. 국한 혼용의 마지막 세대라서 인지 고전은 한자가 있는 것이 읽기 편하다. 그런데 한글 전용 세대에게는 기피하는 원인이 된다. 옛사람들의 지혜가 전달될 수 있다면 작은 노력이라도 보태고 싶다.
생애 만족도 커브는 40대에 가장 저점이고 50대 이후부터는 다시 상승하여 60대에 최고점에 이른다고 한다. 가장으로서의 경제적인 책임이 가장 무거울 때인 40대에 만족도가 낮고, 이후에는 책임에서 해방되면서 그 만족도가 다시 상승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제부터 시작이고, 기대되는 것이 많다.
60대 이후의 삶은 은퇴하고 여생을 하릴없이 보내다가 죽음을 기다리는 시기는 아니다. 농경사회에 없던 은퇴라는 말이 산업화 시대에 생겨났다. 죽을 때까지 노역에 시달리라는 의미는 아니다. 힘닿는 데까지 농사를 돕거나, 농사에 대한 지혜를 나누거나 애들을 보면서 젊은 사람들이 일에 집중하도록 돕는 것도 일이다. 농경사회의 노년 지혜를 오늘에 적용하자.
노년의 일에서 경제적인 수익이 보장된다면 더 좋다. 평균 연령과 건강 연령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에 노후에 급격하게 증가하는 의료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다. 돈이 있어야 자식들과도 멀어지지 않고, 사회적인 고립도 피할 수 있다. 더 이상 자식들에게 짐이 될 수는 없다.
김형석 교수님이 강조한 대로 신체적으로 허용할 때까지는 ‘영원한 현역’이라는 자세를 견지할 필요가 있다. 하고 싶은 것은 아직도 많다.
평균수명이 길어졌다고 한다. 나는 죽음의 문턱에서 “왜 그때 이런 것들을 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던가!” 하면서 후회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퇴직이 익숙한 것들과 헤이 짐이라면, 재취업은 새로운 것들과 친숙해지려는 노력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래서 영원한 현역을 도전한다.